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 8ㅣ역진화 된 인류사회에서 독서로 삶이 바뀌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종은 호모 사피엔스가 유일하다. 그래서 인간과 보노보 사이에는 간극이 크다. 보노보 사회에서는 매춘이 존재하며 성교도 인간처럼 얼굴을 보고 한다. 침팬지 종의 하나인 보노보가 이런 사회를 형성했으니 만약 다른 인간종이 아직 살아 있다면 보노모와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 연결이 자연스러운 사회를 이루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은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나머지 인간종은 없다. 학자들은 아마 더 똑똑한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말살을 시켰을 거라고 보고 있다. 원시 사회에서 에너지 문제는 생사의 문제였을 것이고 살기 위해서 서로 죽고 죽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 호모 사피엔스가 이긴 거고 그래서 현재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 인간은 어떻게 뇌가 발달이 되었나?'
인간이 출연한 곳은 동아프리카 지역이었다. 그곳은 아직도 지형의 변화가 지속되고 있다. 700만 년 전 숲이었던 그곳은 초원으로 바뀌었고 나무가 사라진 초원에서 살아남기 위해 먹이 사슬 최하위의 인간은 머리를 써야 했다. 그리고 각종 변화 속에서 적응하며 살았다. 약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생존한 인간은 뇌가 다른 인간종보다 발달이 된 것이다. 그리고 뇌가 가장 발달한 인류는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인간의 역사 700만 년에서 동아프리카에서 벗어난 시기는 7만 년 전쯤이다. 3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그렇게 위기와 변화를 겪으며 뇌를 발전시킨 호모 사피엔스는 대륙으로 나와서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았기에 뇌를 덜 사용한 다른 인간종(호미닌)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심지어 가장 강력한 네안데르탈인도 말살시켰다.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기는 하지만 그건 소수였을 뿐이었다.
결국 인간의 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스스로 약하다는 인지에서 비롯된 각종 변화에 적응하려는 의지다.
그리고 변화에 적응하려면 약한 인간으로서는 공동체 생활은 필수다. 그렇기에 인간이 인간과 서로 연결되려고 하는 태도는 지능이다. 물론 그 안에서도 분명 배신과 거짓말을 하는 악인이 있다. 그걸 가려내는 과정도 뇌를 사용해야 한다. 에너지가 축척됨에 따라 권력이 생기고 그렇기에 거짓은 필수로 생겨난다. 다른 종이 없으니 우리끼리 싸우는 꼴이 된 것이다.
아무튼 다른 동물은 근육과 소화능력과 피부와 날 수 있는 기능을 강화시켰지만 먹이사슬 최하위의 존재인 인간은 이런 과정으로 뇌를 발달시켰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마치 이 지구를 지배한 듯하다.
어느 날 인간은 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불은 밤에도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해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였다. 소통의 시작이었다. 하루의 일과 중 사냥이나 지형 탐색, 동물들의 습성을 파악한 것이 있었다면 공유했을 것이다. 그렇게 말이 통하는 인간들끼리 더 뭉치는 일도 생겼을 것이다. 그들로 인해서 삶도 더 풍족해졌을 것이다. 거기에 대한 답례로 고인돌이라는 문화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렇게 긴 세월을 보내다가 밤하늘의 별을 보며 규칙성도 발견했을 것이다. 예측이 가능한 대충 뭔가 있다는 것도 느꼈을 거다. 이런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끼리는 더 강한 유대감도 생겨났을 거다. 그렇게 인류는 합동생활로 뗀석기에서 AI 시대까지 올 수 있었다.
아마 당시의 그런 합동생활을 불편해하고 강한 자아를 드러내며 무리와 떨어져 산 사람들은 그냥 맹수에게 잡혀 먹혔을 거다. 사냥을 하다 우연히 그 사람의 뼈를 발견하고 소문이 퍼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더 무리 지어 살아가야 한다고 호모 사피엔스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불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 당연한 규칙이 되었다. 시스템 적응의 시작이다.
무리에서 사냥팀이 잡아온 먹이를 배급받기 위해서는 뭐라 하고 해야 했을 거다. 공평성, 책임감이 생겨났다. 그나마 내 가족이 사냥팀이면 그나마 배급받기 수월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기왕이면 맛있는 부위를 배급받거나 말이다. 불로 고기를 구워서 먹으니 소화에 도움이 되어 신체 에너지를 좀 더 지적 능력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꿈을 꾸는 인간도 생겨났을 거다. 미래를 그리는 능력까지 생겨난 것이다. 화성으로 가려는 인류와 이어지는 지성이다. 이 능력에 공감하고 동의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도 생겨나 인류는 미래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겼다고 볼 수 있다. 문과의 탄생이다.
예술도 했다. 그들의 사냥이나 삶의 방식을 벽화에 그려놓았다. 신체 에너지의 비축으로 인해서 인류는 지금의 인류의 시초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함께하는 삶, 불의 관리, 소통되는 그들만의 언어로 가능했던 것이다.
이 모든 시작은 약하기에 함께 하는 삶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불도 관리할 수 있었고 그래서 더 강한 유대감으로 뭉칠 수 있었으며 소통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어떻게든 떨어져 살려고 한다. 원래 강자들은 사람들과 그리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임을 완전히 떠나 홀로 지냈다는 것은 아니다. 계급에 맞는 인간관계만 유지했다.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돈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인 모임이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스마트폰 시대를 맞이하여 서로를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10년 일해도 아파트 한 채 얻지 못하는 인생에 더 많은 돈을 노릴만한 욕심을 부릴 건더기도 없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권력이라고 해봤자 친구들 사이에 좀 잘난척하는 것이 전부니 그런 모임 안 나가면 그만이다. 대신 스마트폰으로 놀면 된다. 약한 유대 관계도 필요 없다. 스마트폰으로 택배, 은행, 카페 주문 등 뭐든 다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전기의 발명으로 밤하늘의 별은 지상으로 내려와 우리는 그 빛 속에서 살고 있기에 낭만이 깃든 관찰 능력은 사라졌다. 정확히는 특별한 사람들의 특권이 됐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그래서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현재만 산다. 그리고 현재 우리를 돈과 외모와 의대만을 신봉하게 만들었다. 이건 21세기 대한민국의 종교라고 볼 수 있다.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을 더 좋아하듯 돈이 많고 예쁘고 의대면 우리는 더 좋아하고 믿음을 가지고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 시대의 불은 더 이상 특별한 도구가 아니다. 가족을 이룬 집으로 옮겨진 불은 이제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옮겨져 모두 각자 뿔뿔이 살아간다. 돈을 벌어야 삶을 지속시킨다는 책임감도 없다. 그래서 직장도 쉽게 포기하고 사회 탓으로 돌린다. 이럴 수 있는 이유는 결혼을 포기하고 여차하면 부모님 유산으로 살 생각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부가 축척이 되었기 때문이다. 별을 보며 꿈을 꾸던 세상은 독서로 대체되었지만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공감대 형성의 재료가 돈과 동안과 공부밖에 없는데 만나서 무얼 할까? 밥만 먹고 헤어질 수는 없지 않은가.
원시시대의 불은 고기를 구워 먹는 수단이기도 했으니 현시대의 맛집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안전하고 풍족한 이 시대에서는 오징어 게임을 보더라도 생각을 하지 않으니 대화거리가 없어 모일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동아프리카 변화무쌍하고 위험천만하며 부족한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적으로 안전하고 안정적이며 풍족한 삶을 살고 있기에 만날 이유가 없다.
결국 이런 관점으로 인류를 보면 나는 지금 인류가 퇴화(진화)하고 있다고 봐진다. 호모 사피엔스가 말살시켰던 호미닌 같은 종족으로 진화(퇴화)를 거치고 있는 중이다. 비교적 안정적인 지형과 지대에 살며 기후의 큰 변화 없이 삶을 유지하던 호미닌 같은 종족은 뇌를 진화시키지 못했듯이, 지금 인류는 유례없는 평화의 70년 시절을 보내며 인간들 사이에서 폭력 없이 지낼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에어컨과 난방 기술로 인해서 계절의 변화도 유연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고 가정의 단위에서 부의 축적도 이뤄내어 그 자손은 결혼만 하지 않고 살면 크게 경제적으로도 크게 문제 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에 압도적으로 보급된 스마트폰으로 인해서 집단을 이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린 현 인류는 마치 21세기 호미닌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듯하다.
이런 시대에 책을 읽은 사람이 책을 읽지 않는 집단과 대화를 해도 바보취급 당한다. 법과 도덕과 인류애가 없던 원시시대 때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인간종을 말살하면서 삶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법과 도덕, 인류애의 분위기로 중무장한 지금 시대의 호미닌들은 너무나도 안전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흐름은 막을 수 없다. 그러니 앞으로 호미닌이 더 늘어날 것을 생각한다면 독서로 인생을 숙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정의라 믿었던 법과 안전이 자본주의와 콜라보를 해 지금의 인류를 퇴화시켜 버린 것이다.
결국 독서로 인생을 바꾸려면 전 인구가 독서를 하는 사회라는 근거 아래 그중에 제대로 독서를 탁월하게 하는 사람만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책을 읽는 호모 사피엔스가 살기 위해서 법과 도덕을 없애버리고 호모 사이피엔스의 의미를 살려서 그 이하의 인간들을 원시시대처럼 죽여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인 거다. 설사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하는 세상이 온다고 한들 학력 좋은 호미닌들이 학력기준으로 그런일을 자행할 거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제 인류는 그냥 이렇게 흘러가는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 선봉에 한국이 있다. 그래서 서양의 학자들은 현재 한국이 어떻게 망할지 혹은 극복할지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고 한다. 이걸 연구해서 자신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다. 아무튼 이중에서도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야 어떻게든 그들의 삶을 유지시킬 수 있겠지만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위험에 노출되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세상에서 독서가 우리를 구원하듯이 생각하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제 독서는 개인의 앎의 즐거움이 전부라고 생각해도 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러니 독서로 인생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은 교과서를 외우고, 자격증 책을 읽고, 영어를 더 공부하고, 가능하면 두 번째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더 좋다. 이런 사람들이 독서까지 하면 그 계층에서 잘 맞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할 기회가 더 많을 뿐이다. 그렇게 성공이라는 것을 해서 담을 쌓고 살아가면 그나마 안전한 세상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인생을 바꾸거나 유지하는 것은 독서가 아닌 (부모)돈과 외모와 의대라는 것을 얘기해 왔다.
이 부류 이하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대한민국 상황으로 봐서 목숨을 부지하는 노동을 계속하며 그 수입으로 살아가는 것 말고는 인생을 역전할 방법이 없다. 독서로는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 수입이 적거나 많거나의 차이로 삶의 윤택의 차이 날 뿐 자녀 세대로 갈수록 지속적으로 가난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생각을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벗어나 자녀까지 길게 보고 준비한다면 어쩌면 독서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즉 부모가 자녀의 지적 주변인이 되어서 대화가 가능하고 토론이 가능한 존재가 된다면 독서로 인생이 역전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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