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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어스는 왜 네오가 되어 시온을 구하지 못했을까?

_교문 밖 사색가 2022. 10. 28. 17:53

모피어스는 왜 네오가 되어 시온을 구하지 못했을까?

 

 

 

정신이 올바른 자는 외모도 가꿀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미스터 엔더슨은 네오가 되어서 시온을 구한다. 바로 트리니티와 함께 말이다. 
이 말은 절대자가 되어 그에 맞는 목표를 행하기 위해서는 동반자기 반드시 필요하다는 얘기다.


네오에게는 트리니티가 있듯이 모피어스는 나이오비가 있다. 허나 나이오비는 트리니티가 되지 못했다. 왜냐면 그녀는 예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모피어스를 사랑하지만 지극히 수학적 논리로만 따지는 사령관으로 환승했다.

 

 




▶ 그럼 모피어스 혼자서 기계들의 세계로 가서 세상을 구하면 되지 않았나?



영화에서 보면 네오는 시온 100년의 역사에서 기계들의 세계에 100km 안에도 접근하지 못했다. 허나 네오는 혼자서 그 길을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할 수 있다는 믿음보다는 해야 한다는 네오로서의 책임감과 인간의 해방(평화)이라는 커다란 성과를 위한 희생정신으로 목표를 정한 것이다. 


하지만 출발하기도 전에 스미스 요원에 의해서 눈을 잃어 트리니티가 없었다면 기계 세계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 그럼 눈을 잃지 않았다면 트리니티는 굳이 필요 없었을까?



아니다. 네오가 시온 세상에서도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눈을 잃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약 눈을 잃지 않았다면 초능력을 쓰는 순간 네오는 다시 림보의 세계로 빠졌을 거다.
즉, 시력을 잃었다는 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현상을 보고 그 힘을 이용하는 경지에 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됨으로 인해 네오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트리니티가 필요했고 둘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힘은 바로 '절대적 사랑'이었다. 그래서 매트릭스 4에 마지막 말이 사랑은 모든 것에 근간이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힘만으로는 하나가 될 수 없다. 더군다나 지난 100년간 100km 안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던 곳에 가는 것과 간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사랑만으로 목숨까지 바치며 함께하기는 쉽지 않았을 거다.


여기에는 믿음이라는 더 중요한 감정이 바탕이 되어 있다.

 

 

[스크린 샷] 네오가 눈이 멀지 않았다면 기계 세계에서 초능력을 사용할때 림보의 세계로 빠졌을 것이다.

 



▶ 믿음



1편에서 미스터 엔더슨은 스미스와 지하철에서의 대결에서 스스로를 네오라고 믿기 시작했다. 2편에서는 예언을 믿어 오라클과 모피어스의 리더에 따라 함께 했다. 3편에서는 스스로를 믿고 자신의 선택과 의지대로 움직였다.



3편에서의 네오는 과거 예언의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가 (다음 세대를 위한) 예언을 만들어가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나이오비는 예언을 믿지 않지만 네오를 믿기에 자신의 전함을 네오에게 내주었다.

*네오는 기계들과의 공존을 선택했기에 매트릭스 7 버전이 생기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러기 예언을 더 확장시키는 과정을 손수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스크린 샷] 네오가 스스로의 믿음으로 기계 세계로 가야 한다고 했을 때 다른 함장은 어림 없는 소리라 어름장을 놓지만 나이오비는 자신의 배를 내어준다. 오라클이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했지만 이건 자신의 의지라고 했다. 이건 나이오비가 이전 버전의 트리니티이기에 아직은 네오에게 영향력이 있다는 증거라고 본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모피어스 얘기를 해보자면, 모피어스는 3편에서 굉장히 힘이 빠진 존재다. 왜냐면 이미 예언대로 네오는 빛에 문에 들어가서 아키텍트를 만났고 그러면 자연스레 인간은 해방이 될 거라는 예언을 믿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은 것에 대한 허탈감에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즉 모피어스는 예언까지만 믿은 몽상가에 불과했고 그 이상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만약 모피어스가 아키텍트를 만났고 네오와 같이 왼쪽 문을 선택해 나이오비를 구했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네오처럼 기계 세계로 가는 결정은 하지 못했을 거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믿음을 가질 만한 지침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피어스 버전의 네오를 예상해보면 아키텍트를 만나 나이오비를 구한 후, 아마 시온에서 매트릭스에 접속해서 스미스에게 흡수되었을 거라고 본다. 왜냐면 스미스는 미스터 엔더슨 네오에게서 승리를 확실할 때 자신이 하는 말은 이미 했다고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건 이미 스미스가 이번 버전 매트릭스에서 한 번 이상 네오를 이긴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믿음도 없고 예언을 믿지 않는 나이오비라는 궁합은 모피어스가 네오가 되더라도 시온을 구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워쇼스키 자매는 이 세상은 사랑이 근간이라고 말을 하지만 결국 그 사랑은 믿음에 의해서 존재하고 그 영속성이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매트릭스는 모든 것을 얘기하지만 믿음이라는 주제가 가장 큰 주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믿음은 소망에서 발현된다.

 

[스크린 샷] 스미스 요원은 네오를 때려 눕히고는 자신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라고 말한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는 자신이 무슨말을 한건지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이미 이전 매트릭스 대로 가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의식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도 어리둥절한 것이다.

 

[스크린 샷] 모피어스가 미스터 엔더슨에게 말하는 내용이다. 허나 예언 이후 모피어스도 눈에 보이는대로 믿는 사람이 되었다. 결국 모든건 어디까지 믿느냐의 차이일뿐 누구나 눈에 보이는 수준에서 믿는 것은 같다. 그러니 보다 멀리 믿는것이 세상을 바꾸는 방법인 것이다.

 

 




미스터 엔더슨의 소망은 평화였다. 인간만의 평화가 아니라 기계들과의 공존이 가능한 평화를 원했다.

여기에서 모피어스와의 차이도 드러난다. 모피어스와 함께 바라본 매트릭스 2편까지는 우리는 기계들은 없어져야 하는 존재로 여겨졌으나 네오는 공존을 선택했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의 합작으로 매트릭스 영역을 벗어난 스미스 요원을 처리할 수 있었다.


이건 원하는 소망에 대한 현실성을 깨닫고 융통성을 발휘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매트릭스를 보면서 기계들은 다시 인간들의 소유물로써의 기능만을 하는 존재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게 지금의 세상이고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오의 시각은 그럴 수 없었다. 물리적 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인간들이 (인간 기준으로)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대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공격에 6번째 별종이 진행이 되어야 했다. 허나 매트릭스에서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위협하는 존재인 스미스 요원이 있었고, 스미스 요원은 각자가 대적을 했을 경우 승산이 없었지만 네오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협업은 스미스 요원을 이길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기게 네오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네오로서의 책임이자 소망인 평화를 걸고 스미스 요원과 싸운다.

 

 

[스크린 샷]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결투를 하지만 이건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백신을 주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이미 스미스화 된 매트릭스 생명체들이기에 백신 한 방으로 매트릭스의 모든 스미스들을 퇴치할 수 있었다.




▶ 융통성

 
융통성은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완벽을 추구하고 선택하는 것이 맞아 보이고 멋있어 보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적당히 오염된 불만족스러운 선택을 한다는 것에 대한 관대함을 발휘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즉 네오는 트리니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행*을 했듯이 나이오비도 모피어스를 사랑했다면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예언을 거부하기보다는 예언을 믿는 모피어스를 믿어줄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꿈에서 트리니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지몽을 꾸고는 트리니티에게 매트릭스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을 경험했기에 동행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더라도 모피어스는 융통성이 없기에 예언을 벗어난 세상에 대한 믿음이 없어 아키텍트를 만나고 스스로 기계 세계로 가기보다는 시온에서 매트릭스로 접촉해서 스미스와 싸웠을 것이라고 앞서 얘기를 했다. 그러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백신을 스미스에게 주입할 수 없었을 테니 인간의 승리도 없다.



융통성은 창조성과 비슷한 형태다. 
어떤 이는 예언이 있어도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존재가 되고, 어떤 이는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인간의 해방이라는 소망이 있기에 예언을 믿어보거나 믿게 된다. 하지만 이건 이미 존재한 것에 대한 정보를 통계적으로 나온 확률을 믿는 것과 비슷하다.


남들이 이렇게 해서 잘됐다는 통계가 높으면 그 길만 가는 사람들이 있고, 통계가 낮아도 자신의 바람과 낮은 통계 수치의 원인을 파악해서 그걸 믿는 '통찰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창조성은 통계를 뛰어넘는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을 시도하고 원하는 것에 대한 명확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서 지금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주변 환경을 최대한 활용을 하려고 하는 것이 창조성이다. 비록 주변 환경의 조건이 내가 싫어하는 것일지언정 원하는 것이 간절하다면 결국 타협, 즉 융통성을 발휘하게 된다.


모피어스도 나이오비도 융통성의 한계가 있었고 창조성은 없었다.


한 번도 해보지 않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은 창조성의 가장 큰 적이다. 모피어스는 멜로빈지언에게 죽음을 피해 자신의 겉모습을 바꾼 오라클을 처음 보고 경계를 한다. 분명 세라프에게 안내를 받고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만 보더라도 모피어스는 자신이 믿는 것 이상의 것은 믿기 어려워하는 존재다.(예언 이후의 상황이니 더 그랬을 거다.) 다만 남들보다 더 강한 소망으로 그 소망을 이룰 경우의 수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것을 믿는 사람이긴 했다.


결국 모피어스가 네오가 되지 못한 이유는 1. 예언을 믿어주며 죽음까지 함께 할 절대 사랑이 없어서이고 2.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소망을 이루기 위한 창조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크린 샷] 모피어스 뿐만이 아니라 트리니티도 오라클을 알아보지 못하고 의심한다. 눈에 보이는 가능성만 믿는건 사령관뿐만이 아니라 모피어스도 마찬가지였다. 모피어스도 스스로가 만들어갈 의지는 없었다.

 




▶ 죽음까지 함께 할 절대 사랑


그럼 왜 트리니티는 미스터 엔더슨을 절대 사랑하게 되었나? 
모피어스가 이번 버전의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될 절대 운명이었다면 나이오비는 모피어스에게 절대 사랑을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부분인데 그렇게 될 운명은 단지 '길'일 뿐이다. 그 길이 아스팔트 고속도로냐? 비포장 시골길이냐? 평지냐? 오르막이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 운명은 그냥 놓여있는 길이다. 그 길을 걷는 건 나의 '자유의지'의 영역이다. 



다시 말해서 트리니티는 미스터 엔더슨을 사랑하게 된다, 라는 것이 운명이라면, 미스터 엔더슨과 트리니티의 만남까지가 운명의 역할이라는 뜻이다. 그 운명을 받아들일지? 말지? 의 운명을 받아들이면 그 사랑을 어떻게, 어디까지 만들어갈지에 대한 선택은 오롯이 트리니티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트리니티가 나이오비 같이 현실적으로 해방은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방어만 생각한다면 미스터 엔더슨은 네오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미스터 엔더슨이 처음 오라클을 만났을 때 오라클은 미스터 엔더슨을 보고 네오가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트리니티도 오라클의 모습이 바뀌었을 때 믿지 못한 것을 보면 네오를 무조건 사랑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스크린 샷] 네오가 되지 못한 또 하나의 숙제는 자신의 길에 목숨을 내던질 자유의지를 발휘 하느냐, 마느냐의 의지도 달려있었다.




그때까지는 트리니티가 미스터 엔더슨에 대한 감정은 호감 이상 정도였을 것이다. 내 생각에 트리니티가 미스터 엔더슨을 사랑하게 된 건 죽음을 각오하고 솔직하게 자신이 네오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 모피어스를 구하러 가겠다고 나섰을 때라고 본다. 그의 솔직함과 용기 그리고 올바름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자세를 죽음도 불사하고 행하는 모습으로 인해서 트리니티는 네오를 마치 처음부터 사랑했다고 호감도 사랑이라고 덮어쓰기 착각을 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네오는 (지하철 승강장) 스미스와의 격투에서 자신의 힘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스크린 샷] 모피어스를 구하러 가기 위한 언쟁에서 미스터 엔더슨은 모두가 기대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털어놓고 트리니티는 자신이 좋아하니 트리니티는 그가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 트리니티의 사랑은 확신까지는 아닌, 죽음까지 불사는 정도 수준은 아니다. 설사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마지막 기계 세계까지 함께 갈 정도는 아닌 수준이었다는거다.

 

[스크린 샷] 개인적으로 여기에서 트리니티가 네오에게 완벽하게 빠졌다고 봐진다. 목숨을 건 올바른 행동을 한 네오가 '그'의 능력을 보여준 상태에서 자신을 구해준것 상황에 잘생긴 얼굴을 드리밀면 더이상 빠져나올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리는거다. 바로 다음 장면이 모피어스 얼굴이 나오는 장면인데 직접보면 차이를 느끼게 될거다.




물론 나이오비도 이전 버전에서 모피어스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스미스와도 대등한 존재도 되었을 것이다. 아마 호감을 느끼지는 못했을지언정 용감한 태도에 감동이 되어서 사랑했을 것이다. 허나 예언을 위해서 죽음까지 불사하면서 함께 하는 사랑은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설사 죽음까지 불사했다고도 예언을 위해서 죽는 사랑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이전 매트릭스 버전의 나이오비는 자유를 갈망했지만 그래서 매트릭스를 오가고 네오를 찾고 그랬겠지만 아주 큰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예언대로 하는 행위는 반대하는 수준이었을 거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트리니티와 나이오비의 사랑에 대한 차이가 드러난다. 트리니티는 자신의 생각이 무엇이든 네오의 생각이 올바르고 목적에 맞는 생각이면 무조건 따르는 정도까지 간 절대 사랑이고, 나이오비는 모피어스의 생각이 올바르고 목적에 맞아도 죽음까지 이르는 상황이라면 현실의 상황을 도입해서 죽어도 목적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해서 따르지 않는 자의식이 있는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설사 목적을 이룬다고 해도 죽으면 소용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여담이지만 아마 나이오비의 사랑이 우리들이 하고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최고조에 있는 사랑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 1대 네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인가? 바로 외모다. 큰 키에 잘 생긴 얼굴은 일단 첫 만남부터 호감을 사고 나중에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마치 호감 단계부터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한다. 여기에 가진 조건이 좋고, 올바른 데다가 솔직하며, 용감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정의로운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자신의 죽음까지 불사하고 행한다.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트리니티도 대의를 위해서 싸우는 존재인데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을 대의를 위해서 사용하는 존재라면 여기에 존경의 의미도 더해질 수밖에 없다. 이건 빠져나올 수 없는 절대 사랑으로 치닫게 된다. 이렇게 되면 호감은 반했다고 변환이 가능해지고 반했다는 것은 사랑이라고 변환이 가능해져서 호감부터 사랑이라는 공식이 성립되게 된다.

 

즉 존경과 사랑이 합쳐져 죽음도 불사하는 관계가 형성이 된 것이다.



하지만 모피어스는 좀 그렇다..
외모적으로 치명적 매력이 없는 모피어스는 용감함에 나이오비가 사랑을 할 수 있다고는 해도 상황상 물리적으로 될 수 없는 것까지 함께 하기에는 그 사랑이 좀 부족하다.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프로그램이기도 한데 외모라는 조건에 대한 이해도 함께 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추론해보면 매트릭스 버전 1의 네오는 아마 멜로빈지언(1대 네오)이라고 볼 수 있다.
좀 늙어서 개인적인 취향이 갈릴만하지만 그래도 잘생긴 외모를 가진 멜로빈지언은 1대 네오라고 추론이 가능하다. 능력은 보여주지 않지만 쌍둥이 같은 능력자들을 호령하는 것을 보면 네오의 능력을 5번이나 버전 업한 매트릭스에서 아키텍트를 피해 잘 숨겨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정적인 결론은 멜로빈지언의 애인인 펠로소포네가 네오를 보면서 멜로빈지언도 네오와 같았던 때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멜로빈지언은 여자를 너무 좋아한다. 매트릭스 버전 1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했기에 종족 번식적인 측면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니 '능력있는 사람 = 종족번식이 세상에 유리' 라는 인간도 동물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가정한 데이터로 만들었졌을 것이다. 그래서 멜로빈지언은 바람둥이가 됐을 것이고 펠로소포네는 그런 그를 위해서 죽음까지 가는 사랑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외모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아키텍트는 매트릭스 3~5 버전은 절대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 외모를 포기하는 네오 버전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중 하나가 바로 모피어스였던 것이다.

 

 

[스크린 샷] (젊었을 때는 잘 생겼을거다.) 바람둥이라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고 곁에 있는건 펠로소포네도 빠져나올 수 없는 사랑이 있다는 뜻이라고 봐진다. 허나 멜로빈지언의 바람끼는 참을 수 없다는것도 사실인거다. 그래서 첫번째 매트릭스는 실패했을거다. 완벽함이란 감정이 결여된 유전자적 기준의 세상이라고 착각한 아키텍트의 실수다. 질투심은 결과를 예상밖으로 만든것이다.

 

 

 

이 말인즉슨 사랑에는 외모가 아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럼 여기서 모피어스가 네오가 되어서 시온을 구하지 못한 세 번째 이유는 여자들에게 처음 호감을 사는 외모가 부족해서라는 결론도 나온다.

 

 

좀 억지스럽지만 나이오비는 예언이 틀렸지만 네오가 기계 세계로 간다는 결정을 했을 때 자신의 전함을 내준다. 이건 능력을 보여준 자가 대의를 위해서 희생을 하는 태도에 존경을 담은 마음으로 줬을 것이다. 허나 상황이 전함이 한대라도 더 있는게 유리한 조건이면 갈등이 있어야 한다. 허나 나이오비는 거침없이 네오에게 자신의 전함을 내어준다. 오라클에게 해야 할 일을 하라는 말을 들었다고해도 전함 없는 함장은 꼭두각시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나이오비는 감행한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나이오비가 매트릭스 5 버전의 트리니티였기에 모피어스처럼 네오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외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네오에게 할 일이 남아 있는 직전 버전의 나이오비는 네오에게 안전한 거리에서 호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직전 버전의 네오인 모피어스를 만나고 있고 매트릭스 4버전의 네오인 사령관에게 환승을 해서 연애*를 하고 있는 와중이라서 사랑까지는 발전하지 못했지만 이들에게는 없는 외모를 갖고 있는 네오에게 호감은 충분히 느끼고 있고 그래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오비는 예언은 믿지 않지만 네오는 믿는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5대 네오가 모피어스고, 4대 네오가 사령관이라고 확신한다면 나이오비가 환승 연애를 했다는 것은 네오 라인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나이오비는 6대 네오 미스터 엔더슨에게 환승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허나 6대 네오에게는 절대 사랑인 트리니티가 존재했기에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할 정도의 감정인 호감에서 멈췄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호감은 트리니트의 결계로 사랑이 아닌 조력자 믿음으로 변환이 되었다.

 

 

 

잘생긴 외모가 목적을 분명히 하고 대의를 믿으며 올바름을 따르고 그것이 죽음과 결부가 되더라도 세상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그래서 그 능력이 되는 자가 자진임을 스스로 알아서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긴다면 남녀 불문하고 이 사람에게 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반함이 사랑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믿음으로 변환이 된다.

외모는 절대 사랑으로 치닫는 사소한 시작이지만 결정적 무기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스크린 샷] 네오가 스스로의 믿음으로 기계 세계로 가야 한다고 했을 때 다른 함장은 어림 없는 소리라 어름장을 놓지만 나이오비는 자신의 배를 내어준다. 오라클이 해야 할 일을 하라고 했지만 이건 자신의 의지라고 했다. 이건 나이오비가 이전 버전의 트리니티이기에 아직은 네오에게 영향력이 있다는 증거라고 본다.

 

 

정리하자면 모피어스가 네오가 되어 시온을 구하지 못한 이유는,

1. 외모가 부족해서

2. 그로 인해 나이오비가 호감을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함께 소망을 이뤄가는 사람으로서만 사랑을 느꼈기에 절대 사랑까지 가지 못해서

3. 모피어스는 예언까지만 믿는 사람이기에 그 이상의 상태가 되면 멘붕이 와서 더 이상의 생각을 하지 못해서이다.

 

 

이 글을 읽고 외모까지 따지는 건 너무 심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허나 세상을 구하는데 그리고 죽음도 불사하는 사랑의 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외모 얘기가 빠진다는 것도 정상적이진 않다. 더군다나 이 영화는 프로그램이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이기에 외모라는 요소는 절대적이다.

 

 


 

 

▶ 그럼 트리니티의 경우는 어떤가?

 

 

 

키메이커를 찾기 위해서 멜로빈지언을 찾아간 트리니티 3인방은 멜로빈지언에게 외모 칭찬부터 듣는다. 일단 예쁘다는 것을 깔고 간다. 이건 중요하다. 왜냐면 대다수 사람들은 같은 자리에 있는 펠로포네스를 예쁘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사적 이미지를 고려한다면 펠로포네스를 트리니티로 만들기는 어색하다. 그래서 트리니티는 강한 이미기가 강조된다. 그래서 관객들에게 트리니티는 예쁘다, 라는 이미지를 만들어줘야 했다.

 

 

왜 그랬을까? 

그건 트리니티도 예뻐야 한다는 전제를 깔기 위해서다. 미스터 엔더슨은 딱히 주변의 비교 대상이 없어도 잘생긴 외모에 대한 이의는 없다. 그런데 주변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좀 그렇다. 그러니 굳이 말로 표현을 하지 않아도 된다. 허나 트리니티는 다르다. 여자지만 전사여야 하는 아름다움을 강조하다 보니 외적으로는 현대 대중의 이미지에는 맞지 않는 예쁨이기에 언어로 예쁘다는 것을 깔아줘야 했다.

 

 

그래야 네오도 트리니티를 목숨 걸고 지켜야 하고 어떻게 보면 시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는 설득력을 얻기 때문이다. 이건 무조건 예뻐야 가능하다. 그렇다고 전사가 펠로포네스처럼 생기고 가슴이 강조된다면 되려 더 부정적이게 된다. 그리고 나이오비처럼 왜소한 체격도 좀 그렇다. 

 

다시 말해서 워쇼스키 자매는 사랑에 상황과 행동에 맞는 외모가 중요하다는 이미지를 관객에서 심어준 것이다.

 

 

[스크린 샷] 여차하면 트리니티가 펠로소포네에 밀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한 해서 네오와의 첫만남때 힘을 준 외모다. 싸움을 하지 않는 트리니티의 예쁨을 강조한듯 하다.

 


 

▶ 매트릭스 현실 대입하기

 

 

현재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50%다. 이 블로그에서 계속 말하지만 여기에 5년 안에 사실혼들이 이혼하는 경우는 10% 정도로 추정하고 있고, 각방, 별거 생활도 10%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이거만 따져도 70%가 사실상 이혼 후 남보다 더 먼 남이 된다. 여기에 돈 때문에 억지로 사는 경우와 자식 때문에 그리고 이혼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 따지면 10% 정도만이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자연사까지 포함시키면 확률이 더 낮아진다.)

 

 

돌싱 프로그램이 나왔다는 것이 이혼율에 대한 큰 반증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가장 큰 목표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면서 웃으면서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목표이자 최종 목표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매트릭스에서 보여주는 내용은 외모도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외모가 떨어지면 절대 사랑으로 치닫지 못하기에 결혼생활이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환승 가능하다고 말한다. 시작은 외모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허나 외모가 못나도 결혼은 한다. 사회적 시간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30살 이상이 되면 당연히 결혼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시간 제약으로 인해서 외모를 포기하면 모피어스 같은 정신적 성숙도 뛰어난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을 하면 된다. 하지만 결혼생활의 지속력은 다소 떨어진다. 여자는 외모가 뛰어난데 남자가 배불뚝이 아저씨면 위험하다.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이럴 때 결혼이 지속력을 가지려면 한쪽이 경제적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야 하거나, 한쪽의 경제력 월등히 뛰어나 의존도가 높아야 한다.* 그래야 돈 보고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불만은 쌓인다. 원하는 만큼 돈을 벌지 못하거나 벌어도 쓰지 않는 사람이라면 억지로 돈을 얻어내야 하기에 웃음은 찾을 수 없고 불만은 쌓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쪽의 경제력이 300 정도인데 한쪽이 벌지 않는다거나, 한쪽의 경제력이 월 2천만 원 정도이거나.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 이혼을 생각하게 되고 많은 경우가 이혼을 결심한다. 이혼을 하면 외적으로 우월성을 가진 사람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 인생은 계속되고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인생과 함께 하기에 내가 굳이 찾지 않아도 주변에서 나를 찾게 되어 있다. 여자면 더 유리하다.

 

 

그래서 결국 외모가(만)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외모와 함께 정신적 성숙도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다.

 

 

 

둘 다 없으면 사회적 관습으로 인해서 나도 결혼한다는 식으로 자의에 의해서 한다는 착각으로 인한 타의에 의해서 결혼을 하게 되고 이건 억지 결혼생활이 되거나 이혼은 더 빨리 진행이 되게 된다. 한쪽이 아무리 경제력이 부족하더라도 둘 다 없으면 어쩔 수 없다. 심지어 요즘 같은 세상은 결혼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물론 외모와 경제력만으로 결혼생활이 유지될 수 있다. 허나 뛰어난 외모와 경제력을 가진 한쪽은 다른 사람을 만나기 아주 유리한 조건이다. 그걸 참고 살아도 좋다. 허나 이건 행복한 결혼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불만은 쌓이지만 결혼은 유지해야 먹고 사니 억지로 같이 산다. 이건 이혼보다 더 못한 삶일수도 있다. 그로 인해 배우자의 돈으로 사치를 일삼으며 스트레스를 풀수도 있다. 그러면 상대방은 그래서 더 자신의 외도를 합리화 할것이다. 악순환이다.

 

 

 

그래서 영화 매트릭스는 둘 다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균형이 무너지면 모피어스와 나이오비 커플처럼 된다.

나이오비는 육체는 사령관에게 정신은 모피어스에게 있다. 그리고 사건이 다 끝나니 마지막에는 모피어스에게 붙는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보다는 이상을 믿고 행한 사람이 더 매력적으로 와닿는다는 것은 안정이 되었을 경우 선택의 결정적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의미를 파악해서 하나씩 이뤄가는 사람이 안전하다고 안주하는 사람보다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시온의 상황이 어지러우니 나이오비의 이런 행동은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이건 우리 세상에서는 이상하게 본다. 허나 알게 모르게 이런 사람들은 흔하게 존재한다.

 

 

그러니 균형이 맞는 네오와 트리니티와 같은 존재가 되라고 말한다.

트리니티 커플이 너무 큰 존재처럼 느껴진다면 링크 커플도 좋다. 이상을 믿는 남편을 위해서 자신은 믿지 않아도 그를 따르며 자신도 목숨을 걸고 남편을 지키는 존재가 되는 와이프는 트리니티 커플의 축소 버전이라고 해도 좋다.

 

 

[스크린 샷] 나이오비는 네오가 예언을 완성한 후 평화가 찾아와서 모피어스에게 적극적으로 안긴다. 결국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는 삶보다는 더 나은 세상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이뤄가는 사람에게 더 끌리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걸 말하자면 결국 매트릭스는 '믿음'에 대한 내용이다.

지금까지 나온 길만을 찾으며 성공을 쫒으려 하지 말고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에 맞는 방식을 자신이 직접 만들며 그것을 행함에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라, 라는 내용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지속적으로 웃으면서 생을 마감하기 위해라고 했다. 그러면 남들이 하는 대로 살지 말고 스스로의 행복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함에 지속적 대화와 토론으로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상대방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해서 나의 행복에 대한 정의를 수정하며 상대방의 동의도 함께 이뤄내며 변화하는 세상에 함께 적응하는 적극적 자세로 함께 한다는 전제하에 결혼이라는 약속을 하며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노력이 하나씩 이뤄짐에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삶이 지속이 되어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라는 뜻이다.

 

 

트리니티는 모피어스와 함께 미스터 엔더슨을 설득했고 미스터 엔더슨은 그것을 받아들였으며 그로써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끝이 비극이라서 좀 그렇지만 그들은 함께 할 때만큼은 절대적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링크는 처남들의 뜻을 받들어 이상을 믿는 모피어스와 함께 했다. 와이프는 미친 모피어스 말은 듣지 말고 그냥 조용히 살자고 했으나 결국 링크의 말을 듣고 자신도 시온을 위해서 싸우는 쪽을 선택하고 심지어 남편도 구한다.

이들은 인간이 해방되었을 때 아마 가만히 있었던 쪽보다 더 행복하게 살 것이다. 전투의 현장에서 따로지만 함께 했다는 것은 평생 추억거리자 대대손손의 이야깃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주변의 존중도 받으면서 살 것이다. 현재의 미군들이 시민들의 존중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이 말은 나의 행복의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다는 뜻이다.

 

 

 

[스크린 샷] 트리니티도 보이는것만 믿는 존재다. 하지만 네오를 절대 사랑함으로써 네오를 따른다. 링크의 와이프도 보이는것만 믿는다. 하지만 남편과 자신의 오빠들이 믿는 것에 대한 것을 존중하며 남편을 보내준다.(트리니티처럼 함께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시온이 위험에 빠졌을 때 남편을 구하기 위해서 숨기보다는 싸움을 선택했고, 링크가 도착한다는 무전을 들었을 때 열리지 않는 문을 열려고 무기를 들고 맞이하러 간다. 네오처럼 큰 사람은 별로 없다. 허나 이정도는 다들 할 수 있을거라고 본다. 이게 보통의 삶이라고 네오커플의 현실판을 보여주는듯 하다.

 

 

▶ 안정

 

 

삶이 안정이 됐다는 것은 지루하다는 뜻이다. 지루함은 일탈을 꿈꾼다. 그 일탈을 행함으로 인해서 안정에 균열이 생겨서 나이오비는 모피어스를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매트릭스를 들락거리면서 만남을 이어간다. 이건 현실에서 불륜이라고 부른다.

돈이 많아서 둘이 항상 재밌는 삶을 살 수 있다면 누가 뭐라고 나무라겠는가? 허나 한계는 있다. 치안이 불안전한 곳을 빼고 여행을 하다 보면 10년 안에는 그 재미는 끝난다. 다시 하기를 해도 20년 안에 끝난다.

 

물론 재밌는 시간을 곱씹으며 늙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가능성도 있다. 과연 몇% 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돈으로 무장한 삶을 말이다. 

우린 대다수가 이런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러니 삶에 있어서 절대 변하지 않는 궁극적 목표를 정하고 그에 맞는 가치관을 심어서 행동으로 옮기고 자신의 나이에 맞는 외모를 가꾸며 나에 가치관에 맞는 대상이나 나의 가치관을 배우려는 사람을 만나 함께 변화하는 세상에 함께 진화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절대적 요소는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과 함께, 친한 사람들과 함께, 아는 사람들과 함께, 알지만 조금 먼 사람들과 함께,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나와 잘 지내는 법부터 알아야 한다.

 

 

미스터 엔더슨이 자신이 네오임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불평 없이 적들과 싸우며 묵묵히 전진하며 마지막은 트리니티를 잃어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목숨마저 내걸고 싸운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그 힘이 어떤 힘인지, 어디서 나온 힘인지 알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 이 세상이 특히 한국 사람들이 서로를 분리해서 보는 건 아마 자기 자신과 친해지는 법을 모르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일 것이다.

반려동물들의 확대는 절대 지금의 상황에 치유법이 될 수 없다. 사람이 사람과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동물로 치유하려고 한다고 해서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알 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되려 동물들에게 치유를 받으니 사람들과 사는 법을 더 배우려 들지 않는다.

되려 사람들은 반려동물과 잘 살기 위해서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하고 스스로를 집사라고 부르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끝까지 주인을 따르는 동물들을 보면 감동스럽지만 결국 사람은 사람 속에서 일상의 관계를 회복해야 삶의 모든 시간 속에 행복을 녹여낼 수 있다.

 

 

매트릭스의 궁극적인 내용은 믿음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 적이 없어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가 살아갈 수 있고 의미가 있다. 그러니 그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우린 다시 함께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난의 대한민국이 함께 하는 방법을 알았듯이 부자인 대한민국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었던 방법을 만들어내서 분열되는 이 세계에서 한 번도 하지 못했던 강소국이 되어 세상의 리더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고 여기까지가 내가 국가에 바라는 소망이자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