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다는 것은 능동태다.
누가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지 않아서..라는 변명으로 일관하는 삶은 인생을 반밖에 살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2008년 5월 18일 최초 발행)
배운다는 것은 아주 넓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우린 그중 극히 일부의 개념만을 배웠다. 학교라는 곳에서의 지식만을 습득하는 단계 말이다.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미래가 보장되어 있게 보이는 대학이라는 문턱을 넘을 수 있게 해 주고 남들에게 조금은 유식하다는 의식을 심어주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래도 지식만이 세상을 사는 전부가 될 수가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지식 이외에도 덕이 있고, 인성, 사랑, 명예 같은 것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식 이외에는 우리에게 누구도 위와 같은 덕목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하물며 그런 기관도 없다. 그러기에 인성을 만드는 덕목들은 스스로 배워나가야 한다. 그래서 교육기관을 떠나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가르친다는 개념*보다 훨씬 더 어렵고 높은 개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르친다는 개념이 배우는 것보다 높다면 왜 우리는 학교에서 인성, 사랑, 명예를 배우지 못했는가? 가르친다는 것은 나보다 못한 사람 누구에게나 행할 수 있는 행위일 뿐이다.
세 사람이 걸어 감에 있어 그중 한 명은 나의 스승이 있으니 그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라고 했다. 우리는 여기까지만 아는 것 같다. 이 말의 뜻은 나보다 더 나은 존재를 찾아 무언가를 배우라는 뜻인데 이건 반만 배운다는 개념이다.
일단 그 나은 존재가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준다는 보장이 없다. 우린 늘 수동적으로 배우는 개념이 박혀 있어 누군가가 무언가를 정확히 지적하며 가르치지 않는 이상 배우는 걸 싫어한다. 더군다나 나에게 별 필요 없다고 여기면 좋은 말이다,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린다. 다시 말해 우린 스스로 배우는 능동적 배움의 형태를 배운 적이 없다.
이 이야기의 남은 부분은 또 다른 한 사람은 나보다 못할 수도 있으니 못한 면을 배우려 하지 말고 거울삼아서 나의 못한 면을 고치도록 하라는 얘기다. 이 말은 스스로의 자각 의미를 일깨워주는 말이다.
이건 우리에게 판단력이 있다는 뜻으로 배울 것과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배운다는 개념을 좀 더 능동적으로 할 수 있다는 의미를 더 강하게 내세운다. 그런데 왜 우린 나은 존재에게서만 무언가를 배우라는 개념만 배웠을까?
못살던 우리나라의 생활환경 덕에 출세한 사람의 동경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저렇게 되어야지 하는 것 말이다. 이게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난 잘못된 게 아니다, 라는 개념을 뛰어넘어 상당히 바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흔한 예를 들어보면, 매를 맞고 자란 아이가 스스로 생각한다. 난 커서 저런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라고 하지만 현실은 악순환의 연속이다. 그도 똑같은 상황을 맞이하면 매를 들 확률은 거의 80% 이상에이른다고 한다. 왜냐면 그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라고만 생각하지 좀 더 나은 존재를 보며 난 이런 상황이 되면 저 사람처럼 매를 들지 않고 대화를 유도해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고, 그럴 대상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식의 주입식 교육 덕분에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아서 못 배웠다고 세상을 탓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 나은 존재를 보며 그렇게 되려 배운다는 개념은 정말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낮이 중요하듯 밤도 중요하다. 모든 것은 양면성이 있고 둘 다 중요하다. 다만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것이 더 낫다기보다 자신의 위치와 입장에서 더 중요한 걸 선택하라고 할 때 우린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습성 때문에 우린 이것보다 저것이 중요하다고 선택을 하는 것이다.
아마 이런 습성 때문에 우린 세 사람이 걸어감에 있어 그중에 나은 존재를 찾아 나의 스승으로 삼으라는 말만 전해 들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뭐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 따질 이유가 없다. 둘 다 중요하다! 둘 다 배워도 된다. 나보다 좋지 않은 존재를 보며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 생각을 하고 나보다 나은 존재를 보며 저렇게 돼야지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나은 교육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배운다는 것이 누군가가 우리에게 특정 교육기관에서 좀 더 아는 존재가 특정 부분만을 가르쳐서 배운다는 수동적인 개념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나의 의식 깨어있고, 배우려는 의지만 있으면 세상에 모든 것이 배움의 터가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상원으로 재직하던 중 대통령 출마를 앞두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구두를 맞추러 구두방에 들렀는데 구두 수선공이 물었다. "어떤 색깔이 좋겠냐고" 그는 어느 색으로 할지 결정을 못했다. 그래서 구두 수선공은 갈색과 검은색의 의미를 조금 설명을 해줬고 그는 갈색을 선택했다.
그리고 구두코 모양을 어떻게 할지 물었다. "둥글게 할 것인가 아니면 뾰족하게 할 것인가?" 그는 귀찮은 모양인지 그냥 알아서 해달라고 했다. 구두 수선공은 알았다며 일주일 후에 찾으러 오라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의 구두 모양은 한쪽은 뾰족한 모양이고 한쪽은 둥근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구두 수선공은 자신의 구두 모양도 제대로 결정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랏일을 하겠다며 되려 한마디 했단다.
그 뒤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고 가슴속에 이 일을 새기고 산다고 했다.」
배움이란 도처에 널려있다.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 스스로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그로 인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배움이란 능동적인 것이다.
무언가를 보며 배울 수도 있고, 배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쳐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나보다 못한 존재를 보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이 가르친다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높은 의식의 수준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가르쳐 성장시킬 수 없다. 스스로 배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깨달은 자만 있을 뿐이다.
배움이란 높은 의식을 갖고,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높은 덕목 중 하나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난 아직도 배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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