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망해가는 이유 # 09ㅣ고향의 부재
고향이 없으니 인간성마저 소멸된다.
얼마 전 '늦기 전에 어학연수 샬라샬라'라는 프로램을 접하게 되었다. 다섯 중년 남자배우들이 캐임브릿지에 가서 영어를 배우는 프로그램이었다. 정규방송 시간을 애써 찾아 노력해서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유튜브에서 검색을 하며 보고 있다.
그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부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어를 배우는 것도 좋았지만 5명의 친구들이 성장을 콘텐츠로 2주 살이를 한다는 것이 부러웠다. 내가 바라는 여행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 대화가 가능한 친구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만큼 행복한 것도 없다. 사실 그것이 부부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기도 어렵고 사회 분위기가 대학 나오면 성장도 끝이라는 것을 극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부부사이에서는 이런 여행이 불가능한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아무튼 샬라샬라는 내가 바라는 인생의 단편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기에 관심이 간다. 더불어 그곳이 캐임브릿지라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헛소리지만 마치 내 고향을 보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의 안정이 되기도 했다. 사실 내 고향은 부산이다.
ㅣ고향의 3요소
고향의 3요소는 '성장'과 '사람', 경험의 시간이 스며든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의 어머니는 고향인 남해에 내려와 살고 있다. 내가 봐도 부산보다 안정감을 느끼면서 살고 있다. 남해에는 어머니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변화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그냥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성장이었던 즐거움이라는 과거가 스며든 공간이 있다. 그리고 남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생리와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인프라를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부산에서 딱히 성장이라고 할만한 무언가는 없었던 어머니에게는 남해는 여전히 고향일 수 있다.
고향은 단순히 태어난 곳을 뜻하는 단어는 아니다. 고향은 안정과 인정을 향한 정서다.
만약 나도 성장이 없었다면 어머니처럼 부산을 당연히 고향으로 생각하고 살았을 거다. 그래서 학창 시절의 인간들과 친구랍시고 잘 지내려고 했을 거고 그래서 그들과 서면에서 만나서 옛날 얘기도 하고 남포동에서 족발을 먹으면서 또 옛날 얘기를 할 거고 해운대에서도 만나 또 옛날 얘기를 하면서 지냈을 거다. 그리고 부산이 고향이라는 생각은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박혀 있는 관념이 되어서 런던으로 갈 생각은커녕 부산을 벗어날 생각도 못했을 거다. 아직 그 동네에 살고 있는 혁상이처럼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직장은 부산에서 잡았을 거고 무조건 물리적으로 출근을 하는 공간이 있는 곳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은 생각하지 않아도 당연히 여기는 삶이었을 거다. 그래도 고향 친구들과 퇴근 후에 만날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느끼는 삶의 연속이고 그게 행복이라고 스스로 자위하며 살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결혼도 했을 거다. 하지만 정서를 교류할 수 있는 고향친구들과의 만남이 더 행복하게 느껴졌을 거다. 애가 생겨 어쩔 수 없이 잡혀 살아가야 할 수 있는 삶이지만 다른 친구들도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살았을 거다.
고향은 이런 불만족스러운 삶 속에 가끔씩 안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정서가 통하는 사람들이 친구라는 이름으로 연결이 되었을 때나 가능한 삶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들과 같지 않은 생각을 하고 살고 있고 세상을 보는 눈은 더 넓어졌고 깊어졌다. 그래서 그들과 대화가 되지 않는다.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정서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서 이제 부산은 태어난 곳일지언정 고향은 아니다.
나에게 있어 부산은 그냥 태어나서 키가 177cm로 크고 몸무게가 85kg라 되고 나이가 48살이 되도록 살아온 도시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삶의 노하우는 부산이기에 알게 된 것들이 아니다. 만약 내가 태어난 곳이 부산이 아니라 대구였다면 대구에서 이렇게 자랐을 것이다. 나는 부산이라는 도시의 정서에 시나브로 받은 영향이 있을지언정 의식적으로 받은 영향은 없다시피 하다.
인프라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한국이 고향인 건 분명하다. 그리고 한국 중에서 부산인 이유는 부산에서 태어났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뿐 다른 조건은 충족하지 않는다. 이렇게 따지면 내 고향은 한국이라고 보는 것이 제일 정확하다. 지역 특색이 옅어진 현시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더 정확하다.
나는 런던에서 6개월을 살면서 한국을 그리워한 적이 없었다. 되려 어서 빨리 한국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그래서 지금도 영어 공부를 하고 현실적으로 이민이 가능한 태국의 은퇴 비자에 관심을 두고 있다. (태국은 50세 이상이면 은퇴비자 신청이 가능하다.) 마음은 영국으로 가고 싶지만 말이다.
ㅣ안정과 인정
과거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들 대다수가 실패나 은퇴를 하고 돌아오는 경우였다. 고향은 그런 사람들을 받아주는 곳이었다. 다시 돌아오면 그냥 살던 친구들이 반겼고 부모님이 살던 집이 있었고 엄마가 해주는 밥이 있었다. 어릴 때 놀던 곳이 있었고 같이 놀던 친구들과 옛날 얘기로 교감도 할 수 있었다.
고향은 나의 도전이 실패를 해도 돌아갈 수 있는 푹신한 매트리스였다. 실패해서 한 층 떨어져도 감정이 크게 다치지 않게 하고 다시 회복될 수 있게 쉼을 주는 곳이 고향이었다.
그 와중에 가끔 성공한 사람들도 왔다. 고향은 나의 성공을 가장 잘 인정해 주는 곳이었다. 성공은 나뿐만이 아니라 부모님도 잘 보이게 했기에 더 뿌듯하게 만들었다. 그 성공의 감정을 몇 배로 증가시켜 줄 친구들의 축하도 있었다. 이런 효과로 아나운서들이 프리로 나갈 때 성공해서 꼭 자기 출신 방송국(고향)을 찾아가서 자신의 입지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 적도 있었다.
이것이 고향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연결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향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성장, 사람, 장소가 서로 교감해서 낳은 정서다. 그 정서가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도전을 하게 만들었고, 그 정서가 실패를 해도 덜 다치게 했으며, 그 정서가 다시 그들을 받아들였다. 정서는 푹신한 침대와 같다. 그리고 그들 중에 일부는 성공을 거두어 고향에 이바지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기에 그 지역이 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 이런 고향은 없다. 고향은 단순히 사람이 태어난 장소에 불과한 곳이 되었다. 정서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도전을 함에 실패를 하면 받아줄 푹신한 정서가 없기에 한번 실패하면 크게 다친다. 회복도 어렵다. 받아주기는커녕 돈 없으면 돌아가지도 못한다. 그대로 정서적 사망에 이르게 된다. 대한민국 전체가 지금 이런 현상을 겪고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학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고 그 비싼 학교를 두 번은 가기 싫기에 한 번에 해결하길 바라며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학교밖 성장은 거부했다. 그래서 밑에서 누가 올라오면 미리 싹을 짓밟아버리고 자기 자리만은 절대 뺏기지 않으려고 사나워지고, 사나워지니 인성이 변하고, 그 변한 인성으로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지 못하게 되고, 그 자식은 더 어릴 때부터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되어 고향이라는 정서는커녕 태어난 장소마저 신분으로 사용하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지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이제 돈만이 우리를 감싸줄 수 있고, 돈만이 우리를 회복시켜 줄 수 있으며, 돈만이 우리를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만들어버렸다. 돈이 친구이자 고향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고향의 정서를 돈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지금 사회는 돈 있는 사람만 도전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은 쓸데없는 도전을 돈만 잃게 되니 도전을 하지 않으며, 돈이 있으니 도전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사회는 발전이 없는 역설을 낳게 된다. 도전에 사용될 돈은 확실한 투자처에 가게 되고 그것도 더 돈 있는 사람만 성공할 수 있으며, 그중에서도 더 돈 있는 사람만이 성공의 위치를 지속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그 외 일부 공부로 성공하는 경우가 5% 이하, 예뻐서 성공하는 경우 한 5% 이하 정도가 있다. 하지만 부자가 공부 잘하고 예쁜 것도 다 차지하는 세상이기에 일부의 경우가 의미가 있을는지 모를 세상이다.
ㅣ제2의 고향 스타벅스
해외에 여행을 가서 지칠 때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저 멀리 보이는 녹색 간판을 보며 반가워한다.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소파에 걸치듯 앉아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이제 스타벅스는 한국인의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이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유튜브에서도 가끔 듣는 소리다. 그러니 해외여행에 지쳐 본 한국 사람이라면 공감이 충분히 갈 거다.
우리는 스타벅스에 마음의 고향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한다. 이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스타벅스는 성장과 즐거움, 사람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타벅스에 일거리를 가지고 매일같이 가던 시기가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전공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태반으로 봤다. 자격증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영어 공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나라에서의 스타벅스는 각자의 미래를 위해서 성장을 하는 곳이 되었다. 거기에다 공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사람들을 만날 때 어쩔 수 없이 스타벅스를 찾게 되어 있다. 그렇게 우리는 스타벅스에 동네 사랑방 혹은 집안의 거실 역할을 하는 정서를 남길 수 있었다.
이런 성장과 정서가 있음에 이용하는 방법도 나라마다 큰 차이가 나지 않아서 타국에서 이용하는데 부담이 없다. 그렇게 한국 사람들에게는 스타벅스가 제2의 고향이 되어버린 거다.
이해가 잘 되지 않으면 맥도널드를 비교해 보면 간단하다. 맥도널드도 세계 어디에나 있지만 그곳을 이용하면서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들 극히 드물 거다. 한 끼 대충 때우는 곳에서는 성장도 정서도 없기 때문이다.
ㅣ성장
나의 어머니 세대는 그냥 태어나서 친구들과 신나게 노는 것만으로도 성장이었다. 세상이 아주 느리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이었기에 방과 후 놀이를 통해 함께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고, 친구가 무엇인지도 배웠으며, 사람 사는 방법을 언어로 구체화시키지는 못해도 감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이러는 와중에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도 한몫거들 었다. 지식이 사람 사는 방법을 아는 것과 합쳐지면 가치가 생기기 때문이다. 학교가 지금처럼 전부가 아닌 부수적인 곳에 불과했었던거다.
하지만 세상은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전쟁의 상처를 수습한 후 세상은 급격한 산업화가 이뤄졌고 그런 흐름에 이들도 도시로 진출했다. 더 나은 삶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부산으로 진출한 어머니는 연애부터 실패를 해서 끔찍한 결혼생활을 했고 그걸 유지하려는 어리석은 선택으로 더 어려운 삶을 자발적으로 살았다. 그로 인해 홧병이 생겨 40대 말에는 고향에서 굿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60이 넘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부산을 제2의 고향으로 만들지 못했다. 도시가 바라는 합당한 성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중2 때 어머니에게 이혼을 하라고 했다. 이러다가 다 죽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의 말보다 당시 시대의 분위기를 따랐다. 초등학교 때는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욕하면 어머니는 나를 더 혼냈다. 돈 한 푼 벌어오지 않는 남편이라도 가장이라는 신분을 끝까지 지켜주려고 한 것이다.
조금만 생각하면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는 금방 답이 나온다. 하지만 어머니는 생각(성장) 하지 않았다. 당시의 사회분위기 즉 사회언어를(사회가 시키는 대로) 따라는 앵무새로 살았던 것이다.
다행히 남해도 성장하지(근본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10대의 옛정서 그대로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고, 싸가지 없던 외숙모도 나이 듦에 철이 약간 들어서 같이 지낼만한 사이가 되었다. 아직도 자기만 아는 습성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겨울이면 시금치를 캐고, 봄이면 바다에 나가 굴을 캐고, 파래를 뜯었다. 봄에 좀 더 깊숙해지면 고사리를 끊으러 가고, 중간중간에 양봉도 하며 여름이면 봄에 심어놓은 고추나 깨를 수확하고 수박과 참외도 따먹으면서 지낼 수 있다.
어머니가 고향을 떠난지 40년 정도가 되어 돌아왔어도 이질감 없이 바로 동화가 될 수 있었던 건 부산에 적응하는 성장이 없어서였다. 심지어 입맛도 변하지 않았다. 이걸 거꾸로 말하자면 고향방식으로 부산에서 살았기에 부산 삶을 실패한 것이다. 공간을 이동해서 살려면 그 공간의 사람들과 정서를 흡수하는 성장이 있어야 했는데 어머니는 그걸 하지 못했다. 아울러 그 공간에 맞는 지식도 또한 배웠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그걸 자식에게 떠넘긴다. 뭐든 자신이 하는 게 제일 좋은데 말이다.
이런 성장이 없다면 사람은 제2의 고향을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 불행히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2의 고향은커녕 자신이 태어난 지역도 정서적으로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ㅣ변화
나의 어머니는 남해에서 농사짓는 삶의 방식으로 부산으로 가서 할 수 있는 것은 농사와 가장 비슷한 형태인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산에 적응에 실패해 남해에서는 적응이라고 할 필요도 없이 잘 살아가고 있다. 부산에 적응하지 않은 삶과, 변화가 없는 남해라는 두 현상이 콜라보를 이뤄서 만들어낸 현상이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너무 급변하고 있다. 특히 도시의 변화는 하루하루가 다르다. 개화기부터해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전쟁을 겪었으며 지독한 가난으로 탈출하여 산업화를 이뤄냈고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AI시대로 진입한 지금이 130년 정도 되는 시간에 이뤄진 세상이다.
반면 세계는 1760년대부터 산업화를 겪으며 지금의 시대에 진입했다. 대충 계산해서 우리나라보다 100년 이상의 시간이 더 있었다. 이건 산업화 기준으로 봤을 때지만 철학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냥 2,500년 차이 나는 거 같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철학이 있었겠지만 그 철학을 보통의 삶으로 흡수시켜 가며 세상의 변화에 맞게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가며 이뤄낸 것이 없으니 한국의 보통 사람들에게 철학이라는 것이 흡수되지 못했다. 그러니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철학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철학의 역사만큼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논리다.
이런 이유로 서양은 세상이 이렇게 급격하게 변화함에 있어서 비교적 혹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서양의 뉴스를 접하니 그들의 인정에 대해 알지 못하고 끔찍한 사건, 사고 소식만 전해 듣는다. 거기에다가 각종 카더라 옛날 말들을 흡수한 우리는 서양이 더 살기 어려운 곳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인종까지 다르니 안 좋은 면들은 더 부각해서 흡수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역시 한국이 최고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겪어본 영국은 한국보다 인정이 더 많다. 거기에게도 거지에게도 음식을 사줄 정도의 사회적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저변확대되어 있다. (돈은 주지 않는다. 마약 할까 봐.) 물론 한국에서는 겪지 않을 인종차별을 겪을 때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겪지 못하는 인정도 경험했다. 그럼 돈이 있다면 어디서 살고 싶은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영국이다. 지금의 한국은 못생기고 돈 없으면 인종차별 수준의 무시를 당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으나 영국의 인정과 예의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그들은 사람의 정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건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떠 있는 철학을 보편철학으로 끌어내려 자신들의 삶에 흡수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다,라는 보편철학은 2,500년 철학의 역사 동안 변하지 않고 더 발전적으로 변했으며 그래서 더 사람이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서 전쟁의 끔찍한 고통을 함께 겪으며 우리는 하나라는 생각으로 서로 돕는 사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은 옆집도 못 믿고 살고 있다. 우리는 그 시절의 경험을 철학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냥 경험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사라진 시대의 사람들은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외모가 예쁜 자와 못생긴 자를 구별하며 차별한다. 이게 인종차별과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사람의 인정은 이제 느끼기 어려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런 세상에 우리에게 고향 특히 돌아갈 고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특히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태어난 사람들을 더 고향이라는 정서를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남해에서도 한진 택배 기사*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며 고향 혹은 시골 정서를 어떻게든 파괴하려고 달려든다. 자기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말이다. 되려 시골이기에 그 순한 정서를 이용해서 대드는 모양새다.
* 아래 링크 참조
ㅣ고향이 없다는 것은
나의 어머니가 고향에 내려왔는데 같은 시대를 보냈던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해 보자. 거기에다가 나의 외숙모는 여전히 철부지로 살아서 자기밖에 모르고 친한척하며 나의 어머니를 속여서 자기 이득만 취하려고 한다. 거기에 시골의 풍경은 완전히 황폐해져 버렸고 구조도 다 바뀌었다고 생각하면 그곳을 고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고향이 이런 곳이라도 살 곳이 없으니 악착같이 여기에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사람이 어떻게 될까? 쉽게 예상될 거다. 사람은 항상 경계해야 할 대상이고 그래도 친인척이랍시고 믿고 지낼 사람이 숙모밖에 없으니 알고도 적당히 속으며 억울해도 참고 살아가야 하며 어쩌다 큰돈 잃으면 비참함도 느낄 테고 그러면 더 사람이 예민해져 사나워지고 그러면 인성이 변하고 그렇게 혼자 세상을 떠나는 거다.
평생 불안만 느끼면서 말이다.
그것이 현대 도시인을 넘어 전 대한민국의 삶이 되어버렸고 이건 정서적으로는 확실히 고향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정서 즉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신뢰와 배려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며 적당히 넘어가고 미안함도 느끼고 고마움도 느끼는 그런 정서의 고향은 이제 대한민국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 사람들은 자신의 국토에서 이민자와 다름없는 예민함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진짜 이민자들은 자기들끼리 뭉치기라도 하지 우리는 한민족이기에 그렇지도 못하다. 심지어 외국에서도 우리는 뭉치지 않는다. 그래서 외국에서 더 무시를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 인도, 중국, 파키스탄, 중동 사람들은 다들 뭉쳐서 다닌다. 현지인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명품이 신분을 나타낸다. 세계에서 명품의 주소비 계층은 이민자들이다. 이민자들은 자신이 명품을 구입함으로써 현지 판매원에게 적당히 거드름을 피울 수 있는 효과가 있고 그 명품으로 자신들은 현지인들에게 물리적으로 나는 안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필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하지만 이들을 거뜬히 능가하는 민족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이다. 명품을 구입하며 잘난척하고, 그 구입한 명품을 자랑하지만 그렇다고 명품으로 나는 물리적으로 안전한 사람이라는 어필은 하지 못한다. 한민족이기에 누구에게 어필을 해야 한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설사 어필할 대상이 있다고 한들 대학생도 다 들고 다니는 명품으로는 택도 없다. 그러니 더 비싼 명품이 필요하고 그래서 일부러 더 비싸게 파는 차와 가방을 더 선호하는 아이러니도 발생한다. 그렇게 비싸게 산 물건을 자랑하는 대상은 거의 지인들이다. 그 친구보다 내가 더 돋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옆에 친하게 지내야 할 사람에게 과시를 하며 적대감을 드러내는데 더 열중한다.
이것은 진짜 이민자들보다 더 각박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 안에서는 이민자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니 사람은 사람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철학의 부재로 인해서 김수현 같은 인간이 등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인간의 정서가 없는 삶 속에서 살았으니 돈과 외모와 명품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법은 언론을 이용해서 피해 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전) 여자친구를 모함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해서도 자신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나타날 법도 한 세상인 거다.
다시 말해 김수현은 우리나라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정서에서 특정부위에 나타날 법한 종양인 것이다. 허나 지금 대한민국이 이렇다고 해서 나는 철학이 치료제로 사회에 퍼트려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가는 거다. 종양을 발견했으니 제거하고 또다시 원래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 다들 자신은 김수현 같지 않다고 생각하겠지만 외모로 인기 끌어서 몇 백억 원을 벌어 여자 마음대로 만나고 싶은데 방해가 되는 인물이 나타나면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은 생각은 절로 들 거다.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모르니 굳이 배워야 할 피곤함을 감내하고 싶지 않을 거며 굳이 알지 않아도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니 철학을 헛소리 개똥철학이라고 비하며 가끔 '좋은 말씀 감사하지만'이라는 품위도 떨어보는 말투로 시작하며 거부할 게 뻔하다.
남해 한진 택배 기사가 전화로는 마치 덤벼보라는 식으로 나에게 대들다가 나를 직접 보고 뒷걸음치며 달아나는 모습을 보인건 택배 기사 수준에서 김수현과 같은 행위를 한 것이다. 이런 인간이 몇 백억 원이 생기면 사람이 개과천선해서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반면 김수현처럼 할 거라는 건 쉽게 예상이 가능하다.
이렇듯 지금의 대한민국은 성장은 학교 졸업장으로 퉁치고, 인간관계는 내가 돈 많고, 예쁘면 붙은 거고 그중에서 쓸만한 사람 데리고 놀다가 아니면 그만인 걸로 하기로 하고 장소는 부자동네라는 신분을 나타내면 좋은 것일 뿐이다. 이런 환경에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을 동경하며 증오하고,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껄끄러워하고 피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대한민국이다.
이렇게 정서적으로는 옆집도 친구도 가족도 믿지 못할 못할 정도의 심한 불안을 느끼며 서로를 경계하는 자세로 살아간다는 것은, 앞으로의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는 최고의 국가가 될 거라고 100번 양보해서 가정을 하더라도 우리 같은 일반시민들에게는 망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국민 개개인이 분열된 사회가 경제 대국이 될 리도 없다.
나의 어머니는 확실히 부산에서의 불안이 사라지니 독한 기운도 빠져서 사람이 좀 온화해졌다. 이것이 고향의 힘이다. 나를 받아주고 인정해주고 보듬어 주는 고향이 없다는 것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예민하게 만들어, 사람이 독해지고 없던 폭력성도 생존본능에 따라 드러나게 되어있다.
고향이 행방불명이 된 대한민국 사람들은 지금 그러하게 보인다.

(side talk)
* '샬라샬라'는 더 이상 보지 않는다. 성동일이 '아버지가 처음이라서' 그렇다고 하는 대사를 보고 정이 떨어져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대사다. 40대가 처음이서, 아버지가 처음이어서 뭐든 처음이라고 하고 감동적인 음악만 섞으면 용서되는 드라마 대사는 사라져야 할 근본적 악이다. 누구는 두 번, 세 번 기회가 있는것도 아닌데 마치 자기만 처음이라서 그렇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도 질색이고 20대 때 40대를 생각하면서 충분히 준비할 수 있고 결혼 전에 아버지에 대한 책임을 얼마든지 연습할 수 있다. 모든 핑계를 아름답게 꾸미는 드라마가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다.
* 런던보다 케임브리지를 더 고향처럼 느끼는 것은 내가 말을 하고 싶은 대화 내용을 동네 주민과 나누어 친분을 쌓고 신뢰를 형성하며 교류가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곳이 케임브리지라고 생각되기에 그런 거 같다. 런던에서 6개월을 살았지만 입이 막혀있었기에 동네 주민들과 교류를 하지 못한 탓도 크다. 역시 고향은 사람과의 정서가 필수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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