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살이 Day 75 (2023.10.31)
살아있는 도시는 인간들 사이에 사건 사고가 많을 수밖에 없다. 살아있기 때문이다.
내가 맨체스터에 온 이유는 일행이 10여 년전에 맨체스터 대학에 교환 학생으로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행이 즐겨갔던 곳을 들리면서 이야기를 듣는 여행을 생각하고 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반인들은 들릴 일이 없으면 굳이 오지 않아도 될 도시 같다. 생각 같아서는 트램을 타고 종점 마을이라도 갔다 와서 남들 안 해본 경험이라도 하고 오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볼 것이 없는 와중에 그나마 봐야 할 것을 본답시고 쓰는 시간도 모자랐다. 거기에 해까지 빨리지니 말이다.
점심은 차이나 타운에서 먹었다. 들린 식당에 짜장면이 있기에 K 컨텐츠가 유행이다 보니 메뉴를 넣었나 보다 싶어서 시켰으나 생춘장에 비벼 먹는 짜장면이었다. 지랄같이 맛이 없었다. 한인식당에도 없는 짜장면을 먹을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는데 입맛만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아마 맨체스터에 대한 기대 자체가 없어서 그런 거 같았다.
이어서 맨체스터 미술관에서 관람을 했다. 이제는 그림을 보는 재미가 좀 들린거 같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낀다. 감정의 샤워라는 말이 일시적인 말이 아니라 그림을 보면 진짜 그런 기분을 느끼는 상쾌감을 느끼는 거 같다. 도서관은 월, 화 휴무여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일행이 그렇게 가야 한다고 한 게이 빌리지에서 '앨런 튜링'을 접견한 뒤 일행이 교환 학생 신분으로 다녔던 맨체스터 대학으로 향했다. 나는 일행 개인의 역사가 있는 곳들을 들려서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를 듣고 싶어 했으나 일행도 워낙 심심한 인생을 지향하는지라 없었다. 마트 앞을 지날 때 여기서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얘기가 전부였던 거 같다.
아무튼 그래도 좋았던 건 맨체스터 박물관이었다. 작은 규모라서 부담스럽지 않게 구경을 해서 그런가 만족감이 컸다. 대영영 박물관은 너무 커서 관람에 대한 압박이 있었다는 것을 여기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또 말하지만 이거보려고 맨체스터에 올 이유는 없다. 그냥 패스해도 좋을 도시이니 관광에 차질이 없었으면 한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릴 때 윗층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줌마들인 줄 알았는데 여학생들이었다. 외국인들이 말싸움하는 걸 구경하려고 잠시 그렇게 기다리다가 학생들인 줄 확인을 하고 저녁을 사기 위해서 아침에 봐둔 노점상 거리고 향했다. 그러는 와중에 학생들이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이 핼러윈 데이라서 학생들이 들뜬기분으로 시내로 많이 나온듯 보였다. 처음에는 머리를 부여잡고 싸우더니 한 명이 상대방을 땅바닥에 내동댕이 치면서 위에서 양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하는 것을 봤다. 대충 싸우지 않더라. 그것도 트램이 도로 위에서 말이다. 그러다가 트램이 지나가면서 싸움이 일단락되어 보였는데 그 주변에 있는 학생들이 트램 사이로 도망을 치듯이 달렸고 이윽고 경찰이 진짜 뒤쫓는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 바로 앞을 지나면서 말이다. 우리는 핼러윈 데이라서 그냥 지나치지는 않는구나.. 하면서 저녁 거리를 사러 갔다.
사실 오늘 핼러윈 데이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이 싸움이 아니다. 버스에서 꼬리를 단 검은 고양이 옷을 입고 뛰어노는 백인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자신보다 더 어린 흑인 아이에게 핼러윈 데이 때 쓸 작은 장난감을 이것저것 주면서 놀던 것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컨트롤을 받으면서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고양이 춤을 추면서 버스 안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 흑인 아이를 챙기면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양이 코스튬 옷을 입고 버스를 타는것도 상상하기 힘든데 그 옷을 입고 정차할 때마다 춤을 추고 그걸 허락하는 엄마와 사회적 분위기도 신기했다.
심심한 인생을 살아온 일행의 인생은 얘기거리가 없었다. 이걸 심전도에 비교하면 그냥 flat이다. 평평한 심전도는 죽은 사람에게 나오는 검사치다. 인생은 굴곡이 있어야 한다. 좋은 날과 좋지 않은 날이 있어야 서로 비교가 되어야 인생에 권선징악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래야 가치관을 계속 상기시키면서 인생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 오늘 시내에서 본 핼러윈 데이의 풍경은 일행의 삶과 비교해서 보여준 사건이었다고 보인다.
맨체스터의 경기(경제)가 살아나듯 곳곳에서 좋은 면과 좋지 않은 면이 드러나면서 도시가 활기를 띄는 것이라고 봐진다. 물론 적당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말이다.
과거에는 그런 싸움을 보면서 마냥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런 것을 바라보면서 학생들이 정도만 넘지 않는다면 싸울 수도 있고, 친구끼리도 그럴 수도 있고, 살면서 그렇게 성장하는 거라는 것을 받아들이다. 과거에는 배운대로 이런 일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니 그럴수도 있는 것에 대한 걱정만 늘고 그러다보니 그럴수도 있는 것들을 피하면서 살려고 했고 그런 인생은 피곤만하고 손해만 보고 사는거 같았다. 그래서 그 시절의 내 삶의 심전도 결과는 flat 하게 나오는 죽은 삶이었던 거 같다. 그리고 이걸 깨닫고 살다보니 내가 지금 이런 나라에서 이런 경험을 하고 이런 생각을 하는 시절이 왔다. 그래서 나는 항상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어쩌면 내일이 더 행복할수도 있다.
일행도 어서 이걸 깨닫고 안전과 안정이 아닌 삶을 도전적으로 사는 자세로 바뀌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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