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뛰어넘은 재벌형 학폭은 통제 가능한가?
학교와 교육 프로그램에 자녀를 맡기지 마라. 여러분의 자녀들은 여러분들이 책임지고 길러야 한다. 학교 다녀봐서 알거다.
'더 글로리'에서 인상깊은 대사가 있다. 문동은이 박연진의 꿈에 대해서 물을 때 박연진은 자신은 모든것이 다 정해진 삶이라고 했다.
그렇다. 박연진은 부모의 재력으로 모든 것이 정해진 삶이다. 그녀에게 학교는 졸업을 해야하는 사회적 상식과 의무, 편의를 위해서 다니는 곳이지 공부를 하기 위해서 가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지루하다. 그래서 자극이 필요하다. 그래서 반항할 수 없는 힘없는 자를 괴롭힌다. 똘마니도 만들어서 괴롭힌다. 문동은 아니었다면 다음은 최혜정이었다. 딱히 문동은 자체가 싫어서 괴롭혔던건 아니라는 뜻이다.
내가 요즘 OTT 서비스로 보고 있는 작품들은 주로 학교 폭력을 주제로 다룬 드라마다. 하나같이 이렇다. 부자 부모의 손에서 자란 자녀들은 사회의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학교를 다니는 것이지 재력으로 모든 것이 다 '정해진 삶'이다. 그리고 내가 학교를 다녔던 시절과는 너무 달라진 학교 폭력의 내용들이 그리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 과거
과거의 학교 폭력은 없는 집 자식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들은 공부가 하기 싫어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양아치 세계로 빠진다. 그들은 집을 싫어하고 부모를 멀리하려고 한다. 주말이면 놀기 위해서 돈을 마련해야 했고 소위 삥뜯는 짓을 했다. 역시나 반항하기 어려운 약한 상대로 대상을 잡았다. 어떻게 보면 이들이 주중에 학교를 다니는 이유는 삥을 뜯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법적인 문제와 사회적 관습과 생각없는 습성으로 학교를 다니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난 초등학교 때 함께 학교를 다닌 우태(가명)라는 친구를 시내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반갑게 몇 마디 나누고 헤어질 때 우태는 나에게 서면에서 누가 시비걸면 자기 친구라고 말하라고 했다. 우태는 중고등학교 시절 양아치가 되었던거 같다. 그리고 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양아치 짓을 하고 다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사회가 (멋대로) 정해놓은 규칙대로 살 생각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들은 DNA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동물적 삶을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도시(문명)에서 인간의 형체를 지닌체로 사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학교 다닐 때부터 교육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들은 인지하는 시간이 짧아서 당장 쓸돈만 있으면 큰 걱정이 없었다. 그래서 20대도 여전히 밤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약자들에게 삥을 뜯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군대라는 곳이 있어 그곳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국가를 위해서 용인 되는 폭력이 허용되는 곳이다. 그렇기에 이들도 여러모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곳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30대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든, 결혼을 하고 싶어서 하든, 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사회생활에 적응해야 먹고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사람이 변한다. 사회적 동물로써 말이다.
주변 친구들도 자리잡고 사는 것을 보면 자신도 놀 친구가 없어서 그렇게 변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진짜 깡패가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멋진(?) 선택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놈들은 그냥 여자나 때리면서 돈이나 갈취하는 사람이 되는거다. 그렇게 살면서 낳은 자식은 그걸 이어받는 구조였다. 그렇게 대한민국 학교의 폭력은 이어져왔다.
그래서 교사들은 선택을 했다. 사랑의 매라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을 말이다. 폭력은 정당하지 않다고 가르치는 존재들이지만 자신들은 교사라는 초월적 존재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합리화하고 정당화했으며 이유도 가리지 않고 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교사들은 자신들이 왜 때려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렸고 그냥 자기 말 안들으면 때렸다.
물론 그 폭력은 어느 정도 먹혔다. 실제로 비폭력 담임을 둔 반은 양아치들의 세상이었다. 바닥에 침을 뱉는 것을 자신들의 시그치처 행위로 간주하며 동맹을 맺으며 반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담임은 자신의 무관심을 사상의 우월성이라 포장하며 여전히 비폭력을 내세웠지만 반학기가 지나니 매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타성에 젖은 양아치들은 적당히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늘 하든데로 살았다. 특히 여교사 담임 반은 더 했다.
반면 폭력 지향적인 담임을 둔 반은 양아치들이 힘을 내지 못했다. 심지어 고등학교 3학때 옆반 담임은 벌금도 걷었다. 금액은 1,000원에서 3,000원으로 소액이었다. 반에서 싸움은 물론이고 주변에 쓰레기 떨어졌는데 줍지 않은 것도 돈을 받았다. 그반은 깨끗하고 조용하고 늘 1등이었다.
그리고 수능이 끝나고 옆반 담임은 벌금을 모은 돈으로 뷔페를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들 부러워했다. 뭔가 정당성이 있어보이는 폭력이었다.
그런식으로 학교폭력은 교사들의 폭력으로 다스려졌다. 없이 사는 부모님을 위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사상을 주입시키며 그래서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하면서 왜 공부하는지도 모르고 돈을 벌기 위해서 칠판에 글을 쓰면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학생들에게 설파했다. 난 그들이 갓잖았다.
결국 폭력은 폭력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정당성을 그들은 인정한 무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폭력을 다스리기 위한 다른 방법은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건 양아치들처럼 DNA적인 삶을 사는 것이고 우린 그런 동물적인 삶을 사는 존재들에게 가르침이랍시고 설교들 듣고 살았다. 그들의 지식은 덤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한국은 경제 10위의 국가가 되었다. 벤츠는 마치 그렌져처럼 돌아다니고 어지간한 외제차는 쏘나타 만큼 돌아다닌다. 벤틀리는 이제 낯설지 않다.
이제 세상은 그런 설교를 듣던 학생이 돈을 벌어서 학부모가 되었고 학교의 방침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내가 더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기에 내 자식은 그런 싸구려 교육에 희생자를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을 지닌 존재가 된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 자식은 교사라는 양아치 집단의 희생자가 되지 않게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는 뜻이다.
교사가 양아치 집단과 다르지 않은 이유는 같은 폭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교사들은 무관심을 비폭력주의라는 포장을 했다. 그래도 평화가 온다면 괜찮다. 고3 옆반 담임은 우리들 사이에서 최고의 담임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수능이 끝나고 왠지 모를 인간미도 느꼈다. 그건 결과가 좋았기 때문이다. 결과가 좋았다는 것은 목적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적을 정확히 알고 있으니 그 담임은 자신이 악역을 서슴없이 자처했다. 그는 자신의 과목에 대한 수능 출제 유형을 연구해 자신만의 정보지를 만들어 가르쳤다. 그는 인생을 가르치진 못했지만 고3이라는 1년의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존재는 되었다.
하지만 이건 합리화 되어서는 안된다.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겠금 가르치는 곳이다. 수능을 쳐서 대학을 들어가는 것은 이 목적에 부합할때나 가능한 것이다. 옆반 담임은 그저 우리나라 특수한 상황에 특수한 시간대에 맞춰진 정도의 수준이고 이건 대한민국 역사적으로 봤을 때 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기에 넘어가는 수준인거다. 그것도 결과가 좋았을 때나 말이다.
하지만 나머지 교사들은 그냥 때린다. 자기 말 안들으면 때린다. 뭘 가르치는지도 모르는거 같다. 왜 가르치는지도 모르는거 같다. 그냥 때린다. 그냥 때리니 맞는 학생은 왜 맞는지 모른다. 그렇게 양아치 한 명은 또 탄생한다. 사랑의 매로 말이다.
그러니 법이 나섰다. 체벌을 없애 버린 것이다. 그들은 학생들을 통제할 방법을 잃었다. 그들은 이제 나약하다. 왜 때리는지 알았다면 법에 항소를 했을 텐데 모르니 그냥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다. 매가 없어서 학생들을 컨트롤 하지 못한다는 핑계말고는 할 말이 없다. 이말은 교사들도 양아치와 같은 DNA적인 존재들이었다는 증거다. 교사들은 연구를 했어야 했다. 교육이 필요한 이유를 찾아서 학생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제시를 찾았다면 그들의 매는 정당성을 유지했을 것이다. 굳이 사랑에 매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는 매를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무개념으로 매만 드니 학생이었던 부모들이 나선것이다. 외제차를 타고서 말이다.
▼ 부작용
이들은 학교 교사들의 무능함에 도전을 했고 교사들은 무기를 잃었다. 그렇게 내 자식을 양아치 교사들의 폭력에서 보호를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대한민국은 더 부자가 되었다. 각반에 부자 부모를 둔 학생들이 많아지니 무기를 잃은 교사들은 돈에 굽신거리게 되었다. 돈 많은 부모를 둔 자녀들은 교사의 통제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교실의 신이라고 불리우던 교사들도 돈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양아치 짓을 하던 시절의 벌을 이제서야 받게 된 것이다.
먹이사슬 꼭대기에 오른 부자 부모를 둔 학생들은 심심하다. 그들은 이제 앞날이 정해진 삶을 사는데 왜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자극이 필요하다. 어쩔 수 없이 다녀야 한다면 학교를 놀이터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쉽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양아치들처럼 반항 할 수 없는 약자들만 찾아서 괴롭힌다.
걸려도 상관없지만 걸리지 않게 해야 하는게 스릴있기 때문이고 그래야 자신들이 더 전능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자극은 이들에게 도파민이 되어 왜 다니녀야할지 모르는 학교를 계속 가게 한다.
돈 많은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교사의 의미 없는 폭력에서 보호하려고 했을 뿐인데 그 부작용으로 자기 자식들이 사회악*이 되어버렸다.
*학교악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더 글로리 정도의 수준이면 사회악이다. 그리고 어차피 사회에 나갈테니 말이다.
▼ 그럼 그 부모들은 자녀들을 왜 부끄러워 하지 않나?
이런 과정이 한 세대에 걸친 과정은 아니다. 초기 부자 부모들은 학교 교사들의 폭력에서 자기 자녀들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그 자녀들은 커서 오렌지 족이나 야타족이 되었고 그들은 돈으로 얼마든지 법을 피해가거나 감형을 받아서 안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익히고 난 후 사회적 존재가 되어 자녀들을 낳았다.
그렇다 보니 박연진 같은 자녀를 둔 부모는 교사는 물론이거니와 그냥 자신들이 필요없는 사람들은 그냥 다 무시하는 삶을 살게 된것이다. 그러니 박연진이 사람을 괴롭히는 것보다는 사건을 일으키는 즉, 들키는 것 자체가 싫은 정도의 수준이 된 것이다.
결국 이들도 교사들처럼 왜 자신들이 교사위에 있는 존재가 된건지 모르고 그냥 돈이 최고다,라는 생각만 하게 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로인해 지금은 TV에 얼굴이 알려진 돈 없는 학교 폭력자들만 피해를 받고 있다. 가끔 정치권 학교 자녀들이 걸려들 뿐이다.
이런 풍조는 역시 돈이 최고라는 생각을 퍼트려 지금 우리 국민들은 전부 돈돈 거리고 있다.
https://www.youtube.com/shorts/kS2j8aeMXEs
▼ 그럼 여기까지 온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할 수 있었던건 이튼 사립 고등학교 때문이라고 처칠이 말했다. 좋은 교육이 있었기에 전쟁에서 승리해 평화를 지켰다는 뜻이다.
영국의 사립학교는 리더십을 따로 배운다. 스스로를 통제하는 법을 배우며 나라를 다스리는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암호 체계를 파악하고 바로 대응한 것이 아니라 암호를 여전히 모른다는 식으로 서서히 히틀러를 압박하면서 전쟁을 치렀다.
그래서 나치는 암호를 바꾸지 않았고 연합군은 암호 파악후 3년 후에 승리를 할 수 있었다.
그 3년 동안 연합군은 모든 전투가 어떻게 될지를 알고 있기에 어떤 전투에서 패전을 해야지 암호를 파악한 것을 들키지 않을지를 고심하면서 결정했다. 만약 암호 파악을 바로 대응했다면 암호는 변경되었을 것이고 2차 세계 대전은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전쟁의 신놀음을 했다. 그리고 그건 통했다. 누구는 생명을 가지고 장난친거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공리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함께 지속적으로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어떤 구역의 존재는 희생이 불가피하다.
난 이걸 인정하기에 그 희생 지역에 들어서는 것을 피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라고 생각하고 우리나라도 영국의 사립 교육처럼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두 다 같이 잘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현실이고 그 현실을 다스리는 인물은 마치 스포츠 선수들처럼 재능이 보이면 어릴 때부터 그러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그것이 현재 세계 10위 경제력을 지닌 우리나라에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영국은 브랙시트라는 결정을 통해서 자신들의 교육도 이제 사양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버렸다. 이건 결국 인간은 교육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본성대로 살아가는 증거라고 볼 수 있기에 세상의 아버지격의 나라가 그런 결정을 했다는 건 나에겐 좀 충격적인 일이었다.
▼ 그럼 이런 상황에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이 없다. 설사 영국이 사립교육에 여전히 성공적인 나라라고 할지라도 난 우리나라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립학교를 설립한다고 해도 가르칠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우리나라 교사들은 양아치 교육에 길들여져 있어서 사랑에 매가 없으면 학생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 이상의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지 못하고,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여전히 오리무중이며, 지금은 그냥 월급용 직장으로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막강한 재력으로 밀어붙이는 학생들에게 국가적 리더십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아무런 대비없이 세계 경제 10위에 안착했다. 그 결과 몸통은 너무 커지고 다리는 가늘어져서 상체만 보면 너무 매력적이지만 일어서면 비틀거리는 위기의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렇다고 대학 교수들이 중고등학교에서 리더십을 가르치겠는가. 대학이 망해가는 요즘은 그래도 좋다고 생각을 하지만 안할거다. 솔직히 하더라도 그들의 수준이 국가적 리더십을 가르칠 수준이라면 망한 대학에 있지도 않을거다. 이런 결과를 내는 것이 씁쓸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현실은 그렇다.
그래서 난 학부모들에게 이제는 부모가 자녀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필요하면 그리고 가능만 하다면 학교는 스스로 가고 싶다고 하지 않는 이상은 보내지 않고 부모가 교육을 시키는 것이 더 좋은 시대가 되었다고 봐진다. 학교를 보낼 좋은 점이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의 첫번째 장점은 인간을 무지에서 해방시켜준다는 것이다.
그것을 체계화해서 효율적으로 가르친다. 단점은 인간을 평균적으로 가르친다는 거다. 우수한 애들은 선생들의 리더십을 능가한다. 이런 애들이 리더십을 따로 배워야 하는데 교사를 능가하는 학생들은 교사들이 짖누른다는거다. 칼 세이건은 학창 시절 선생들을 능가했다. 교사들은 그걸 인정하고 칼 세이건이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수업을 만들어서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다.
이런 사상이 없는 우리나라는 평균적으로 가르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공부를 잘해서 우수한 학교에 가거나 고시를 통과해야 리더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이런식으로 자란 학생은 그냥 학습형 리더 혹은 지식형 리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정치인들이 딱 이정도만 하는거다. 과거 정치인들의 리더십은 가난으로부터 배웠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다소 거칠었지만 그래도 단기간 여기까기 오른건 그 영향도 있다. 물론 좀 더 시간이 걸려도 젠틀하게 오는게 더 좋았겠지만 어쩌겠나 교육이 그걸 뒷받힘 하지 못했으니..
그리고 어느덧 부자나라가 된 우리나라는 이제 진짜 리더십이 필요하지만 가난에 의존해 리더십은 마치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인냥 적응해서 더이상의 실질적 리더십은 기대하기 어렵다. 당장 뉴스 채널만 틀어봐도 이건 쉽게 느낄 수 있다. 심지어 대다수 국민들도 여기에 길들여져 더이상의 리더십은 있는지 조차 모르고 양진영에 편만 들면서 싸운다. 우리는 지금 이상의 리더를 찾고 만들기 위해서 이들과 대립을 해야 하는 국민임을 망각한채로 말이다.
누구의 편을 들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뭉쳐서 정치인들이 긴장하고 정치를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그렇기에 부모들이 리더십(인성)을 가르쳐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는 인생을 살 수 있게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다. 필요하면 우리나라는 떠나 살 수 있는 생각을 갖게 해야 한다.
학교의 또 하나의 장점은 친구를 쉽게 사귈 수 있다는 거다.
한 때 친구는 평생 갈 친구 한 명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 친구는 대체로 어릴 때 학교 다닐 때 결정이 되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건 다들 대충 가난할 때 가능한 얘기다. 지금 세상은 학폭이 없는 학교에 다닌다고 해도 친구 관계는 유지하기 어렵다.
이제는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생활 수준에 따라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애초에 비슷한 수준이라고 해도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생활 수준이 차이가 나면 만나기 쉽지 않다. 여기에 대화 주제가 달라지면 더 그렇게 되고, 주제가 같아도 수준이 차이가나도 그렇다. 이제는 학교에서 평생 친구를 만드는 일은 거의 없다. 이건 가난해도 그랬다. 단지 완전히 없지 않은 수준을 유지했던것 뿐이었다.
나도 가장 친한 친구와 멀어진지 20년이 다되어 가는데 연락을 해서 만나보려고해도 이제와서 무슨 대화를 할지를 고민을 하면 그냥 일회성 만남에 지나지 않을게 뻔해서 같은 목표를 가지고 대화가 되는 친구를 한 번 더 만난다. 그리고 그런 친구는 꼭 어릴때 만나지 않아도 된다. 각자의 유년시절을 보내더라도 사회에서 만나서 뜻의 방향이 같다는 것을 알고 대화가 통하고 대화 수준이 서로를 믹스업 시켜주는 관계면 얼마든지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난 이런 친구들로 인해서 갱년기를 무사히 넘기고 있는 중이다. 난 갱년기 우울증을 겪지 않는다.
결국 친구는 생각을 표현하는 곳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지 학교라는 장소가 맺어주지 못하는 곳이다. 학교는 생각하면 매를 들거나 핀잔을 주거나 버릇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보통으로 키우기 바쁜 곳이 학교다. 거기에다가 보통의 학생들은 매를 잃어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핑계를 대는 교사의 지배와 양아치의 활보, 그리고 이들은 넘어선 재력가 자녀들의 눈꼴 사나운 행보, 이에 부합하는 돈에 굽신거리는 교육자들의 나약함을 경험하기에 학교는 본래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고 봐야 한다.
겨우 지식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시스템이 있다는 정도가 학교 유지의 명목이 된다. 그것도 곧 있으면 AI가 지배할 수준이 될거 같다. 리더십과 인성을 가르치지 못하는 선생이 없는 학교는 인공지능이 가르쳐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가장 큰 장점 두 개가 사라지니 학교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다. 맞벌이 부모들의 보모 노릇이나 하는 장소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본다.
돈이 없지만 능력이 뛰어난 학생은 보통의 사람으로 졸업을 하게 만들고, 평생 친구도 사귈 수 없으니 학교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난할 때나 부모를 대신해서 나를 걱정해주는 은사님이 있었던거고, 가난하고 사회 변화가 없었기에 평생 친구를 만들 수 있었는데 지금은 빈부의 격차가 만연하고 세상의 변화도 너무 빨라서 학교의 기능을 잃었다고 봐야 한다.
이러니 돈이 곧 성적이고, 돈이 곧 친구고, 돈이 곧 인생이 되는 것을 학교때부터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니 사회는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다. 부자가 소수일 때는 부자를 비난하면서 살아도 되었지만 이제는 그런 부자를 욕하면서 부자를 동경하고 자신은 아니라고 하지만 자신도 부자가 되면 그렇게 할 준비를 하고 졸업하는 것이 학교가 되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부모가 공부를 해서 자신들의 자녀를 직접 가르쳐야 한다. 돈 벌기에 급급한 부모가 되면 자녀들은 학교에 100% 맞기게 되고 당신의 자녀들은 지금 학교에 적응하게 되고 순응하게 되어 몇 천만원이나 들여서 대학교를 졸업해놓고 적성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방구석에서 우리집이 돈이 없어서 그런거라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들은 이걸 모르고 아직 기다려보자, 우리애는 그런 애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시간만 흘려보내게 된다.
대다수 부부들은 맞벌이 부부일거다. 그렇다면 최소한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라. 그래야 자녀들을 하루에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다. 만나야 교육이 가능하다. 그럼 저녁을 먹으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바로 대화다. 대화가 교육의 시작이고 끝이다.
대화는 서로의 자아를 나눈다는 뜻이다. 잡담이나 하면서 말을 섞는 수준이 아니다. 그래서 생각을 담은 대화는 행복이라고 지난 글에 언급을 했다.
모든 대화의 시작은 우리는 어떻게 살것인가? 라는 주제로 시작해서 끝을 맺는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지? 행복은 무엇인지? 돈은 어떻게 써야 행복할지? 친구란 무엇인지? 어떤 친구가 되어주어야 할지? 등등의 주제는 평생 가져가야 할 주제다. 부모가 이런 것을 모르고 사는데 자녀들은 어떻게 알 것이며, 학교에 맞긴다고 해서 이런것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지금 정치인들도 이런것을 모르니 자기 지갑만 채우기 바빠서 우리 지갑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거다. 무조건 돈은 많은게 좋다고 어떻게 쓸지에 대한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말이다.
어느날 동대문에서 옷가게를 하는 분이 의뢰를 했다. 아무리 코로나지만 자기 가게만 손님이 하나도 안온다고 해서였다. 이런 경우는 자식이 성장을 해야 할 시점에 왔는데 성장이 될 환경이 아니니 더이상 가정에 돈이 필요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다. 역으로 말해 자식이 사회에서 더 성장해야 할 무언가를 지금이라도 찾아서 한다면 돈이 다시 벌릴거라고 했다. 그래서 어차리 장사도 되지 않으니 그 시간에 부모로써의 공부를 시작하라고 했다. 리더십 위주로 하라고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유튜브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하면서 위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대화중 무조건 영어를 필수가 되어야 하니 그제서야 한마디 한게 결국 영어유치원 보내란 말씀이군요,라고 하면서 이제야 알겠다고 하는 것이다. 난 그 영어유치원에 위의 내용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이 있다면 보내면 되지만 없다면 부모가 가르쳐야 한다고 하니, 그분은 영어유치원에 가면 그런것도 가르쳐준다는거죠? 라면서 유도 질문을 나에게 했다.
결국 알아듣지 않으려고 작정한 이분을 그래도 어떻게든 나는 설득을 해보려고 했다. 결국 이분은 나에게 자식을 키워보신적 없으시죠? 라며 현실 공격을 했다. 그래서 난 자식을 키워본적은 없지만 누군가의 자식으로 살았고 살아가고 있다고, 그래서 지금 나이쯤 되니 내 어릴 때 부모가 이랬으면 훨씬 더 좋았을거라는 지혜는 있다고 했다.
이분은 말이 없었다.
이런 부모를 둔 자녀는 어쩔 수 없이 그냥 소시민으로 살 수 밖에 없는거다. 어쩌다 부자가 되면 학폭 가해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인간관계의 중요성은 하나도 모르는 무미거조한 사람이 되는거다.
결국 대화의 시간을 갖어도 잡담, 험담, 뒷담화, 인생 뭐 없다는 식의 대화 내용만 가지고 있다면 의미가 없다는거다. 그러니 부모라면 그리고 부모가 되려고 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그게 재산이 되어서 나중에 가장 큰 유산이 될거다.
그리고 이런 부모가 되어야 자식이 학폭 피해자가 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들 교사들도 자신들의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해서 편부, 편모 가정이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우는 자녀들을 우선순위로 페미사상을 주입시킨다. 문동은이 피해자가 된건 부모가 외면해서 그런거다. 그 전 윤소희도 그렇다. 최혜정도 아버지가 세탁소하는 소시민이었기에 크게 다르지 않았을거다.
인생을 아는 부모는 이런 자녀를 외면할리 없고 그걸 아는 자녀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살기에 쉽게 당하지 않는다.
현재 대한민국 학교와 교육 시스템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 조차 재력을 능가하지 못한다. 그건 부자들이 무료해서 저지를 학폭을 막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건 결국 부모들이 각자의 자녀들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24시간 지킬 수 없으니 정신적 지지와 스스로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바로 부모의 역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부모가 되고 어른이 되려면 인생을 공부하라. 인생이라는 단어가 막연하다면 철학을 공부하라고 하면 좀 쉽게 와닿을거다. 철학도 어렵다고 느낀다면 모든 것에 '왜?'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관찰하라. 이런 삶의 태도가 바로 부모(어른)이 되는 시작이자 끝이다.
이런 삶의 태도를 지녔다면 인생의 목표를 찾게 해줘야 한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간다. 살아지는 인생이 아니기에 우리가 직접 노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살아가야 하는 인생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삶에 목표가 없다면 같은 자리만 맴도는 방황을 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대다수 자신의 꿈이 뭔지도 모르며, 목표는 그냥 잘 사는것이고, 비겁한 공손함을 지닌 사람들은 평범하게 사는것이 목표라고 한다. 내가 이런 식으로 사니 우리 자녀들도 그렇게 살게 되는거다. 그리고 이런 삶을 교육에 맡겨봤자 사는대로 살다가 수능 점수에 맞춰서 교사가 된 사람들에게도 절대 배울 수 없다. 심지어 교사들도 꿈을 각자가 찾는거라고 하면서 학생들에게 미룬다. 모르니까 그런거다. 혹시 교사들에게 꿈을 갖는 법에 대한 얘기를 들어본적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그러니 우리 자녀들이 이 험한 세상을 안정적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부모들이 케어를 해줘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다.
꿈과 목표에 대한 의미를 찾고 필요하면 ChatGPT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좋다. 인공지능에 인생을 맡기는 것은 좋지 않지만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자 특권이다. 하지만 기왕이면 책을 읽어라. 꿈과 관련이 없는 책을 읽더라도 어느 한 문장이나 전체 맥락을 이해하면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들이 생겨난다. 통섭적 지식의 습득 방식은 검색으로 아는 것보다 훨씬 좋은 지식 습득 방식이다. 그런식으로 여러권 읽으면 대충 꿈을 이해한다. 기왕이면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 쓴 대중적인 책을 읽어라. 그렇다면 그들이 삶의 방식을 간접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꿈을 이해하는 접근방식 중 하나이며 여기에 그들의 일생을 다룬 영상을 챙겨본다면 확실히 알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이 방법이 꿈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접근하면 꿈은 직업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고 무언가를 한다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남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면 의사가 되어도 좋고, 변호사가 되어도 좋고, NGO같은 기구에 들어가는 것도 좋고 무료급식원이 되는 것도 좋은거다. 여기에 개인적 욕심이 더 해지면 기왕이면 직업이 좋은 쪽을 찾는거고, 사회적인 일을 하고 싶으면 위험을 무릅쓰는 종군 기자나 사진 작가가 되는 2차적인 직업도 것도 있다. 혹은 남을 돕고 싶지만 그래도 혼자 일하는게 좋다면 과학자 같은 직업도 있는거다. 지금 현대는 과학이 유일한 희망일 수 있는 시점까지 치달았다.
꿈은 동사지만 목표는 명사다. 이 두개가 합쳐지면 자녀들의 인생 발걸음이 확고해진다. 사람들이 꿈이 뭐냐고 질문 할 때 대답을 명사 먼저 말하는 것이 편리하다. 하지만 생각은 늘 동사부터 해야 한다. 순서가 바뀌니 사람들은 꿈을 직업(명사)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사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아버린다. 목표가 더 선명하니 블러처리가 된 동사는 생각하지 않아되 된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남을 돕는다는 개념으로 따진다면 의사나 무료급식원은 같다. 성적에 따라 나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목표가 중요하다. 의사라고 목표를 정하면 아무래도 공부를 더 하게 된다. 꿈에 개인적 욕심을 뺄 이유가 없는데 우리나라는 (거짓이라도) 남을 돕기 위해서 의사를 한다는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는 것을 남사스럽게 생각해서 꿈을 목표와 혼용하고 목표를 꿈으로 치환하게 되어 사용하다보니 꿈을 잃어버리고 의사는 돈이라는 결과에 만족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지경까지 왔다는 것은 꿈에 대한 것들이 모호해지면서 예의상 말하는 것들이 다 가직처럼 느껴지게 되다보니 이제는 솔직해지자는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의사가 되는 목표를 가졌다는 것은 사회적 의미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부와 명예만을 갖겠다는 뜻이라고만 내포해서 말해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는 꿈이 상실되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부모도 꿈을 모르는 만큼의 시간을 흘렀다는 뜻이다.
이말은 이제 우리나라에서 어설픈 꿈으로 살면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꿈을 가졌다면 해외로 나가야 뜻을 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진국들도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아니면 목표를 세계 최고라고 정하면 된다. 김연아가 처음부터 피겨 선수로써 성공해서 돈으로 기부 활동을 하겠다고 생각해서 한건 아닐거다. 노력과 끈기로 이뤄낸 성과의 고통을 알기에 자신의 뒤를 따르는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50억원의 기부를 한 것일거다.
하지만 이건 너무 어렵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예외다. 꿈과 목표의 순서를 바꿔서 성공한 케이스가 얼마나 될 것이며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기부를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 사회적 이미지를 갖기 위해서 하는 경우까지 빼면 훨씬 적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타고난 사람들이 어떠한 경우가 되더라도 시도해서 끝까지 간다는 신념으로 밀어붙인 경우이기에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순서를 바꿔서 생각하면 40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게 된다. 지금 우리들처럼 말이다.
동사는 행동하게 한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한 발짝씩 움직이게 한다. 무료급식원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사가 너무 높으면 시도조차 안하게 만든다. 40대에 의사, 변호사를 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40대면 다 무섭다. 여기에 갱년기까지 겹치면 죽고 싶어진다. 가족이 짐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울음이 많아진다. 그리고 말에 방황이 오면(대화가 횡설수설하면)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찾지 못한다. 과거는 세상이 변하지 않아서 그래도 버텼지만 지금 시대는 1년이 지나면 벌써? 라는 말이 나오고 3년이 지나면 적응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중년 자살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이런 대화가 저녁 식탁에 오고가면 자녀들은 왜 배워야 하는지 알게 되고 학교에 가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길을 찾게되고 적성에 따라 계속 학교 공부를 하든, 그림을 그리든, 운동을 하든, 부자가 되겠다고 하든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남을 따라 가는 삶이 아닌 주체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자신을 이해하고 삶을 깨닫게 해주는 부모를 빽으로 둔다는 것은 자존감을 넘어선 자신감을 갖게 해주고 그건 학교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힘을 지니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밥상머리 교육이 학교 교육으로 진화*를 한다면 아마 국가가 뛰어난 리더를 만드는 초석이 될거다. 그렇게 된다면 재벌형 학폭은 아주 많이 줄어들거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는 너무 멀리 왔다. 30년이나 이런 기간을 겪었으니 아무도 이런 교육을 기억할리 없다. 기껏해야 삼성가 같은 사람들이나 할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뜻을 이어받아 살아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꿈과 목표의 개념을 파악하고 그것을 찾는 것 이상인 자신들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국민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
교육은 자신들을 뛰어넘은 부자들을 통제하지 못한다. 통제를 하려면 사회분위가와 함께 협업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설사 분위기가 된다고해도 정치적 이유로 절대 교육은 바뀌지 않는다. 이에 대항을 하려면 교사들이 교육 방식을 연구해야 하는데 교사들에게 그런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교수들이 그렇게 해야 하는데 설마 그럴리가. 교육청도 별 생각없을거라고 다들 동의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 자녀들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그 시작은 저녁시간의 확보이고, 확보된 시간은 생각이 있는 대화이며, 대화 주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시작은 꿈과 목표에 대한 것 부터다.
이런 것을 다 고려한다면 일단 결혼 상대방의 통장을 우선적으로 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마라. 당신이 부끄러워 해야 하는 것은 그돈을 자기것처럼 쓰려고 하는 행위다. 우선 돈이 있어야 저녁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니 돈을 많이 벌어도 일을 너무 많이 해야 하거나 열심히 하는 사람도 무리다. 그리고 대화의 수준이 있는 사람을 찾아라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도 책을 많이 읽어라. 많이 읽으라고 하니 많이 읽지만 내용을 머리에 담지 않은 사람들이 많으니 책을 깊이 있게 읽어라. 그래야 대화의 수준이 높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습자지처럼 얇은 지식이라도 넓게 알아야 대화의 수준이 높은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있고 대화중에 적절한 질문이 나올 수 있다.
현재 당신의 꿈과 목표가 뭔지 모르겠다면 이렇게 정해라. 꿈은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것, 목표는 직업이 좋은 지적인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게 지금 방황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좋은 방향이 될거다. 이 방향을 이해한다면 어러분들이 자신을 업그레이드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할거다. 그걸 안다면 책을 읽을거다.
'사피엔스'부터 시작해라. 그걸 읽고 이해를 한다면 '그릿'을 읽어라. 능력을 올리기 위해서 함께 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절대 유튜브로 다 파악했다고 생각하지 마라. 유튜브 영상은 내용의 반만 설명했다. 나머지 반은 읽어라 후반부에 나온다. 이걸 이해했다면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불안'을 읽어라. 그러면 여러분들이 왜 불안한지를 좀 이해할 수 있을거다. 그러고 좀 더 여유가 된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어라. 이건 이해가 잘 안 될거다. 만약 이걸 이해한다면 여러분들은 인생을 불안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거다.
그리고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을 읽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라. 혼자 읽고 이해를 했다고 하는건 자신만의 세계안에서만 이해를 한 것이다. 세상은 여러분보다 80억배 넓다.
혼자가 좋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같이 사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꿈과 목표는 안전을 지향한다. 그러니 지금 방황한다면 꿈과 목표를 이 방향으로 설정해도 좋다. 단언컨대 후회없을거다.
사회는(삶은) 대학교를 졸업했다고 생각을 멈춰도 되는 곳이 아니다. 학교는 겨우 생각하는 초석을 다진것일뿐 생각은 사회에서 시작을 해야 한다. 그리고 다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사람들 각자의 머리와 마음속에 자리잡히면 그때서야 학교 폭력은 멈출거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할것이 뻔하니 우리 자녀들은 우리가 케어해야 한다고 하는것이다. 그렇게 각가정에서 준비하다가 진짜 우연히라도 밥상머리 교육이 전가정에서 행해져 교육에서 하지 못하는 것을 가정에서 이룬다면 그건 꿈에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이쪽이 더 현실적으로 이뤄지기 더 가깝다고 본다.
https://spike96.tistory.com/16464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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