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ㅣ결이 맞는 사람이 좋을까? 다른 사람이 좋을까?
결이 맞는 사람을 찾는다는 말은 이해받기만을 바란다는 뜻이고, 이해받기 바란다는 말은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다른 말이다.
만약 내가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사이가 된다면 그래서 그 사람이 산이 좋아서 가을 억새구경을 가자고 한다면 나는 따라나설 것이다. 등산을 좋아하지 않아도 말이다. 만약 스킨 스쿠버를 좋아한다고 해서 같이 하자고 한다면 나는 함께 바다에 풍덩할 것이다. 바다가 무섭다고 해도 말이다.
이러한 행위는 내가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적극적 행위다. 그 사람과 (어쩌면 평생을) 함께 하려고 하는 사람으로서 그 사람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하는 행위는 너무 당연한 행위이지 않은가.
하지만 아직 많은 사람은 자신과 결이 맞는 사람을 찾으려고 한다. 사실 내가 볼 때는 99%가 이렇다. 이건 이미 자신이 살아온 세월에 굳어진 습관을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런 사람은 자신이 평생 함께 할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이해받길 원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사회 분위기는 남자가 그 결을 맞추려고 하고 있고 그것을 당연시 여긴다. 남자들은 과거의 다소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의 태도에서 어머니의 불쌍함을 보았고 그래서 자신은 와이프에게 자상한 남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90년대 문화 전성기 때 드라마를 보면서 부잣집 도련님들의 사랑법을 배웠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은 송혜교였고, 김희선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에게는 늘 부잣집 남자들이 붙었고 그녀들을 신데렐라로 만들어주었다.
남자들은 어리석게도 이 사랑법을 여과 없이 답습했다. 그래서 내 여자친구가 송혜교가 아니어도 송혜교보다 예쁘다고 했고 부자가 아니어도 부자들과 최대한 비슷한 물질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대는 흘러 여자들은 사회적 지위가 과거보다 강화되었으며 남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버거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고 들으면서 배운 자료는 드라마밖에 없기에 여자들의 요구를 맞춰주기 급급했다. 왜냐면 교과서(드라마)는 남자들이 늘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가끔 나쁜 남자 캐릭터가 뜨기도 했지만 현실의 남자들은 드라마 속 남주의 외모가 아니었기에 실패했다. 물론 여자들도 송혜교보다 못생겼다. 하지만 송혜교보다 예쁘다고 해줘야 하는데 아이러니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면 남자는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교과서와 여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들도 남자들에게 요구를 당당하게 할 수 있었다. 어쩌다 자신들을 이상하게 보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아닌 남자들이 더 많으면 그 이상한 시선을 준 남자가 쪼다 같은 놈이라고 치부하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성형 기술도 발전하고 여자들의 미모는 업그레이드되어 이런 연애방식은 더 설득력을 얻었다. 왜냐면 드라마는 여전히 어여쁜 신데렐라를 여자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남자 주인공은 여전히 돈이 많은 제벌 3세이기 때문이다. 교과서가 바뀌지 않으니 공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이 말의 결론은 결이 맞는 사람이 결혼하기 좋은 상대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끝사랑에 출연한 정은주 씨의 마지막까지의 행보는 결타령(결의 맞음과 다름의 타령)이었다. 누가 봐도 우형준 씨에게 마음이 다 돌아선 걸로 보였는데 결정적일 때의 말은 김기만 씨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어필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형준 씨에게 우회적으로 요구한다. 김기만 씨는 결이 맞다고 그래서 자신에게 맞춰달라고 말이다. (결)다름의 매력에 이끌려서 우형준 씨에게 마음을 두고 있으면서 그 안에서 편안함도 느끼고 싶어 하는 욕심까지 끝까지 다 챙기려고 마지막 에피소드까지 끌고 갔다.
그녀의 나이는 50세다.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이혼까지 했으면서 여전히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몰라서 둘 다 챙기겠다는 욕심을 부리기에는 50세는 나이와 경험이 있다. 아무리 사랑을 하면 청춘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다소 답답 혹은 거북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정은주 씨의 입장에서 이혼의 사유가 다름의 매력에 끌려 결혼까지 가보니 결국 마지막은 이혼이더라..라는 경험으로 그랬을 수 있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면 그 경험을 통해서 김기만 씨를 만나면 될 것을 결국 다름의 매력에 이끌려서 우형준 씨에게 편안함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봐진다.
결국 연애와 결혼의 교과서인 드라마는 중년세대까지 끌고 와버렸고 드라마를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한국인의 욕망은 이러한 욕망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이 되고 있다.
하지만 우형준 씨는 괴로워하며 울었다. 김기만 씨는 혼란스러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주연 씨는 데이트 대타용으로만 사용되고 말았다.
정은주 씨는 찐친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정은주 씨가 말하는 찐친의 의미는 나오지 않았지만 보통 친구의 의미는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으로 사용된다. 결국 정은주 씨는 자신(만)을 이해해 주는 사람만 찾고 있는 것이지 자신이 상대방의 친구가 되어 이해해 주는 사람이 되려는 자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시대 여자들에게는 허용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정은주 씨는 그 시대의 혜택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나는 여기서 무엇이 낫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이 더 행복하고 무엇이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인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정은주 씨야 많은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혔다고 할지언정 따지고 보면 본인이 행복하면 좋은 것이고, 그녀와 본의 아니게 엮여서 피해를 본 사람들도 이것 또한 삶의 일부이니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인 것이다.
다만 그렇게까지 해서 행복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 나이가 들도록 철이 들지 않아서 주변을 보지 못하고 피해를 입혀가며 살아가는 자신을 탓해야 할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그럼 우리는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내 결에 맞는 사람 즉 나를 이해해 주기만을 바라는 사람을 만나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당연히 답은 아니다. 간단한 논리로 내가 이해받기 원한다면 상대방도 그럴 것이고 그로 인해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순간 내가 이해받지 못하는 일이 동시에 발생되는 일은 흔하게 일어나기에 이해받기만을 바라는 방식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
다시 정은주 씨 예를 들자면 정은주 씨가 김기만 씨를 만나지 않은 건 자신과 너무 비슷한 결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첫 번째 데이트 때부터 심심함으로 다가왔었고 마땅한 다른 대상이 없었기에 지켜보고 있다가 우형준 씨가 등장하니 김기만 씨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그 심심함은 편안함으로 불리긴 했어도 매력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 심심함이 편안함으로 다가온 이유는 우형준 씨의 결다름의 매력에서 오는 불안함으로 인해서 생겨난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해만 바라는 상황이 오면 우리는 이렇게 전부를 원하게 된다. 아마 당사자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세상의 규칙에 의해서 한 명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 안에서의 고민으로 인해서 부수적 피해자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권력자들이 더 원하는 것은 더 많은 권력이고, 부자들이 바라는 것은 더 많은 돈이듯, 이해를 바라는 사람이 바라는 것은 더 많은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느 순간에 만족할 수치로 채워져야 하는데 권력과 돈이 그렇지 않듯 이해라는 것도 상황마다 전부 이해를 해줘야 하는 것이기에 만족의 범위가 없다. 심지어 이해는 사랑과 호환이 가능하기에 이 둘이 합을 이루면 만족의 수치는 무한으로 확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달리면 걷고 싶고, 걸으면 서고 싶고,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 그리고 다음은 내가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고, 눕고 싶으면 눕고, 걷고 싶으면 걷게 되는 상황을 바란다. 내가 바라는 대로 하길 바라고 이해받길 바란다. 목적과 상황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누울 이해를 받게 되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이고 지금의 대한민국 연애가 바로 이러한 형태고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이걸 감당할 수 있는 신데렐라와 왕자님 말고는 나머지는 사람들은 그냥 불행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모두가 신데렐라가 되어 돈 많은 왕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0%가 그렇다고 가정을 하면 90%는 불행한 것이다. 출산도 문제지만 결혼을 하지 못하게 하는 드라마 왕국도 문제고 더 큰 문제는 연애도 못하게 하는 일방적 이해의 강요는 더 큰 문제다.
결국 나의 행복은 내가 스스로 쟁취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는 연습을 시도해야 한다. 연애의 목적은 상대방을 이해해서 내 파이를 넓히는 것이다. 상대방의 일상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통해서 많이 웃을 수 있다면 나도 행복하고 그 사람도 행복한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그 사람도 내 일상으로 들어와서 함께 웃을 수 있다면 그 행복은 지속 가능한 행복이 된다.
왜 우리는 각자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이해받기만을 바라는 사회가 되었을까? 불안하기 때문이다. 빠른 세상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는 생각 그로 인해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설사 다 알아도 그 배움을 감당할 돈이 없는 현실이다. 그래도 어렵게 배운다고 해도 경쟁자 들고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는 미래다. 이런 현실에서 그나마 나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연애뿐인데 그 연애에서마저 이해를 받지 못한다면 더 이상 나를 세상 어디에 내놓을 곳이 없어지는 그 느낌은 더 이해를 강요하게 만들고 남들보다 돈을 더 써달라고 보채며 자신만의 사랑의 정의를 앞세우며 상대방의 사랑은 거래라고 치부하게 된다.
그러니 당신이 배움의 자세가 있고 상대방을 이해할 용기가 있으며 모르는 일을 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 손해를 볼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결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좋을 거다. 배워가는 즐거움을 주체하지 못할 수 있다. 서로 웃으면서 이래서 이걸 하는구나..라는 이해를 하며 상대방을 좀 더 잘 알게 될 거다. 그로 인해서 당신의 삶을 좀 더 풍요로워질 것이고 당신은 좋은 사람이 된다. 아마 헤어지더라도 상대방은 당신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상대방의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자신만의 즐거움의 한도가 초과되는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연애란 원래 이래야 하는 것이다.
만약 배움의 자세가 없고 있는 그대로 평안하게 살기 바라고 이해만 바란다면 부자를 만나라. 그러기 위해서 외모를 필수로 가꿔라. 운동도 꾸준히 하고 나이가 들수록 식단도 조절해라. 옷도 잘 입어라. 이해받기만 하면서 행복한 삶을 사는 10%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하는 필수 조건들이다. 이대로 살면서 이대로만 살기 위해서도 성장하기 위한 돈이 필요한 만큼 필요하다. 놀러도 가야 하고 놀러도 가야 하며 놀러도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놀러 가는 와중에 명품도 하나 사야 하고 또 명품도 사야 하고, 또 명품도 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는 삶이 당연하게 여지면 지겨울 거다. 그러면 다른 이성이 보일 것이고 둘 다 갖고 싶어질 거다. 이럴 때 그 욕망을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나마 하나 가지고 있는 것도 놓칠 수 있다.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생각보다 괴롭다. 그래도 부자면 견딜만하다. 그러니 부자를 꼭 만나야 한다. 그에 맞는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아마 상대방은 다른 이성도 이해중일 거다. 그걸 애써 발견할 생각은 금물이다. 어쩌다 알게 되더라도 언급하는 것도 금물이다. 이해만 받길 원하고 이해하지 않은 사람의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람은 이해받지 못하는 행동이기에 발설하고 싶은 욕망은 다른 매력적인 사람을 갖기 위한 욕망보다 더 억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발설을 해서 한몫 챙기고 그 사람을 놓치면 다음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이며 아무리 상대방의 유책사유를 들먹인다고 해도 결국 그 원인이 본인이라는 것은 들통날 거다.
우연히 정말 순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심심하지만 평안한 삶을 산다면 새로운 즐거움에 대한 도파민을 포기하고 살아라. 원하는 것을 원했으니 더 바라면 그때부터 불행의 씨앗은 싹을 틔운다.
타인을 이해하기 싫어서 결이 같은 사람을 찾는 다른 이름으로 대체된 삶을 살아간다면 권태로움은 필수라고 생각하고 불행은 옵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과거에는 다음 단계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진행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출산을 말이다. 아기가 생기면 그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그 임무를 행하고 아기에 대한 이해를 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둘 다 말이다. 그래서 둘은 동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과거 얘기다. 이렇게 과열된 교육 환경에서는 동지가 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누굴 탓할 수 있겠는가. 직업에 귀천을 나누어 사람을 대하는 우리도 이 교육 환경에 지지를 하고 있는 사람이 된 꼴이니 말이다.
결국 배움의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은 결이 같든 다르든 간에 새로움을 추구하며 그 기쁨을 누릴 자세가 되어 있기에 더 행복하다. 이건 내가 지난 글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이 좋은가?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은가? 에 대한 결론고 같다.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이 좋은 거다. 내 삶의 주체는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 이야기도 같은 결론인 거다.
이해받기만을 바라면서 삶을 살아가면 늘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고립형 인간으로밖에 살 수 없다. 그런 삶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자로 살아가는 방법만이 최선의 삶일 거다.
▽ 내'가' 좋아하는 사람 vs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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