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 경험론/인생

행복은 사람 사이에 있다.

_교문 밖 사색가 2022. 12. 4. 15:06

행복은 사람 사이에 있다.


20대의 고난을 스킵하면, 30대의 행복이 스킵된다. 그러면 당신이 이 생에 이룰 가족이 스킵된다. 가족은 행복의 근원이다.




지금 지구에 불가사의 한 일이 벌어져서 당신 혼자 남았다고 생각해보자. AI 시스템이 보편화되어서 에너지도 먹을 것도 커피도 다 기계들이 알아서 제공해주고 무료다.

여러분들은 지금 당장 백화점에가서 신상 옷을 마음대로 꺼내 입고, 최고급 가방을 메고 식당으로 가서 입안에서 녹는 스테이크를 우아하게 썰며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먹었으니 운동도 호텔에서 하고 수영도 즐길 거다. 밤이 되었으니 잠도 호텔에서 자면 된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다. 모든 건 준비되어 있다. 이 지구가 온통 당신 것이다.


여기서 놀다가 지겨우면 파리에 놀러 가면 된다. 모든 건 AI 시스템으로 자동이니 어려울 게 없다.


행복할 거 같은가?


아무리 최고급 물질로 나를 무장해도 외로움과 심심함과 존재의 유무에 대한 의심은 무시할 수 없는 숙제로 머리를 맴돌 것이다. 에르메스 가방을 들어도, 샤넬 옷을 입어도, 구찌 신발을 신어도 알아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물질에 대한 의미가 무색해진다.
불행하다기보다는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외롭다고 표현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는 다 같은 의미가 될 테니 말이다.


그럼 여기에 하나 추가를 해보자 모르는 사람들만 가득한 세상이다. 나를 아는 사람은 없다. 나는 돈을 벌 필요도 없다는 설정은 유지해보자.


아침에 일어서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운동을 하며 저녁 무렵에는 책도 좀 읽다가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잔다. 이게 일상이다. 조건은 늘 혼자다. 이걸 평생할 수 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날 전혀 모른다. 처음에는 좀 괜찮을 거다. 식당이나 카페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적당히 아는 척을 할 테고 그래서 돈 걱정이 없는 삶에 대한 편안함이 나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줄 수 있다.
단지 조금 불편한 것은 내가 자고 싶은 방이나 사고 싶은 가방, 옷이 미리 예약이 되어서 내가 차지하지 못하는 정도다 허나 이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왜냐면 난 최고급 호텔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고, 샤넬 옷을 입는 사람에다가,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펜디 선글라스를 끼며, 구찌 신발을 신고 다니며 까르띠에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사람으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행복감은 얼마나 지속이 될까?


식당이나 카페를 여러 군데 돌아다니면서 이런 약한 유대관계를 새롭게 꾸며본다. 런던에 가서도 그래 본다. 두바이에서도 그래본다. 베트남에서도 그래본다. 이렇게 하면 한 1년 행복할 수 있을 거 같다. 심지어 이런 삶을 인스타그램으로 올려서 모르는 사람들과 공유를 한다. 좋아요를 10만 개씩 받는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곳에 가서 좋은 풍경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은 자신을 올려보니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른다. 하지만 절대 규칙은 친구를 절대 사귈 수 없다, 라는 것이다. 그럼 인스타그램으로 2년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2년 뒤에는 외롭다고 할지 심심하다고 할지 모르는 적막감이 생길 거다. 결국 이렇게 또 되는 것이다.




여기에 연애를 할 수 있다고 추가를 해보자. 여전히 돈에서는 자유롭다. 하지만 돈으로는 이성을 꼬실 수 없다는 전제도 달겠다.
그동안은 이 모든 조건을 누리기 위해서 건강해야 하니 운동을 했다면 그래도 몸 좋은 이성을 만나기 위해서 나도 몸매를 가꿔야 한다는 조건으로 운동을 하게 될 거다. 왜냐면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닌 모르는 사람들이 즐비한 세상이니 경쟁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났다. 허나 당신은 인간관계를 제대로 맺어본 적이 없기에 연애를 지속하기 어려울 거다. 무조건 싸우게 되어 있고 어떻게 화해를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헤어질 거다. 왜냐면 마르지 않는 통장으로 인해서 당신은 얼마든지 다른 이성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명을 만나봤다. 한 10명이라고 가정해보자. 이제는 헤어지는 지점을 알게 되어 싸울 것도 없이 떠난다. 당신은 여전히 친구를 사귀지 못한다. 또 혼자다. 극도의 외로움을 느낄 거다. 적막감을 견디기 어려우면 그나마 나와 가장 잘 맞았던 과거의 사람에게 연락을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길 바라면서 싸우게 될 거다. 절대 당신은 맞춰주지 않을 거다. 왜냐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나는 이대로 살 건데 외로우니 누군가는 있어야겠고, 새로운 사람과는 또 똑같이 헤어질 거고 그래서 지난 만남 중에 이 사람이 제일 괜찮다고 생각이 되는 사람에게 매달리면서 절대 자신은 바뀌지 않고 상대방 보고 나에게 무조건 맞추라고 강요 섞인 괘변으로 설득을 할 거다. 여기에 세상 사람들 수만큼 있는 사랑관 중에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사랑관을 운운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당신은 당신이 맞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관계 깊이와 지속의 부재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공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니 다른 사람의 말이 맞다는 것에 대한 이해가 없다. 그래서 당신은 무조건 당신 마음대로 사는 방식에 대한 의심을 품지 않고 정당성을 강조하며 연애를 하려고 할 거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공교롭게도 지금 우리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돈이 많아도 타인과의 관계의 지속성이 부족하면 연애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삶의 목적인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심지어 우린 돈도 무제한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돈을 무제한적으로 가진 사람을 찾기 바쁘다.


그럼 연애를 포기하고 일을 해보자. 돈은 무제한이니 주식, 비트코인 같은 건 의미가 없다. 스타벅스 같은 회사를 차리는 것도 의미 없다. 내가 뛰어서 땀을 흘리는 일말 고는 돈이 무제한이니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작가가 되어서 유명해졌다고 해보자. 음악을 만들어서 유명해졌다고 생각해도 좋다. 허나 이것도 인스타그램과 다름이 없음에 식상하게 될 거다. 되려 다음 글이 어떤 글일지 궁금해하는 독자와 다음 노래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압박으로 다가와서 더 괴롭게 느껴질 수 있다.
평론가들은 어쩌다 글 하나, 곡 하나 잘 만든 작가로만 당신을 취급하고 악담을 늘어놓을 것이다. 심지어 대필이라는 의혹도 생겨나 사실처럼 퍼질 거다.


이건 인스타그램으로 어디 더 좋은 곳에 다음 더 좋은 옷은 뭘 입을지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불편감과 같은 것이지만 압박감은 더 클 거다. 창작의 고통을 주변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타인들에게 규정이 되는 순간 그것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심지어 관객들과 만나야 할 상황이 왔는데 더 이상 보여줄 게 없다면 사람이라는 존재가 곧 공포가 된다. 이러면 대필이 사실이든 아니든 진실로 규정이 되어버린다.


친구는 사귈 수 없는데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늘어가니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고 내 마음을 털어놓을 곳도 없다. 모르는 바텐더에게 속마음을 털어놨다고 해도 얼마 가지 못할 거다.


그러니 일도 나의 행복에는 방해만 될 뿐이다. 타인의 시선은 감옥이 되니 지옥처럼 느껴진다. 어제 '좋아요'를 눌러 준 사람들이 오늘은 나를 옥죄어 온다. '좋아요'가 취소가 도면 너무 괴롭다. '싫어요'가 늘어난 게 아닌데도 말이다. 타인이 지옥이 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이 지구를 80억 명이 공유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일단 SNS를 끊어본다. 연애는 여전히 못하니 안 하는 쪽으로 결정을 한다. 일은 재능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안 할 거다. 마르지 않는 통장이 있는데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냈을 테니 말이다. 되려 고통이다. 현재의 우리처럼.

이제부터는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방향으로 정한다.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차, 좋은 집 등등의 좋은 삶을 살고 있지만 타인과의 관계는 여전히 맺지 못한다. 그렇게 사니 결국 '나는 자연인이다'의 돈 많은 버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시의 편리한 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이다.


왠지 모르게 동네에서 자신만의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보다 못난 거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노력이라는 것이 돈이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하찮은 삶의 방식인 거 같지만 돈이 많은 사람들의 노력은 뭔가 삶에서 이루려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타인을 도우는 의사, 변호사, 판사와 삶의 질을 높여주거나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조각가, 화가, 건축가 등등의 사람들과 동급으로 살고 있지만 나는 그야말로 백수인 거다. 주변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도 좋은 삶을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고 할 때도 있지만 그건 어쩌면 비아냥이거나 그들의 고상함으로 인해서 에둘러 말하는 나에 대한 비난이다. 그걸 느끼든 안 느끼든 나의 공허함을 어쩔 수 없다.

* 동네에 이런 인물들만 산다면 일을 하지 않는 내가 초라한 인생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사진 출처 : 동아일보)



그래서 노력이 하찮은 삶의 방식인 사람들 동네로 이사를 갔다. 그러니 다들 나를 부러워한다. 하지만 동네의 인프라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전에 살던 동네와는 차이가 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를 부러워하는 존재로 보는 건 좋지만 내 삶이 좀 모자란 거 같다. 그래서 매일 차를 끌고 나가서 좋은 곳에서 하루를 보낸다. 허나 어김없이 돌아와야 하는 것도 현실이다.




돈과 육체만 있는 삶이란 이런 거다. 극단적이지만 지금 우리들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르다면 마르지 않는 돈이 없고, 친구가 있지만 그 친구는 아주 얕은 수준의 관계인 즉, 경조사 때 축의금 내주는 사이거나 인스타그램 '좋아요' 품앗이 관계일 뿐 모르는 사람이 아닌 정도 수준의 관계다. 대학까지 나와서 맺은 친구라는 존재의 90% 이상이 이런 관계다.

허나 우리는 마치 마르지 않는 돈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고 있고, 진정한 친구란 현실에서는 없다는 식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인스타그램적 친구들은 어떨 때는 지옥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 유인원들이 서로 털을 골라주는 거나, 인간들이 서로 좋아요를 눌러주는 거나 차이는 없다.



우리의 현실이 앞에서 쓴 극단적 이야기와 크게 차이가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극명한 차이가 있다면 가족이다. 진짜 가족은 있다. 아무리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해도 수준 이하*의 부모가 아닌 이상 가족의 의미는 크다.

*돈을 평생 벌지 않으면서 자신은 완벽한 인간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대하나 가족들은 통장으로 보며 마지막에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도망가는 인간류.



즉 우리에게는 가족이라는 뒷배경이 있기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통장이 없으면서 있는 듯 살 수 있고, 친구는 SNS적 친구만 있어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허나 현실은 통장은 마르고 부모님은 뇌쇄 하신다. 가족은 영원하지 않다. 내가 도움이 되는 존재로 전환이 되지 않는다면 젊어서 나의 힘이 되어준 부모님은 나의 짐이 되어버린다. 수학적 논리로는 0이라고 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0 이하인 고통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마르지 않는 통장 대신 평생의 직장을 가져야 하고, 그 직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변의 동료들이 있어야 하며, 직장 밖에서는 나의 지친 일주일에 대한 푸념을 받아주는 친구가 있어야 하고, 나도 그 푸념을 받아주는 아량도 있어야 하며, 그런 관계 속에서 자아를 만들어가고 그래서 연애라는 것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그 연애를 통해서 사람마다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미래에 어떤 현실로 다가올지를 상상해보며, 그에 맞는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을 가져보고,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은 물론이고 나와 맞는 사람을 찾음에 있어서 감정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를 파악하며,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과 현실이라는 조건의 상충이 가져오는 괴리감에 괴로워해 보고, 어쩌면 조건이 사랑일지 모른다는 현실적인 고민을 해보며, 조건과 사랑이라는 감정 사이에서 내가 잡아야 할 어디를 찾아서 균형을 잡아 나에게 맞는 사람을 찾는 방법을 우리는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사는 사회가 안정을 찾을 수 있고 내 삶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이런 보통의 과정이 행복을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단계다.


이 보통의 과정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니 사람들은 이 과정을 스킵하고 바로 연애로 돌입해서 인생을 해결하려고 하고, 그 관계가 깨지면 내 인생을 살아나갈 수 없으니 다시 전 애인을 찾아가 만나 달라고 하고 원하는 데로 되지 않으면 죽인다. 자신이 제대로 살 수 있는 관계를 만들지 못한 잘못을 전 애인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다. 살인으로 말이다. 이런 일이 이제는 한 두건이 아니다.
그러니 사회는 불안하다. 그래서 이제는 연애를 안 한다. 경재력이 달려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렇듯 사람 자체가 무서워서 안하는 것도 있다. 신원이 분명하지 않으면 안한다. 즉 가난*하면 일단 거르고 본다는 뜻이다.

*경제력이 부족함은 물론이고 감정이 너무 부족하면 그것 또한 가난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감정도 자산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부족하면 자신만 알게 되고 자신만 아는 사람들은 베풀지 못하며 돈이 많이도 약간의 손해도 감수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사람 이상이 된다.



가난을 거른다는 말이 거슬릴지 모른다면 구세대거나 가난한 사람일 거다. 요즘은 이런 가난을 거르는 건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고 잔인한 수준은 아니다. 내가 말한 보통의 초기 단계인 번듯한 직장 하나 가지고 있거나 성실한 삶을 살았다는 증거만 있으면 해소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을 거른다는 것은 지금 시대에는 현명한 선택이다. 가난의 블랙홀로 같이 빠져서 죽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실수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이혼은 아주 현명한 선택이다. 법은 빨리 이들의 손을 들어줘야 한다. 억지로 묶어서 함께 죽으라는 식의 삶을 강요하는 법은 폭력이지 법이 아니다.

국가가 혼자 사는 사람들을 다 책임지기 싫으니 가족에 대한 원론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우리에게 다 떠맞기려는 태도는 국가가 얼마나 개인에게 폭력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직장 생활의 억지스러운 인간관계의 스킵 과정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거나 그나마 학창 시절에 만난 친구와의 지속성 단절에도 영향을 준다. 가난*하면 새롭게 친구를 사귀거나 아는 친구도 지속하기 어렵다.

*여기서 가난은 앞에서 말한 직장이 없거나 성실이 증명되지 않아 감정이 분실되어 버린 사람을 뜻한다. (= 신분이 증명되지 않은 사람)




그러니 인생의 기초 단계를 스킵하지 말고 직장을 가져야 한다. 꿈이 뭔지도 모르면서 꿈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핑계로 집에 게임이나 하는 삶을 벗어던져야 한다. 직장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위안을 얻으며 살아갈 수 있다. 내가 증명되지 않은 사람을 피하듯 내가 증명되지 않으면 타인들도 친구들도 나를 피하기 때문이다.



직장 안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게 어렵더라도 그래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되면 어쩔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다고 미리 생각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다양성을 알 수 없고 직장 생활을 해도 자신만 아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직장 생활을 오래 할 수 없다. 어차피 오래 할 생각이 없다고 하지만 다른 직장들도 당신을 알게 되면 당신을 먼저 거부할 것이다.

이러면 연애가 안된다. 열 사람의 다양성을 겪어봐야 한 사람을 깊게 사귀는 연애가 가능하다. 그 사람 안에 열 사람의 감정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 다양한 감정을 다 이해할 수 있을 때 지속적 연애가 가능하고 두 사람 이상인 가족의 유지가 가능한 리더십을 만들 수 있다.



가장 위험한 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서 자신 내면의 다양성을 찾지 못해서 자신이 겪고 있는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그 감정을 느낌으로 인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친구들과 단절을 낳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못하게 만들며, 직장을 오래 다니지 못해 나중에는 다닐 직장도 없게 만들며, 연애를 하지 못하게 하고, 어쩌다 한 연애에 이별을 맞이하게 되면 죽이고 싶은 원초적 감정이 들어서 그걸 실행에 옮기게 되는 것이다.



직장은 단순히 돈을 버는 곳이 아니다. 그 돈으로 휴식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직장은 사람들이 모여서 오너가 요구하는 이윤 추구라는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함께 목표를 이뤄낼지를 고심하며 노력하는 대규모적 사회생활의 미니어처적 역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모르는 사람들과 이용하는 공공장소에서 법을 떠나 그 장소를 안정적으로 사용하고 내가 안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필할 수 있는 약간의 매너와 예의를 갖춘 존재라는 것을 알려, 서로 모르지만 같은 사회적 존재들과 공공장소에서도 그 혜택을 함께 안전하게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공장소가 지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계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시민이 된다는 것은 세계인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직장 생활부터다. 직장이야 말로 사람과의 관계의 시발점이며 월급 받는 곳 이상의 의미가 있는 장소이다. 그러니 가능하면 사람들과 부딪히는 직장, 조직적으로 일하는 직장을 얻어라. 개인적으로 일하는 직업은 그다음에 얻어도 좋다.


돈벌이를 위해서 하는 일은 사람 관계가 당연히 어렵다. 그러니 그 당연한 걸 배워라. 미리 짐작해서, 어쩌다 한 번 데었다고 해서 시작조차 하지 않으면 영원히 당신의 자아는 찾을 수 없다.
나라는 존재는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도 존재하고, 그 시선이 스스로 알고 있는 자아보다 더 정확할 때가 많다. 행여 잘못된 시선으로 나를 오판하는 타인의 사건도 있다. 그러면 그 시선이 오판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라. 그 증명이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들어서 자아는 더 견고해진다.


이런 기본적 과정을 거치고 혼자 일하는 것은 이미 새로운 관계를 얼마든지 맺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이고, 연애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다는 뜻이고 가족을 이뤄서 잘 이끌 수 있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그랬다. 비록 억지로 했지만 그랬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부모님이 있는 거다. 그 부모님들이 사이가 좋지 않게 보여도 행복하지 않은 거로 보여도 그래도 이런 기초적 단계를 억지로라도 지켜가며 가정을 만들었고 여러분들 키웠다. 그 억지스러움이 여러분들 눈에는 좋지 않게 보여도 때론 서툴게 보여도 그래도 결혼식 때 함께 할 수 있게 되고 명절 때 함께 할 수 있게 만든다.

둘 중 한 명만 기초단계를 스킵하면 편부모 상태에서 당신을 자라게 된다.


우리나라 이혼율은 30%에서 50%로 올랐다. 비공식적으로는 60%가 넘는다. 여기에 황혼 이혼을 더하면 70%가 이혼을 한다. 이제는 대다수가 편부모 밑에서 자란다. 억지로라도 함께하는 부모보다 행복한 한부모 상태가 나을 때도 있지만 마냥 그렇지는 않을 거다.

이제 사회는 더 분열화 된다. 행복한 한부모 타령을 할 시기가 아니다. 행복한 한부모도 좋은 친구들이 최소한 3명은 있어야 가능하다. 심지어 행복한 자아를 위해서 자식도 얼마든지 이용하는 시대가 됐다. 자식이 서울대 가는 건 과연 자식에게 좋은 걸까? 부모의 채면이 서기에 그런 걸까? 고학력자들이 부모를 원망하는 사례가 정신과 통계에서 나왔다. 이들의 말은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내가 선택해서 살아온 삶이 아니었다.'라는 것이다. 자식들에게 선택권조차 주지 않는 부모들이 탄생한 시대가 된 건 놀랍지도 않은 시대다. 그래서 자식들이 부모를 폭력적으로 대한다. 이런 건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 왜냐면 이들은 고학력 자녀를 둔 고상한 부모고 집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과 통계가 전부고 그것도 비밀리에 소문으로만 퍼진다.


인생을 스킵한 부모들은 자식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고 기본 단계를 스킵했기에 자아를 완성하지 못한 부모들은 사회의 질서와 본능에 의해서 결혼을 했지만 자신의 자아가 없기에 그 자아를 무의식적으로나마 자식을 통해서 이루려고 신체적 폭력을 쓰지 않는 정신적 폭력을 사용한다.

마치 국가가 한쪽이 죽을 짓을 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죽을 때까지 살아가라는 식으로 이혼을 거부하는 폭력을 쓰는 것과 같은 양상이다.



이 말은 국가도 이만큼 잘 살아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국민이야 어떻게 살던 못살았던 때 그대로 하자는 게으름을 피운다는 것이다. 국민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철학이 발전한 선진국은 어떻게 하는지 공부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러니 국가는 스스로 현시대에 맞는 철학관을 세우지는 않을 거다.


그러니 국가는 당신의 불행과 관련이 깊지 행복과는 그리 관련이 깊지 않다.
이건 국가가 타국의 도움으로 일어선 것에 대한 고마움을 갚지 않고 타국과 함께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개념을 배움을 스킵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시대의 자녀들이 괴로운 건 부모들이 배운다는 개념을 스킵하고 기초 단계를 경험하지 않고 살았고 심지어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기 하기 때문이다.


* 시골에서 키우는 강아지 모카가 새끼 4마리를 낳았다. 이런 강아지의 출산소식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니 가족을 만들어라. 가족은 핏줄 이상의 의미를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더 큰 가족을 만들어라. 그런 과정을 생각하고 사회 생활을 하다면 고통만큼 행복도 가질 수 있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힘을 짜내서 겁이 나더라도 용기를 내서 직장 생활을 하려고 해 봐라. 먹고살려면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대는 그런 용기가 저절로 났다. 그래서 그게 용기 인지도 모르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 당신의 부모들이 돈이 죽을 때까지 써도 남는다면 당신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결혼을 하지 마라. 당신의 배우자와 자녀들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이상하지 않으니 그래도 된다.

허나 그렇지 않다면 직장 생활을 해라. 용기라는 개념이 필요하다면 당신 부모님들이 좀 사니 그런 거다. 행복한 줄 알아라. 먹고사는 일을 한다는 것이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아니면 당신이 지식은 많은 고학력자인데 철이 없거나. 우리가 철이 없다,라고 부르는 나이는 대체로 초등학생 때다. 고학력 초등학생 나이(감정) 수준이 지금 대학생들이라고 생각하면 나라를 진짜 걱정해야 할 시기임에는 분명하다.



그렇게 20대를 직장 생활과 보내라. 자아를 찾기 위해서, 내가 남은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타인과의 감정을 교류하라. 그래서 상처받더라도 감수해라. 그건 당연하다. 그리고 반드시 당신도 타인에게 고통적 존재가 되고, 악인이 되며, 지옥이 된다. 다 같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깨달아라. 그래야 가정을 이루고 누군가와 함께 함에 있어서 감정에 돋아난 가시에 숨을 죽이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당신이 20대 때 배웠기 때문이다. 타인에게는 내가 고통적 존재고, 악인이었으며, 지옥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당신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을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대 때를 보내면 30대 초반을 보내고 이런 사실들을 깨달으면, 그때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녀와 함께, 간간히 나를 존중하는 친구들과 함께, 가끔 찾아뵙는 부모님들과 함께,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평생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과 함께 이 생을 함께 할 친절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의 10년의 불행함, 불편함, 감정적 괴로움, 정신적 고통을 생각과 함께 하고 여행과 함께 하면 그냥 지나치던 책의 어느 문구가 어느 날 와닿게 되고 그 문구를 가슴속에 되새기게 되며 그 문구가 내 삶의 일부가 되고 그 일부가 내 생에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타인을 이해하고 되고 그러면 당신은 친절함을 찾게 된다.

그러니 직장 생활을 겁내지 말고 해라. 직장은 당신을 평생 책임질 장소가 아닌 당신 인생의 친절함을 찾게 하는 거쳐가는 곳 단지 상처가 많은 곳일 뿐이다.


그 상처가 많은 곳에서의 경험이 타인과 함께 할 수 있는 절대적 무기인 친절함이 친구를 만들어 내가 벤츠를 모는 뿌듯함을 느끼게 하고, 베르사체 드레스가 어울리는 장소에 초대받을 수 있으며, 샤넬 가방을 들고 친구들과 브런치를 즐길 수 있게 되고, 새로 산 구찌 신발이 예쁘다는 말도 듣게 되고, 카르티에 팔찌가 당신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적들에게 자랑하는 건 한순간의 쾌락이지만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존중받는 즐거움은 영원하다. 그러니 적을 만들지 말고 친구를 만들어라. 친구를 만들러면 내가 먼저 친구가 되어주는 친절함부터 배워라.

행복은 혼자 사는 삶에 있지 않다. 타인과 함께 하는 삶에 녹아 있는 것이다. 타인은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다. 나를 완성해 가는 과정에 꼭 필요한 존재들이다.



타인의 시선이, 타인의 규정이 곧 나다.
오히려 그래서 더 피하고 싶은걸 다 안다. 하지만 평생 혼자 살 수 없다면 어쩌겠는가. 사회에 나가기 전 사회가 어색해서 실수하고 덤벙대는 내 모습이 타인에게 규정이 되는 것이 겁이 나서 인생의 기초 과정을 스킵하면 당신 인생에서 행복이 스킵된다.

다들 그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상처도 있지만 다들 그걸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40대쯤 되면 다 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고 살았다는 것을.. 나도 그들에게 악인이었고, 나도 그들에게 지옥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그렇게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 알고 보니 이런 삶이 비정상인 거 같지만 정상적인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마음의 죄를 안고 살아간다. 나도 상처받았다는 핑계를 대면서 피해보기도 하지만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러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그 무게를 견디면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와중에 친구들과 함께 하는 행복을 모른다면 어떻게 이런 삶을 지탱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런 불합리함을 경험하고 상처받고 방어한답시고 상처를 주며 살아가는 인생을 피하지 말라. 그 인생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자아를 만들었듯이 타인 또한 나로 인해서 자아를 만들어가면 살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럼으로써 우리는 일면식도 모르는 타인에게 친절함을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사회가 안정적으로 살아갈만한 곳이 되는 것이고 이런 과정이 범지구적이 되면 우리는 어떤 나라를 가더라도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는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과정들이 다 함께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갤럭시 노트 3 네오] 여기에서 과일 주스 2개를 시켰더니 3개를 주었다. 인종 차별도 겪었지만 친절함도 겪었다. 세상은 이런 과정의 연속이고 그로 인해서 누군가는 악해지기도 하겠지만 누군다는 더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건 여러분들의 선택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