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쌓기/런던살이 2023-24

런던살이 Day 107 (02. December. 2023)

_교문 밖 사색가 2023. 12. 3. 08:51

런던살이 Day 107 (02. December. 2023)

 

어느 선 이하가 인간 이하라고 불려도 좋을 선일까? 

 

[출처 : 한국일보] 굳이 따지자면 마광수 교수가 강단에 복귀를 하고서 동료 교수들의 따돌림으로 인해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때부터 인문학은 죽었다고 본다. 미래를 볼 줄 모르는 인문학 교수들로 인해서 벌어진 일이니 이 사건을 경계로 삼아도 좋을 듯 하다.

 

 

남해에 내려가면 자주 가는 물회집이 있다. 이제는 다른 집이 더 맛있어서 가지는 않지만 그전에는 자주 갔었다. 하동 쪽 노량에 있는 그 물회집에는 아들이 서빙을 한다. 약간 바보다. 그래서 그 집에서 서빙밖에 하지 못한다. 좀 서투르지만 바보티가 나니 다들 이해한다.

 

도시에서는 이런 바보를 이제 보지 못한다. 아마 다들 집에만 있거나 병원에 입원을 한 상태로 지내서 그런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시골에서는 간혹 보인다. 그렇다고 마을마다 한 명씩 있는 수준은 아니다. 이제 시골도 예전 같지 않기에 그들도 사라지고 있다.  

 

아무튼 그 횟집 아들은 자기 일은 철저히 한다. 서툴다고 하는 것이 일을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뭔가 어색하게 일을 한다는 느낌이 더 맞다. 우리들은 횟집 아들은 좀 안타깝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는 이유는 그 바보는 그 가게 밖에서는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밖에서 삶을 살아가더라도 사기를 당하거나 제대로 문명을 이용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들은 아무도 일하지 않으려고 하는 아버지 횟집에서 일을 한다. 결국 그집 아들은 어정쩡한 월급을 주는 아무도 일하기 싫어하는 곳에서 최적화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바보를 그 가게 안에서는 이해를 하고 보통의 사람들처럼 대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야 그렇게 대해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

 

의사 하는 사람이 어떤 일로 인해서 의사를 포기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의사는 그 집에서 일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망했냐에 따라서 일은 할 수 있을 거다. 그럼 월급 150만 원으로 살 수 있을까? 그 의사는 그 집이 아버지 집이 아니니 집도 구해야 하는데 말이다. 혹시 그 집 옥탑방에서 잘 수 있다고 가정하고 일을 하면 그 집에서 일하는 자신의 신세를 어떻게 생각할까? 남이 보는 시선에서는 끄떡없이 버틸 수 있을까? 의사 세계에서 교양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대하다가 거침없이 행동하는 시골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할까? 드라마처럼 그 사람들이 진짜 사람냄새나는 사람들이라면서 세상의 진리라도 깨달은 사람처럼 그들을 볼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그 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 90%는 그 집에서 일을 할 수 없다. 다들 그 식당 밖에서는 한가닥 하는 사람들일 몰라도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집 아들을 최소한 그 식당 안에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처럼 대하는 마음가짐을 바라바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집 아들이 아니면 서빙할 사람이 없어서 그 집을 문을 닫게 되고 그러면 그 집에서 맛있게 물회를 먹는 즐거움도 사라지니 말이다. 

 

물론 나처럼 더 맛있는 집을 찾는 사람도 있지만 그만큼 더 비싼집이기에 소개를 해줘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집은 그 지역에서는 필요한 집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집 아들을 여전히 좀 모자란 사람으로 본다.

 

나의 외삼촌은 바보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고향을 벗어나 살아보지 못했고 문명을 접한 경험이 없다. 난을 캐고 살았지만 그 난을 팔지 않았다. 한파에 난 수십억원치를 날린 적도 있었다. 그래서 냉난방 시설을 갖췄다. 그 집 아들이 대학 갈 때 난을 한 번 팔았다. 그 집 딸은 교대 4학년 1학기를 하고 학교를 그만뒀다. 그때도 난을 팔지 않았다. 나는 외삼촌이 그 집 바보 아들보다 더 바보 같은데 아무도 나의 외삼촌을 바보라고 하지 않는다. 악인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나만 외삼촌을 무시한다. 나는 외삼촌이 악마 같다.

 

자신은 난을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포장하면서 살아가는 악마 같다. 횟집 아들은 일을 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외삼촌은 난이나 캐면서 농사일은 한 번도 하지 않고 어쩌다 도와주면 내가 이런 일을 도와줬다고 큰 생색이나 내면서 다닌다. 그래서 엄마도 양봉일을 외삼촌(엄마의 친오빠)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외삼촌은 자식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심지어 내 돈도 흡수한다. 그 집 아들 즉 나의 사촌 형이 결혼을 할 때 내가 100만 원을 냈다. 친하지도 않고 별 친분도 없었지만 엄마가 시골에 내려가 살고 있으니 엄마의 체면을 위해서 100만원을 냈다. 그런데 숙모는 버스 대절비가 120만 원이라면서 이런 건 고모가 해준 거라고 하는데.. 하면서 웃으면서 말한다. 속으로 진짜 욕을 했지만 나머지 20만 원도 내가 냈다. 그리고 나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했다. 주변에 게으른 인간이 있다는 건 블랙홀 하나 모셔놓고 사는 인생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부모님이 돈이 있는 집안의 자식들은 블랙홀은 아니다. 빔으로 물질을 쏟아내기도 하는 블랙홀이 있듯이 있는 집 자식들은 돈을 쓰고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면서 일은 동물이나 하는 것인 양 사람들을 아래로 본다. 이런 블랙혹은 남에 자존심을 먹고 산다. 이것도 갑질의 일종이라고  하는 거 같다.

 

부가 이만큼 쌓이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든 다들 일을 해야 했기에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무시를 했는데 부가 막대해지니 이런 현상도 생겨났다. 일을 한다는 것이 창피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걸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일을 하는 것보다 실업급여를 받아서 최대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현상을 보면 말이다. 실업급여를 받음으로써 재벌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이들이 실업급여가 끝나면 일을 할 것인가? 아니다. 부이 힘을 알았기에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더라도 현재만 살기 위한 일을 하며 한방을 노리든 나의 외삼촌처럼 기행형 거지를 택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뒷바라지까지 한다는 소신으로 일을 죽을때까지 한다는 생각으로 했지만, 이제는 아기를 낳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 세상이기에 나만 생각하면 되니 블랙홀이 되어서 타인의 재산을 흡수하면 된다는 생각을 죄책감 없이 하게 된다. 바로 연애의 형태로 말이다. 외삼촌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빌붙어서 살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글로는 처량하게 볼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구별할 수도 없고, 구별하더라도 횟집 아들처럼 바보로 보면서 모자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다. 대학도 나왔고, 문명도 자연스럽게 이용할 수도 있고, 그 도시에 살면 그런 삶이 보편적인 삶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곳이고, 세상을 탓할만한 거리도 생겼고, 그리고 예쁘고 잘생기면 더 그렇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횟집 아들보다 떳떳하지도 당당하지도 못하다. 그냥 변명거리 가지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삶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은 바보를 보듯 불쌍히 보지 않고 부러워한다. 그러니 변명도 필요 없는 삶이 되었다.

 

나는 이들을 노출을 감행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들보다 더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세상은 이미 이들을 더 인정하는 삶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프로 주부가 되어라는 글도 쓴 것이다. 주부는 당당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옆동네 스타벅스에서 노력형 거지를 봤다. 구걸을 적극적으로 하는 거지를 말하는 것이다. 스타벅스에 일행들과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들어와서 구걸을 했다. 어떤 분은 그 거지에게 말을 걸고 뭘 먹고 싶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거지는 커피를 원한다고 했다.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확인했다. 커피를 가지고 가는 것을 말이다. 아마 자발형 거지일 거다. 유럽은 한 때 세금이 너무 높아서 차라리 거지를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자발형 거지가 생겼고 거지가 많아지니 거지 자격증도 생겨났다. 그런 유례로 인해서 자발형 거지가 유지되고 있고 그것도 자신이 선택한 자유이기에 존중하는 문화가 있다. 그래서 주민이 말을 걸고 먹을 걸 시켜주는 것이다. 

 

나는 이제는 이런 거지보다 못한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넘쳐나는 세상이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과거에는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와 외삼촌만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블랙홀 같은 기행성 거지들이 문명이라는 옷을 입고 당당하게 세상에 나와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자랑을 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이상한 세상이 되어도 횟집 아들은 당당할 수 없다. 최소한 그 공간 안에서라도 말이다. 자기 일을 찾아서 열심히 하고 구걸을 하지도 않고 그 아들이 없으면 그 횟집이 사라질 수 있는데 그 아들로 인해서 지속적으로 장사를 할 수 있기에 그 집의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선천적 장애로 인해서 바보 같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 마음속에는 그 아들이 거지보다 못한 상태로 대하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큰 원인은 사람과 연결되는 면이 부족해서다. 고립형 인간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외삼촌은 동네 사람들과 연결이 되어서 바보라고 일컬어지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접속해서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악마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 하지만 횟집 아들은 외삼촌처럼 남에게 기생해서 부모님 내지 남의 재산과 정신과 감정을 빨아들여서 심하면 죽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 고립형 인간이라도 그 식당 안에서는 부모님과 소통하는 개방형 인간이며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고 그 가게 밖으로는 나오지 않아도 말이다. 

 

괜찮은 외모와 돈으로 인해서 타인과 연결이 가능한 사람이라도 블랙홀처럼 남의 재산과 정신과 마음을 뺏어 황폐하게 만든다면 차라리 아버지를 도와서 가정을 지키는 동네 바보가 더 정상이 아닌가!

결국 물질 사회에서는 외모로부터 시작되어 돈으로 귀결되는 구조로 사람을 결정하는 공식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거 같다. 나는 그 횟집 아들이 이 사회에서 중간 이하 정도는 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돈도 없고 외모도 안 되는 사람들은 일을 함으로써 돈도 없고 외모도 안돼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지게 되는 되려 불쌍한 사람들이 되어가는 세상을 인문학자들은 왜 해결해주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인문학자들도 이미 물질화되어버린 어처구니없는 시대가 오래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일과 꿈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증명이 되었는데 인문학자들은 교육을 통해서 꿈을 찾는 구조를 만들어주기는 커녕 지금의 구조를 즐기면서 살고 있는거 같다. 학생들이 자신들 시대와 같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