게으르면 행복할 운명을 타고 났다고해도 불행하다.
이 세상에 인구가 너무 많다. 그건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그대로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공무원을 뽑는다. 10명을 뽑는다. 200명이 지원을 한다.
삼성도 공채를 모집한다. 100명 모집한다. 1,000명이 지원한다.
공기업도 30명 모집한다. 300명 지원한다.
이들이 모두 점집에가서 점을 봤다. 공무원 합격한다고 나온 사람은 100명이고, 삼성은 200명이고, 공기업은 150명이라고 나왔다. 그럼 이들 모두가 다 합격을 할까? 아니다,라는 것은 너무 자명한 사실이다. 이건 너무 눈에 띄는 사실이니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운명도 그렇다는거다.
공부로 성공할 사람, 일로 성공할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할 사람, 결혼을 해서 행복할 사람, 자식을 잘 길러서 나중에 보답을 받을 사람 등등 정해졌다는거다.
문제는 그것이 특정인 즉, 존재자를 기준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존재 방식'으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 10명을 뽑는 시험이 200명이 도전을 한다. 운명적으로는 합격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 자신은 원래 하루에 2시간만 공부를 하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3시간 이나 공부를 하니 당연히 합격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계속 준비를 했다고 하자. 그러면 합격할까? 당연히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 공부하는데 인심쓰듯 1시간 더 추가해서 3시간 공부한 사람이 합격할리가 없다.
여기에서 합격할 경쟁자들은 사람들은 밥 먹고 잠만 자는 시간 빼고 공부한 사람들로 추려지는 거다. 아무리 운명적으로 합격이 정해진 사람이라고해도 게으르면 합격 가능성 그룹에 낄 수 없다. 합격 가능성으로 추려진 사람들이 30명이라고 하자. 그래도 20명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10명은 자면서도 하루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잠을 잔다고 가정한다면 아마 이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합격을 할거다.
여기에서 합격한 사람들의 존재 방식은 밥먹고, 자는 시간 빼고 공부를 하면서 자는 시간에도 머릿속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여기에서 3시간 공부한 사람이 타고난 운명에서 합격하기 가장 최우선의 존재자라고 할지언정 물리적으로 존재 방식이 불합격스럽기에 운명은 이 사람보고 공무원 방향으로 선택만 하게 해준 것뿐이다. 다시 말해 다른 경쟁자는 전속력으로 달려가는데 이 사람은 그냥 산책하는 수준의 방식으로 준비를 한 것이다.
운명은 방향만 설정할 뿐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건 '존재 방식'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유는 운명 앞에서는 다들 똑같은 그 놈이 그 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합격 할 존재자로 태어났고 뱃속에서부터 정해진 운명이라고 할지언정 25년 뒤에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바로 존재 방식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 합격 존재자가 방향은 맞아도 너프하게 준비를 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합격 존재자가 될 수 없다. 반면 이런 상황에서 떨어질 운명으로 태어난 존재자가 합격자 존재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합격 존재자의 자리가 비었으니 이 사람이 합격 존재자로 바뀌는거다.
그럼 타고난 운명이 뭐가 중요하냐? 라고 반문할 수 있을거다. 타고난 운명은 똑같은 합격 존재 방식으로 살아갈 경우 똑같은 합격 자격이라면 타고난 사람이 우선권이 있다는 수준을 말한다. 결국 타고난 운명도 떨어질 운명의 사람들과 똑같은 노력을 해야 합격할 수 있다는 거다.
이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거다. 하지만 이 타고난 운명의 방식은 상위권으로 가면 갈수록 유리한 입장으로 작용을 한다. 2등이 1등이 되는 건 50등이 30등으로 가는 것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에 2등이 1등이 되려면 1등과 동등한 공부량과 방식을 한 다음에 운이 따라줘야 하는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여기에서 200명 중에 합격을 한다고 점꽤 결과가 나온 사람들은 100명이다. 3시간 공부한 사람이 합격하기로 타고났다고해도 다른 사람들도 합격하기로 타고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은 이제 인구가 너무 많다. 각자 하는 분야에 성공할 사람으로 태어났다고해도 인구가 많으니 내가 반드시 타고난 운명대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뜻이다.
운명은 길만 보여주는 역할인거고 결국 모든건 경쟁이다.
▼ 그렇다면 왜 3시간 공부자는 자신은 3시간만 공부해도 합격한다고 생각했을까?
타고난 운명은 어느 정도의 미래를 감지하게 해준다. 그래서 자신은 잘될거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이런 성질이 주변 사람들과 융합이 되면 삶의 태도를 갖게 된다. '존재 방식'이 결정 된다는 뜻이다.
주변 사람들이 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밥먹고 자는 시간 빼고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면 3시간 공부하는 사람도 따라하게 된다. 같은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라면 3시간 공부자는 자신은 이들과 달리 목표가 있는 사람이라는 그정도 수준으로만으로 우월감을 가지고 3시간만 공부를 하는 것이다.
이런 환경이 중요하기에 맹자의 어머니는 3번이나 이사를 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입소문으로 얼마든지 공부량에 대한 소문을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류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중심이라서 자신이 직접 보지 않은 것에 대한 것을 믿지 않는다. 여기에 편하게 살고 싶어하는 성질까지 더해지면 자신에게 들려오는 소문과 인터넷으로 접한 이야기는 다 소설이라고 치부하고 2시간 공부하는 자신이 3시간이나 하는 것을 대견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중요하다. 견문은 그야말로 최고의 선생님이며 그래서 여행을 가야 하는 것이다. 여행의(견문을 넓히는) 목적은 눈으로 본걸 내가 사는 세계와 비교를 하며 더 나은 세계를 설계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유튜브가 이걸 대신할 수 없다. 유튜브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자극해서 떠나게 만드는 태도를 형성하는 정도가 역할의 전부다. 이미 앞선자의 태도를 보고 따라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 전부라는 뜻이다. 한 달 동안 방안에서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보고 세계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면 상대방은 무슨생각을 하겠는가? 미쳤다고 할거다.
견문이 좁고, 생각이 편협하며 그래서 행동이 느리고 그마저도 귀찮아하는 태도라면 100억 운이 있어도 그 돈은 절대 당신에게 가지 않는다.
세상은 시간이 걸려도 견문이 넓고, 생각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래서 행동이 빠르며 그 태도 또한 정성이 들어가 있는 그럼 사람이 경쟁하는 그들만의 리그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에 운의 역할이란, 세상의 성공이 한 자리 남았는데 이런 존재 방식의 사람이 2명이라면 이 때 결정될 사람이 (타고난) 운이 있는 사람이 되는 정도가 운의 역할이라는 거다.
그럼 좀 현실적인 내용을 말해보자.
결혼해서 행복할 사람이 몇 % 일까? 현실적으로 약 10%라고 한다. 하지만 대다수는 결혼에 궁합을 보고 좋다는 말을 들을거다. 아마 직간접적으로 결혼 할 사람들 80%는 볼거고 본 사람들 중에 80% 정도는 괜찮다는 말을 들을거고 못해도 60% 이상이 괜찮다는 말을 들을거다. 대충 결혼하는 사람들 60% 이상은 좋은 말 듣는다고 하자. 그런데 왜 우리는 통계적으로 10쌍 중 고작 1쌍 만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게 되는걸까.
그건 바로 존재 방식을 지키지 않아서다. 점쟁이의 말로만으로 행복할거 같으면 누가 결혼에 대한 고민을 하겠는가? 연애 건너뛰고 바로 점을 보고 결정을 하고 결혼해서 연애하면 더 안전한 삶이 될건데 말이다.
28살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치기공과를 나와서 치과 상담 실장을 하고 있고, 원장이 집을 사줄테니 스폰 관계를 하자는 제안을 받을 정도로 예쁘다. 여자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남자가 좋아서 공기업에 다니는 남자와 선을 보고 결혼을 했다. 물론 결혼을 하기로 하고 궁합을 봤고 그 집에서는 서로 행복하다고 했다.
하지만 여자는 불행했다. 남자는 공무원스러워서 재미가 없었고, 그렇게 지내다보니 자연스럽게 잠자리도 피하게 되었다. 어느날 이혼을 하고 싶다고 했다.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 여자는 분명 행복하다고 점집에서 얘기를 들었다. 최소한 60% 안에 드는 얘기를 들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결혼한 부부가 행복할 경우는 10%다. 하지만 여자는 행복은 저절로 오는거라고 생각하고 행복해질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다. 여자는 남자가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는 것을 원해서 그것을 얻었다. 그렇다면 여자는 그에 합당한 노력을 해야 했지만 자신은 예쁘다는 것만으로 존재가 가치를 느끼고 사랑을 구걸만 했다. 내가 이 블로그에서 말한 결혼의 중요한 3가지 요소인 '요리, 섹스, 대화'는 전혀 없었다. 행복을 구걸만 하니 아무리 행복할거라는 얘기를 들어도 행복할 수 없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가 알아서 유머러스 해주길 바랬고, 퇴근후 알아서 저녁을 해주기를 바랬고, 알아서 운동을 해서 섹시미를 풍기며 잠자리를 준비해주길 바랬다. 반면 여자는 15년 동안 이혼도 하지 않고 애기도 갖지 않으며 남편의 직장 회원권으로 골프나 치다가 그것도 지겨워서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신세 한탄이나 하는 글만 캡쳐해서 올리고 산다.
중간에 그럴바에야 이혼을 하라고 한적이 있지만 자신의 인생에는 절대 이혼은 없다고 했다. 여자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결혼이라는 감옥에 가둬두고 안전하게 제공되는 밥이나 먹으면서 살지만 절대 자유와 행복은 없는 인생을 자처한 것이다. 이혼이라도 해야 다시 결혼으로 인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텐데 말이다.
원래 여자는 더 좋은 결혼 상대자가 있었다. 호주에서 온 남자로 한국에 한 달 있는 동안 소개로 만난 것이다. 이 남자는 호주에서 사업을 했고 공기업 남자가 아저씨라면 호주 남자는 오빠였다. 나는 이 남자랑 결혼을 하면 여자는 잃어버렸던 자아를 찾게 될거라고 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아버지가 어릴 때 사업을 해서 망하는 바람에 사업하는 남자는 싫다고 해서 남자의 애정 공세를 거부하고 공기업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것이다. 후에 이혼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난 당시 호주 남자를 만났으면 좋았지 않았냐고 하니 여자는 호주 남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했다. 거짓이다. 시간이 지나 자신에게 불어닥친 불행을 남탓으로 돌려야 편하니 그런거다. 같이 호주가면 하고 싶은 걸 도와줄 수 있다고까지 했으면 됐지 보쌈이라도 해야 적극적인건 아닐테니까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이 여자가 호주 남자와 결혼을 해도 불행했을거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행복을 구걸하는) 자에게 행복은 없기 때문이다. 영어도 배우기 싫어했을테고, 그러면 남자에게 더 집착했을테고, 그러면 남자는 지치게 될거고 자연스레 잠자리는 줄어들게 될거고, 여자는 그걸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할테고 요리도 안하니 결국 불행하다는 건 정해진거다.*
*그래도 가족도 만날 수 없는 그리고 별거로 인해 친정집에 사는 일은 하기 어려울테니 영어부터(행복을) 시작을 하는 가능성은 호주 남자쪽에 더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행복하다는 얘길 들었다고 해도 내가 그 행복을 쟁취하지 않은 이상은 불행할 수 밖에 없는거다. 이유는 결혼해서 행복한 부부가 10% 정도로 정해졌기 때문인거다. 또 얘기하지만 행복하다는 얘기를 들은 좋은 점은 불행하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보다 행복할 기회가 우선 주어진다는 것 밖에는 없다. 결국 불행해질 사람들과 노력은 같아야 운이 나에게 작동한다는거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이혼을 하고 싶어하는 여자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혼 후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해서 이혼을 포기했으나 6개월 정도 지난 후 결국은 같이 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고 처녀 때 하고 싶었던 플로리스트를 다시 도전해도 되겠냐는 질문을 했다. 결과는 아주 어렵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면 웃을 일이 있을거라고 했다. 그래서 여자는 이혼을 하고 플로리스트를 도전했다.
하지만 여자분은 중간에 너무 어려워 힘들어했고 무엇보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속눈썹 연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샵을 차리고 자리를 잡아서 연락을 했다. 새로운 남자친구도 사귄다고 말이다.
이 여자분도 중간에 이게 맞는 길인지? 포기하면 다른 기회가 있을지 같은 고민을 하면서 도전을 이어갔다. 이 여자분은 최소한 멈추지는 않았다.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는 차선책을 선택하는 기지도 보였다. 하지만 앞의 여자분은 행복할 수 있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오직 행복은 남자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선물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항상 구걸만 했었다.
인생은 셀프다. 물만 셀프가 아니다. 행복하다고 들었으면 스스로의 발로 뛰고 손을 움직여서 만들어내야 한다.
성공한다, 행복하다,라는 결론이 나오면 실패한다, 불행하다,라고 나온 사람보다 기회가 먼저 주어진 것 뿐이다. 하지만 같은 목표에, 비슷한 지역에 나와 같이 성공한다, 행복하다,라는 결론이 나오는 사람들은 최소 5배 정도 더 있다. 그러니 그들을 생각하고 그들과 경쟁해서 쟁취해야 한다고 전투적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승자가 되는 방법은 두가지다. 절대 강자가 되어 순위에 들거나 존재 방식의 유일하거나 해야 한다.
https://spike96.tistory.com/16464404
우리는 보통의 삶을 살고 있고 보통의 삶에서의 성공과 실패는 엎치락 뒤치락이 빈번이 일어나는 경쟁 지역이다.
굳이 영역을 따지자면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의 넘사벽 영역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행복할거라고 생각하고 남에 인생이나 등처먹으려고 하는 거지 인생의 영역을 제외한 영역을 생각하면 된다. 그중에 반을 세로로 잘라서 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살면서 사는 인생과 학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영역이 있다.
여기에서 학교에서 공부 잘해서 이력서 빵빵한 사람들과, 사회에서 현실과 미래를 잘 생각해서 실질적인 자신의 할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은 상위 영역에 속하게 되고, 학교에서 공부 못하고, 현실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들은 하위 영역에 속하게 된다. 이들은 여차하면 거지 영역의 사건의 지평선으로 빨려 들어가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한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중간 영역은 존재자가 정해진 영역이 아니라 존재 방식으로 사람들이 구분되는 영역인 것이다. 행복을 관장하는 운명의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너는 행복하고 너는 불행하다는 것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방식으로는 행복할 수 있고, 나의 존재 방식으로는 불행할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정하기 때문이다. 이건 운명론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어야 할 현실(론)이다.
이말은 (앞에서 말했듯이) 타고난 운명이 행복자로 태어났다고해도 언제든지 존재 방식의 전환으로 인해서 행복과 불행은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지금이라도 공무원과 결혼한 여자분이 마음을 바꿔서 사랑은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알려준대로 삶을 바꿨다고 생각해보자.
일단 골프를 그만두고 요리부터 배워서 남편의 저녁부터 책임을 진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요리를 배우고, 남편의 직장 생활을 위로하는 대화의 기술을 배우며, 잠자리를 원활하게 하게 된다면 인생은 바뀔거다. 남편의 퇴근은 즐거움이 될 것이고 퇴근 후 집안일도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할 것이며, 잠자리를 위해서 운동도 할 것이다.
어차피 결혼을 했고, 이혼은 인생에 없다면 이렇게 마음가짐만 바껴서 실천만 해도 인생은 분명 행복해진다. 처음부터 이런 생각으로 행동했다면 이 여자분은 호주 남자와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보통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큰 어려움 없이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결혼한지 15년 이나 지났기에 그리 간단히 행복의 영역대인 10% 안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행복할거라고 말은 들었지만 그후로 15년 이나 지났는데 이 여자분이 거지 영역대로 들어서지 않았을리 없기 때문이다.
▼ 불행하다고 말을 들었을 경우.
10% 라는 수치가 고정이라는 것은 15%대로 늘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행여 15%대로 늘어났다면 그건 다른 지역이 5%대로 행복 수치가 줄었다는 뜻이다. 즉 다른 지역에서 빼었다는 뜻이다.
이런 일은 정치인들이 좋은 시스템을 만들었거나 아니면 넘사벽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영역이다. 우리나라가 넷플릭스를 만들지 못한 이유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미 그 넘사벽 영역을 다 점거하고 그런 능력을 발휘해서 현실적으로 만들 수 있는 교육, 사회, 경제, 문화, 정치 시스템을 만들어 놨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미니홈피는 전세계적인 SNS로 만들 수 있었는데 당시 국가(시스템)가 막아서 결국 페이스북이 장악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 영역을 뺏으려면 유학생들이 선진국에서의 배움을 우리나라에서 펼쳐야 하는데 그것도 한국 정치가 받혀줘야 가능한데 우리라나는 그러지 못하니 그럴리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그렇게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스템이 없기에 결혼을 해서 행복한 수치는 10%에서 늘어나지 않을거다. 가끔 11%로 늘어나겠지만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9%대로 줄어들기도 할거니 그게 그말이다.
이말은 거지 영역에 있는 여자분은 이제부터라도 삶의 태도를 바꾸더라도 상대방이 쉽게 그걸 받아들이고 맞장구를 쳐주지 않을거라는 뜻이다. 손벽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불행의 영역으로 떨어진 지금 여자분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한다고해도 남편은 15년 간의 억울함에 금방 여자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을거고 의심에 의심을 하게 될거라는 뜻이다. 그러니 여자분이 1달 정도 노력을 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어서 지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서면 남자는 역시나.. 하는 심정어 거지 영역에서 그대로 머물게 될거다. 난 (노력) 했다, 하면서 말이다.
거지 영역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을 무한으로 정해야한다. 될 때까지 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해야 불행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 달 이든 10년 이든 내 인생이 행복으로 돌아서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이말이 뭐냐면 10%의 행복 영역은 고정이기에 행복 영역안에 있는 사람을 불행 영역으로 끌어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빈자리가 생기는 것이고 그안에 들어갈 여지가 비로소 그 때 생기는거다.
그게 한 달은 어림이 없고, 1년도 알 수 없다. 단지 내가 알아본 봐로는 10년은 가능하다. 10년은 내가 변화가 되어야 할 충분한 자격이 주어지는 시간으로 치부되어 거지 영역의 존재자들이 노력하면 행복의 영역에 있는 존재들이 불행으로 빠지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 말은 내가 지금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주변 불행의 영역에서 행복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운명적) 공격이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속적 행복이 될거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농사를 지으면 '정착'한지 1만년이나 지났고 결혼이라는 제도가 100년 정도 되었으며 우리나라가 70년정도 된 상태에서 10%라는 통계가 나온것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더라도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여러분들 상황에서는 크게 변할리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결혼해서 행복하다는 통계의 10%를 무조건적인 고정값이라고 생각하고 이 내용을 받아들여야 이해가 쉬울거다.
하지만 인생과 부부생활이 행복과 불행의 영역만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하지 않은 영역과 불행하지 않은 영역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자분이 불행의 영역에서 벗어나려면 일단 불행하지 않은 영역부터 진입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별거를 하고 잠자리를 갖지 않고 살지만, 일단 카톡 프로필 사진에서 결혼을 후회한다는 식의 내용과 사랑은 남편이 주는 것이라는 식의 내용부터 내리고, 큰 욕심 내지 않고 맛있는 저녁밥상부터 시작을 해서 차근차근 남편과의 접점을 만들어야 하고, 그 다음 주말이라도 만나서 대화를 하는 시간을 갖어야 신뢰를 쌓을 수 있을테고, 그 다음 잠자리를 갖어야 남편도 즐거움을 느끼며 여자와의 관계를 다시 시작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간이 최소 3년은 걸릴거고 5년은 잡아야 할것이다. 아마 이 영역이 불행에서 벗어난 불행하지 않은 영역으로의 도약이 될것이다. 이때쯤이면 여자분은 변화를 감지할 수 있을것이고 사랑은 구걸하는 것이 아닌 능동적으로 내가 움직여서 쟁취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알게 될거다.
그 다음 같이 골프를 치거나 여행을 가서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즐거움을 나누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남편에게 요구해도 서로 기꺼이 받아들여서 행동으로 옮기는 시기가 올거다. 이쯤이 불행하지는 않은 영역에서 벗어나 행복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 행복을 느끼는 영역이 될거다.
사실 이쯤만 되어도 성공이다. 한 10년쯤 공들이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지금이 여자 나이 43살 쯤되는데 10년이 지나면 53살이 되는 마당에 여기까지 오면 잘 살아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살아가면 10%의 행복한 부부들 중에 내연 관계가 있는 부부의 비밀이 드러나 무너지거나 혹은 행복한 노부부가 세상을 떠나거나 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렇게 빈자리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바로 나비효과다.
실리콘 벨리에서 Chat GPT가 시작되었을 때 구글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보면 이해가 될거다. 어느 여자가 행복하기로 결정을 하고 남편을 변화시키려고 자신의 변화부터 시작해서 10년의 시간을 들여서 나타나면 기존의 행복한 부부가 금이 가기 시작하는거다. 그래서 이들 부부가 행복의 영역으로 진입을 하는데 그것이 함께 꿈꾸는 것을 찾아서 도전하거나, 남편이 진급이 잘되어서 높은 직급에 오르거나 하는 일들이 발생하며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불행한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의 영역으로 오르기까지의 여정을 아주 짧게 묘사한 것이다. 만약 여자분이 처음부터 이랬다면 (고된) 10년 이상이 아닌 (큰 어려움 없는 혹은 즐거운) 3년 안으로 가능했을거다. 호주 남자랑 결혼을 해서 이랬다면 큰 성공을 했을거다. 그러면 언니도 도와줄 수 있어서 언니가 이혼을 하는 일은 없었을거다.
이걸 취업에 대비해서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여러분들이 삼성에 도전한다. 100명을 모집한다. 그리고 1,000명이 도전을 한다. 여기에 합격을 한다고 나온 사람들이 200명이다.
합격할 수 있다고 나온 사람들 중에 고학력자, 인 서울의 각과마다 탑을 찍은자들은 의심없이 합격을 할거다. 삼성도 이런 출신들이 일을 잘하더라, 인성이 좋더라.. 라는 식의 정보가 있을테니 말이다. 여기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50명이라고 하자. 앞에서 말한 넘사벽 영역의 사람들이다. 하지만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떨어진다.
150명 남았는데 자리는 50개가 남았다. 이들은 모두 비슷비슷한 사람들이다. 합격의 신 앞에서는 모두 도찐개찐이다. 이들에게는 내가 왜 떨어지냐는식의 존재자라는 개념은 무의미하다. 존재 방식이 합격에 가까운 사람이 합격을 하는 것이다. 이 방식으로 취업에 성공한 사람이 에베레스트 등반자였다. 에베레스트 등반을 해서 느낀점을 말하니 합격을 해버리는 것이다. 에베레스트로 도전과 성공을 맛본자의 존재 방식을 면접 때 퍼트리니 그것은 면접관들에게 울림이 되어 합격으로 향했다. 그래서 유행처럼 너도나도 에베레스트로 향했고 심지어 돈있는 집안은 헬기를 타고 정상에서 사진찍고만 내려오는 일도 생겼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그래서 취업 시장에서 에베레스트는 의미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 (존재)방식은 아직도 유효하다. 아래 정보글의 주인공은 사막을 등반하는 존재방식으로 대기업에 합격했다. 자신의 진짜 존재방식을 이렇게 두면 지방대 그것도 탑을 찍지 않더라도 합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따라하고 그것이 소문이 나서 의미가 없다는 것이 전달이 되었을 때 무의할 뿐이다.
그러니 자신이 원하는 좋은 곳에 도전을 하려면 학교형 절대자가 되거나 존재 방식을 추구해 자신을 규정해야 한다. 넘사벽은 그 분야에 남들이 쫒아오지 못하는 수준의 사람을 말한다. 이 사람은 그것이 존재 방식이다. 하지만 아무나 넘사벽이 되지 못한다. 넘사벽이 되지 못하면 그 아래에서 내 존재 방식을 추가를 해야 한다. 이런 사막이나 남극 횡단도 좋고, 몸을 만들어 대회에 나가보는 것도 좋고, 걷기 여행도 좋다. 타지역 알바하면서 살아보기 같은 것으로 나의 존재감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남은 150명과 내가 차별화 될 수 있는 방법이고 그걸 존재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원하기 전 이력서에 쓸 수 있으면 좋고, 그렇지 못할 방식이거나 시점이 지났을 때라도 하면 좋다. 운은 꼭 보이는 것만으로 작용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같은 것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경우다.
만약 남은 150명이 모두다 해파랑길을 걷는 걸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겼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제일 처음 생각하고 행동한 사람은 합격할거다. 따라하는 사람보다 자율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주 약간이지만 이런 존재 방식이 중요한거다. 그걸 따라한 149명 중에 제일 먼저 도착할거라고 생각하고 하루에 2코스식 걷는 사람도 합격할거다. 이런 사람도 후발이지만 의지라는 존재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해파랑길을 걷다가 포항에서 울릉도로 길을 변화를 주는 사람도 합격할거다. 상황에 따라 다른 방식을 취할 수 있는 존재 방식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작했지만 자신만의 존재 방식으로 변형한 사람들이 한 30명 된다고 해보자. 남은 자리는 20명이다.
이 자리는 떨어질거라고 말을 들은 사람들 800명 중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차지 할거다. 아주 희박한 확률이긴 한데 150명 중에 50자리가 다 채워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생각없이 사는 사람이 있기에 그 사람들로 나머지 자리를 채우는 건 의미가 없어서 800명의 사람들 중에 뽑혀지는 일도 발생한다. 물론 나머지 800명 중에 존재 방식이 제일 나은 사람들 위주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삼성은 지방대 출신도 많다고 한다. 아마 종의(삶의) 다양성이 다양한 의견을 낼 수 있기에 그런 방법으로 사람을 뽑는거 같다.
이렇듯 운명앞에서는 존재자는 의미가 없다. ▼ 그럼 넘사벽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은 존재자인가? 존재 방식자인가?
이들도 처음에는 의미없는 존재자였다. 하지만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은 10살 안에 자신의 존재 방식을 결정하고 부모님들도 학교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으니 10살 이후로 그냥 존재자(세상 혹은 지역에서 유일한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가 된것이다. 늦어도 20살 안에는 결정이 된다.
아마 우리나라도 그런 존재자들이 꽤 될거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천재들의 존재 방식을 거부하니 넷플릭스 같은 것을 만들지 못하고 드라마 1등 했다고 좋아하는 만년 후발 국가가 되었다. 우리나라 존재 방식이 결정된 존재자는 서울대 수석이나 그 언저리 사람들 말고는 없다시피 하니 그런거다. 우리나라도 학교를 뛰어넘는 존재자가 발굴이 되어야 하는데 모든 사람들의 존재 방식을 학교 공부와 시스템에 가둬 70년 넘게 키우다보니 드디어 정치도 딱 학교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lqOcc_-VZI
▼ 유희열이라는 예.
유희열이 처음 방송에 나왔을 때를 기억한다. 외소한 체격에 불쌍해보이는 얼굴과 그걸 부각이라도 하듯 박시한 자켓을 걸친 그의 모습이 생생한 이유중 하나가 바로 서울대 작곡과 출신이라는 거다. 서울대 출신이 가요계에 있긴 했지만 작곡가가 대중가요를 한다는 건 (내가 알기로는) 처음*이었다. 그 때 내 생각은 음악(전공)을 정말 못하거나 뜻이 있어서 그럴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음반을 사서 들은 내 생각은 곡을 감성으로 밀어붙였지 노래가 그렇게 훌륭하다는 생각은 못했다. 음악을 잘했다면 지금도 들을만 하겠지만 솔직히 지금은 지겹다. 신승훈 음악도 그렇다. 감성은 90년대 감성이니 지금은 더 못 듣는거다. 아무튼 거기에다가 객원 싱어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전에는 공일오비가 그랬는데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 '아침'이라는 팀을 만들어서 활동한 유정연이라는 사람이 서울대 작곡과 출신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재미로 낸 앨범 같아서 대중음악인이라는 칭호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이분은 이후 유학을 통해서 지금은 바이올린 리스트로 활동하는 걸로 알고 있다.
여기서 유희열은 존재자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작곡을 전공했는데 서울대라는 사실과 객원 싱어의 적극적 도입이다. 굳이 하나 더 넣자면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 대상 수상자라는 것도 있다. 이런 조건이 90대 감성과 어우려져 지금의 유희열을 낳게 했다. 유희열이 토이성 음악만 지속했다면 아마 신승훈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누군가는 레전드로 남았다고 할거다.)
하지만 그는 사회자로 전향해 자신을 낮추고 게스트를 돋보이게 하는 자세로 음악과 대중의 연결고리를 충실히 해냈다. 바로 이런 점이 지금까지 유희열이 표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들키지 않고 30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운명적 요소였다.
그의 행보가 아주 강하게 남은 프로그램이 바로 '비긴 어게인 시즌 1' 이었다. 사람들은 거기서 나온 노홍철이 유일한 오점이라고 말을 했지만 유희열은 그의 존재를 매니저나 프로그램의 재미를 위한 외부자 요소가 아니라 팀으로 끌어들였다.
난 이 시점이 유희열의 정점의 시점이라고 본다. 시간이 지나 난 여기에 맞는 글을 쓰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열었을 때 유희열의 표절사태를 직시했고 글을 접었다.
글의 종점은 우리는 유희열 같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기에 설득력이 떨어지니 시간을 기다리고 있으나 좀처럼 오지 않을거 같다.
아무튼 존재자 즉, 그 분야의 혹은 그 지역의 또는 그 시대의 유일한 존재 방식을 가진 자는 단순히 합격 방법이나 성공의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들보다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다. 실력이 일류면 일류중에 탑이 되고, 실력이 이류라면 이류중에 탑이 된다. 아마도 (드러나는 사람들 중에) 유희열은 이런 운명의 흐름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이 아닐까 한다. 심지어 90년대는 문화 르네상스 시대에 이랬으니 유희열은 시대의 운마저도 활용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30년 동안 표절이 들통나지 않았던 이유는 그의 존재 가치가 사회에 필요했으니 그동안 잘 봉인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또한 운을 활용한 자세이다.
하지만 유희열의 자리를 노리거나 어울리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을거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준비하고 있었을거고 호시탐탐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거다. 그런 지하의 보이지 않는 요소가 유희열을 안주하게 만들었다. 각종 프로그램에서 음악은 물론이고 안무까지 다 표절을 하면서 그것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자세는 그동안 운을 잘 유지해온 태도를 무너뜨렸다. 심지어 가장 인기있고 대중적인 피아니스트의 곡을 표절하는 대범함은 대중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했다. 이런 유희열의 뻔뻔한 행동은 거지 영역의 존재자들이 각성을 해서 성공의 영역으로 가기 위한 실행을 옮기기에 그런거다.
그래서 유희열의 운은 붕괴했고 그의 빈공간을 차지한 존재가 장항준이 아닌가 한다. 최근 알쓸인잡에서 보여준 장항준의 모습은 유희열보다 더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니 말이다.
유희열이 표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적당한 선에서 음악도 그만두고 안테나 수장으로서의 위치와 음악이나 대중요소를 대중에거 전달하는 역할로만 존재했어도 그는 알쓸인잡에서도 대중과의 접점을 만들며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는 장항준보다는 음악도 잘하고 학력도 좋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의 삶을 살고 있으니 와이프 덕에 살고 있는 (케릭터적인) 사람보다는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 학교 방식의 삶에서 벗어나 사회적 존재로 삶을 규정하라.
앞에서 취업을 예시로 이미 답은 말했다. 다시 핵심을 말하자면 취업이나 경연, 합격을 준비함에 있어서 실력만 추구하는 행위는 기본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기본을 아주 중시해서 고시합격 준비를 하듯이 준비를 한다. 모두 다 그렇게 준비하면 결국 우수한 사람만 선발되게 된다. 기껏해야 혼란스러운 지역은 100명 합격자 중에 80등에서 120등 사이가 가장 접점이 되는 수준이다. 합격 당락이 결정되는 구간이기 때문이다. 1등에서 10등은 과열지구라고해도 그냥 합격이다. 130등에서 150등은 순위가 아무리 바껴도 불합격이다.
그렇다면 불합격이라는 지역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빨리 기본 이외의 것을 활용해야 한다. 특히 101등부터 120등 사이에 있는 사람들은 80등에서 100등 사이에 있는 사람들과 차별화된 존재 방식을 찾아서 해야 한다. 이미 나태주처럼 태권도를 하고 있었던 사람이면 더 좋다. 자신의 노래 실력이 10시간을 연습해도 8시간 한것과 같다면 그 실력을 인정하고 나머지 2시간을 태권도 연습을 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그것이 운을 만들어서 합격의 운명은 110등이라서 떨어지는 당신이 80등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라고 여겨서 90등까지 올려 합격하게 해 줄거다.
사회는 학교가 아니다. 학교처럼 답이 정해진 번호를 찍는게 아니란 말이다. 여러분들의 자소서는 번호를 찍는란이 없다. 자소서는 여러분들이 회사에 필요한 이유를 적는 곳이다. 그것을 꼭 학교에서 잘했다는 것만 적으라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여러분들이 1등만 했다면 같은 존재 방식이지만 절대자라는 증거로 사용되어 합격으로 이끌겠지만 그렇지 못한 101명 이후의 사람들은 그럴 수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학교형 인재보다는 사회적 인재라는 것을 어필을 해서 존재 방식이 다르기에 내가 학교형 인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마치 운명론을 쓰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이건 엄연히 현실이다.
임영웅 같은 사람도 있지만 나태주 같은 사람도 있다. 따지고 보면 김호중도 성악을 전공했고, 영탁은 임영웅과 결이 다른 창법이고, 김희재는 군인이었고, 장민호는 어른스러운 인격이 있었고, 이찬원은 1,000곡을 즉석에서 부를 수 있고, 정동원은 어렸고 심지어 할아버지도 때에 맞게 임종을 하셨다. 다 알고보면 탑티어 실력을 바탕을 기본으로 다른 존재 방식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이걸 모른건 우리가 보지 않아서고, 볼 줄 몰라서고, 보려고 하지 않아서다. 최종 14인 중에 떨어진 7명은 이들과 차별화 된 존재 방식이 없던 그저 노력만으로 실력만은 운운해서 떨어진 것 뿐이었다. 임영웅식 노력 라인은 임영웅만 있으면 된다. 남은8위~14위도 실력은 탑 6에는 부족할거 없는 경쟁자들이었다. 존재 방식이 열심히 하는 것 말고는 없는 사람들이기에 그런거다.
결국 '존재 방식'의 증명이 곧 '운'이라는 뜻이다.
여러분들이 운이 없고 가난한 건 실력이 없는 상태에서 실력자들이 방식으로 살고 있으니 존재 방식조차도 없고 무의미한 방식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우리나라 역사적인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굴 탓하랴. 알았으면 지금부터라도 뭐라도 해야 내 가치가 올라가고, 운이 쌓이고,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잘되는 거다.
그리고 그 운을 유지하려면 지속적인 사회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건 운도 유지와 보수작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30년동안 표절을 봉인한걸 보면 알 수 있다.
미스터 트롯에서 최후의 14인에서 떨어진 7명의 지인들은 아깝다며 운이 없아고 위로를 할거다. 우리는 일상에서 운이라는 단어를 거부감 없이 사용하지만 막상 운(명)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운운하면 거부감을 느낀다. 운은 곧 현실이고 나의 유일성이 최고의 운이라는 것을 외면하면 안된다.
우리는 거의 전국민이 학교형 인재 방식으로만 살고 있기에 그 방식의 승자들만이 운을 누린다. 그래서 가진자는 더 가지고 있는자가 더 성공한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사는 가지지 못한 자도 가진자들처럼 학교를 졸업하고 주어진 직업으로만 살고 불만족 하면서 벗어나려고는 하지 않는다. 고로 가진 자들이 운을 다 가져갔으니 우리는 운이 없고 같은 노력을 죽어라해도 월급만 받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국가는 이런한 삶에서 부모님이 죽어라 마련한 집 한 채 물려주는 것도 뺏는다.
그러니 학교형 인재의 존재 방식에서 실패했다면 사회형 인재 방식으로 존재를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규정하라. 그래야 이 많은 인구들 중에 같은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사이에서 내 운명이라도 온전히 누리면서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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