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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4ㅣ책보다 생각을 공유할 주변인이 필요하다

_교문 밖 사색가 2025. 1. 25. 17:45

독서 # 4ㅣ책보다 생각을 공유할 주변인이 필요하다

 
 

이제 인간을 싫어하고 혐오하게 된 시대에 과연 책이 돌파구를 마련해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꼭 독서가 아닌 영상으로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굳이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생각의 도구로써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영상으로 다 담을 수 없는 방대한 콘텐츠들이 있으며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영상보다 뇌를 훨씬 잘 사용할 수 있기에 뇌 건강에도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재료로 얻게 되더라도 주변 사람들과 대화로 공유하지 못하면 생각이라는 것이 생겨나지 않는다. 설사 생겨나더라도 금방 사그라드는 불씨에 불과하다. 
 
그리고 책도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만 읽으면 결국 편협한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런 한쪽 생각에만 잠겨버리면 더 이상 뇌를 활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경력직이라도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기 위해서 3개월 정도 힘든 이유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뇌가 열심히 일을 해서 그런 거다. 그리고 적응이 끝나면 뇌는 새로운 직장에 대한 내용을 습관으로 만들어 버려서 특별히 생각하지 않아도 그냥 움직이게 만든다. 이건 내가 주장하는 알츠하이머 예방을 위해서 사는 삶과 대척되는 것이다. 그러니 제일 좋은 건 나와 반대의 성향을 지닌 사람과 대화를 함으로써 세계관을 넓혀나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우리 주변에는 대화할 사람이 없다. 그러다 보니 어처구니없게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자신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그런 거지 함께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아닐 거다. 그러다 보니 인스타그램에서 책을 추천하는 것도 삶의 의미에 대해서 알게 해주는 고전이나 인문학이 아닌 돈을 더 잘 버는 법이나 복잡한 현대의 삶에서 살아남는 법, 같은 것을 추천한다. 심지어 철학분야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났는데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다. 철학마저도 인간의 분리를 주장하는 책이 유행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점점 독서의 필요성 생각을 재료로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고상한 척 독서를 한다고 해도 이걸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괜히 대화의 주제로 꺼냈다가 씹선비 소리나 듣거나 설명충이라고 벌레 취급이나 받게 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만 잘되고 돈이나 벌 수 있다고 말하는 책으로 내만 성공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결국 지금 시대에서 중요한 문제점은 독서의 부재가 아니라 '생각의 부재'이고 '주변인의 부재'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생각의 부재는 인간 표준화의 부재에서 온 것이다. 인간 보편성의 부재 혹은 인간 보편성의 저하가 지금 사회에 암적으로 퍼져있다는 뜻이다.
그 중심에는 남자와 여자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남자라면 이래야 한다, 여자라면 이래야 한다는 그 보편적 인간상이 공격당하면서 파괴되어 거의 모든 인간상이 주저앉았다. 
 
현시점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다. 내가 볼 때는 둘 다 문제다. 진짜 김종필 총재 같은 사람이 없다고 봐진다. 요즘 따라 이회창 총재 같은 사람들이 자꾸 생각이 난다. 정치인의 표준화를 어떻게 둬야 할지 모르겠지만(이걸 명확하게 두는 것도 이상한 거다.) 지금 나는 딱 이 두 사람이 생각난다. 고 노무현 대통령부터 무너진 이 개념은 정치판을 진흙탕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우리 일상에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나이대에 따른 표준 인간상이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5세가 되어 학문에 뜻을 두었고, (지우학)
30세가 되어 학문의 기초를 세웠으며, (이립)
40세가 되어 판단에 혼란이 없었으며, (불혹)
50세가 되어 하늘의 뜻을 알았고, (지천명)
60세가 되어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았고, (이순)
70세가 되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종심소욕불유구)

 
꼭 이 정도 수준을 이루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되려고 노력을 하다가 어느 시점까지만 가도 된다. 여기까지 도달한 사람은 주변인들에게 겸손으로 모범이 되고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면 된다.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겸손을 겸비한 부끄러움으로 사람을 대하고 지속적 배움의 증거로 자기반성을 하면 된다. 
 
물론 이건 2,500년 전의 글이기에 지금 우리가 사용하기는 너무 올드하다. 하지만 그래도 이걸 기준으로 현시대에 맞게 각색하여 어느 정도의 표준은 그 사회에서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자의 말이 올드하다고 해서 공자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않은가. 옛글의 스타일들이 마치 모두 공자, 맹자를 만들려고 하는 글 같기에 부담스러운 건 있지만 현시대는 시대에 맞는 너그러움으로 저런 글을 각색에서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그 대충이라도 개념을 알아차려서 사람들에게 30대가 되어 이게 뭐냐는 말도 할 수 있고, 40대가 돼서 아직도 저런다고 말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모든 걸 자를 대고 칼로 자르듯이 반듯한 무언가를 만들 필요가 없다. 특히 인문학은 그렇다. 대충이지만 확실히 아닌 것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간섭을 하는 태도는 사회에 꼭 필요한 요소다.
 
ㅣ존중
 
지금 우리 사회는 존중이 마치 만능키인 것처럼 무조건 좋은 거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존중은 우리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삶에 자세가 반드시 아닌 것 말고는 전부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이다. 즉 남일에 대해서는 너그러움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존중인 것이다. 가령 노홍철이 길거리에서 눈에 띄는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 그걸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이상한 사람이라는 눈빛으로 쏘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걸 존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동생이 120kg까지 살이 쪘으면 건강을 걱정해서 먹는 것을 말린다던가, 적극적으로 함께 운동을 하자고 자꾸 일으켜 세우는 간섭이 들어가는 것이 맞다. 하지만 역으로 동생을 존중한답시고 먹는 걸 보고만 있고, 누워있는 태도를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방치하게 되는 순간 이 동생의 건강은 아주 나빠지게 될 확률은 아주 높다. 그리고 인생에서 나의 즐거움에 한 부분을 차지하는 동생이 비만으로 아프면 내 인생도 즐거움이 그만큼 사라지는 것이고 나의 근심도 늘어나는 것이다. 이말은 곧 우리가 서로 연결만 되어 있다면 내가 상대방이고 상대방이 곧 나라는 뜻이다. 그러니 간섭은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존중은 존중이지 존중이 매사에 전부 좋다는 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주변인들에게 간섭이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는 노홍철 같은 우리와는 무관한 사람들에게 너무 지나치게 간섭을 했다. 존중해도 되는 무해한 사람인데 말이다. 이게 시대를 타다 보니 이제는 존중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존중이 유행을 하고 고착화되어 간섭을 해야 할 우리 주변인들도 너와 나는 다르다는 이론으로 방치하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간섭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표준 인간상이 있어야 하고 최소한의 영역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표준 인간상이 절실하다. 만약 노홍철이 이 표준 이하의 행동을 했을 경우는 아무리 남이라도 우리는 간섭을 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안전해지는 것이고 안정을 찾아가며 유지할 수 있다.
 
가정의 표준 인간상은 각 가정마다 엄격의 기준이 달라도 상관없다. 아닌 것 빼고 전부 다 맞는 세상만 되면 세상이 안전을 유지하며 다양성도 키워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표준화는 필요하다. 그래야 독서를 하든 영화를 보든 그 재료로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가 생기고 그 주제를 이야기함으로써 다양한 의견들을 듣다 보면 생각이 자라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이 아주 커지면 영화나 드라마만으로는 다 채워지지 않기에 책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독서는 여기서 효과가 발휘된다.
 
결국 독서든 생각이든 간에 인간은 인간과 연결되기 위해서 활동하는 것이다. 그러니 요즘처럼 인간이 홀로 살아간다는 생각으로 사는 사회에서는 독서로 주체성을 찾고 미래의 설계가 가능하다고 보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볼 수 있다.
 
독서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던 시대는 인간과의 연결이 아주 당연한 시대 그래서 대화가 가능한 시대 그리고 각 나이대마다 표준 인간상이 있고 역할마다 표준 인간상이 있기에 인간이 그리 되려고 노력하는 시대의 얘길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독서가 만능 치트키인냥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이 사람과의 단절을 당연시하고 각 나이대의 표준 인간상은 고사하고 각자의 역할마다의 인간상도 사라져 개성이란 표현으로 상대주의를 말하며 정작 자신의 개성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안 하고 도파민만 쫒는 시대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한참 부족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런 시대의 해결책은 우선 자신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친구부터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 도구는 책도 되지만 넷플릭스도 좋은 거다. 단지 지금의 입시 시대에는 이런 친구를 만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이고 더 큰 문제는 입시 공부로 인해서 자신이 느끼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찾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스마트 폰은 지대한 영향력까지 행사하고 있으니 지금의 대한민국은 극강의 편리함을 누릴 수 있는 국가이지만 그리 사람 살만한 세상은 아니다. 
 
그리고 회복 불가능한 임계점도 넘었다고 난 생각한다.
 

[출처 : 나무위키] 그래도 이때가, 그래도 이 사람들이 품위있었다. 정치인의 표준상이라고 불러도 될 사람들이다. 우리가 개성을 추구하고 성향 상대주의를 표방해도 기본적으로 그 나이대에 맞는 품성을 갖춘 다음 개성을 추구해야 이 사회가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흘러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