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 경험론/인생

부조리한 법을 생각없이 기필코 지켜내는 A.I.

_교문 밖 사색가 2022. 5. 4. 16:30

부조리한 법을 생각없이 기필코 지켜내는 A.I.

 

 

A.I.가 인간처럼 생각하는 것을 걱정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A.I.처럼 생각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팀 쿡-

 

 

 

차로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안전 때문이다. 너무 명백해서 더 말할 것도 없다. 근데 차로를 지키면 되려 위험한 경우도 있다.

내가 몰고 있는 차는 '픽업트럭'이다. SUV처럼 보이는 트럭인데 법률상 고속도로에서는 3,4차로에 달려야 한다.

 

 

 

 

하지만 난 그렇게 달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3,4차로는 거의 덤프트럭이나 컨테이너 트럭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여기에 상대적으로 작은 차인 픽업트럭이 달리면 그 트럭은 아주 위험해질 수 있다.

 

트럭이 3,4차로로 달리는 이유는 덤프트럭이 싣고 달리는 큰 돌이나 컨테이너 트럭에 락이 풀려서 컨테이너가 도로에 떨어지는 경우 주변에 상대적으로 작은차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잃기 쉬운 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아울러 큰 트럭들은 앞에 달리는 작은 차를 인지하지 못하고 달려서 충돌은 양반이고 깔아뭉개버리는 일도 있다.

 

그러니 고속도로에서는 큰 트럭들을 특정 차선만 이용하게 만들어서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려고 하는것이다.

 

 

말 그대로 목적은 '안전'이다.

 

그런데 같은 트럭이라도 1톤 트럭을 3,4차로로 달리라고 하는 건 안전이라는 목적에 맞지 않는 처사다. 물론 그 트럭이 짐을 싣고 있어서 그 짐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3,4차로로 달려야 할 것이다. 허나 만약 짐이 없다면 어떤가? 마력만 충분하다면 그냥 1,2차로로 안전하게 달려도 무방하지 않은가!?

 

심지어 픽업트럭은 카니발과 크기도 비슷하다. 짐이 없는 작은 트럭은 1,2차로로 달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난 1,2차로로 달린다.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의 막판 치열하게 세금을 걷어들여서 한몫 챙기려는 손아귀에 난 걸리고 말았다. 지정차로 위반이라는 딱지를 끊기고 말았다.

 

크기가 비슷한 승합차인 카니발은 1,2차로를 운행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교통순경은 아무 말 없이 딱지를 끊고는 사인하라고 했다. '난 SUV라고 생각해서 차선을 잘못 탔다고 했다.' 이건 내가 그 교통순경에게 기회를 준 말이었다.

고작 4만 원에 애써 해명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법에 걸린 것은 너무 분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법이 잘못된 법이라는 것에 대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글에 핵심은 왜 교통순경은 나에게 딱지를 끊었는가?라는 의문이다.

 

높으신 양반이 법을 만들 때는 원래 이런 세세한 조항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트럭은 고속도로에서 3,4차로에서만 주행을 해야 한다. 1,2차로 주행은 하지 못한다.라는 법을 만들 때 단, '짐이 없는 1톤 트럭은 2차로 주행이 가능하다.'라는 예외성은 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런 조항도 세세히 볼 줄 아는 사람이 높은 곳에 가면 좋겠지만 사람은 모든 상황을 직간접적인 경험으로 다 알 수 없기에 그리고 다른 일도 많은 상태에서 이런 세부적 조항은 만들기 어렵다.

 

다시 말해서 대통령이 픽업트럭을 타고 캠핑을 해봤겠는가? 국토교통부 장관이 픽업 트럭을 타고 시골에 왔다 갔다 하면서 농사일을 도와봤겠는가? 경찰청장이 이런저런 차종을 다 타보고 고속도로를 달려보면서 부조리한 면을 다 파악해봤겠는가?라는 생각을 해보면 아니라는 답은 너무 뻔하다.

 

그러니 우린 이런 법의 부조리함은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한다.

인간이 너무 많아지고 삶에 방식도 그만큼 다양해지면서 인구는 도시에 몰리니 다양한 법들이 존재하기에 모든 상황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까지 우리가 다 바랄 수는 없는 것이다.

 

허나 수정은 가능하다. 시대가 달라지고 국민의 생활 방식이 바뀌면 부조리한 법들은 수정을 해야 한다.

 

이런 경우 우리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하지만 높으신 양반들에게 우리 목소리가 닿을 리가 없다. 그러니 이런 부조리함을 위에 알려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지금의 경우는 바로 교통순경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

 

 

내가 SUV라고 착각을 하고 달렸다고 한 것은 교통순경의 의식과 상식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을 해보려고 건넨 말이었다.

 

 

즉, 평소에 이 교통순경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나에 말에 반응해서 훈방 조치만 하고 끝냈을 것이다. 이 교통순경은 자신이 현장에서 뛰어보니 이런 부조리함은 있고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니 나의 운전 경력을 찾아보고 25년 동안 신호위반, 속도위반 사항이 없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 교통순경 선에서 훈방조치로 넘어가고 법이 그러하니 3,4차로로 운행하라는 경고만 했을 것이다.

 

허나 이 교통순경은 나에게 딱지를 끊고 나와 같은 차종은 1,2차로 주행이 안된다는 친절한 멘트와 함께 자리로 돌아갔다. 아마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는 착한 사람일 것이다.

착하다는 것은 시키는 대로만 하는 사람이니까.*

*비슷하게 바라보는 개념인 올바른 사람은 목적을 설정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존중하면서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이 둘의 차이는 엄청나다.

 

 

* 교통순경

왜 이들은 시키는대로만 살까?

사실 이들은 현장에서 일을 하니 나와 같은 부조리함을 간접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자신들도 도로 사정을 보면서 마력이 강하면서 짐이 없는 1톤 정도의 트럭들은 1,2차로로 다녀야 한다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어야 하고 있을 거라고 본다.

 

그럼 이들은 이런 부조리함을 윗선에 보고 해서 이런 경우는 법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알려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날 내가 지정차로 위반에 대한 훈방 조치가 아닌 딱지를 끊을 것을 보면 아마 교통순경임에도 불구하고 교통법의 부조리함을 인지하지 못할 거라고 유추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한 명으로 교통순경 단체를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는 그렇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건국이 70년이 넘은 상태에서 아직도 이런 간단한 부조리함이 존재한다는 것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만하다.

 

굳이 따지자면 몇몇 교통순경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 몇몇으로는 법이 수정되는 일은 없었으니 나의 시각에서는 그 몇몇을 의식해서 이 글을 쓸 명분이 되지 않는다.

 

쉽게 생각해서 더러운 수건이 5장이 있다. 나는 그 수건을 새것으로 바꾸기 위해서 한 달에 한 장씩 새 수건으로 교체를 했다. 그럼 5달 뒤에 모두 새수건으로 바뀔까? 아닐 거다. 결국 4장의 더러운 수건으로 인해서 한 장의 새 수건은 더러워질 것이니 결국 5달 뒤에도 수건은 더러워진 상태로 있다는 것이다.

 

법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있으나 소수의 몇몇은 그들 개인적으로는 전체와 다른 사람일지 모르겠지만 멀리서 전체를 보면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정도의 소수일 뿐이다.

 

그리고 픽업트럭을 몰고 다니는 나 또한 고속도로에서는 굳이 법을 수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의미 없는 소수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고속도로에서 그런 부조리함을 당하는 것이다.

 

그럼 픽업트럭을 만드는 회사 측은 어떤가? 국토부에 쌍용 스포츠 픽업트럭은 최소한 2차로에는 짐을 싣지 않으면 달려도 된다는 안건을 한번 넣어볼 수 있지 않겠는가? 3,4차로보다는 훨씬 안전한 도로니까.

허나 이런 기업은 이윤추구가 목적이기에 2차로에 달릴 수 있다고 해도 의미 있는 이윤이 생기지 않으면 굳이 이런 일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회사 측에서 이런 건의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인 것이다.

 

인간(강자)은 마땅한 도리를 실천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이득이 돌아와야 하거나 아주 큰 문제가 인지될 때만이 움직이는 이기적 존재라는 것을 약자들은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왜냐면 약자도 강자가 되면 똑같이 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1. 픽업트럭을 타고 다니지 않는다.

- 이 차는 시골에서 사용하는 차인데, 12월부터 길면 8월까지는 사용하는 사람이 없기에 내가 몰아야 하고 시골에 왔다 갔다 하면서 농사일을 도와야 하기에 타야 한다.

단 내가 차를 다시 구입하면 픽업트럭은 사지 않을 것이다.

 

2. 국도로만 다닌다.

- 고속도로를 이용해 1차선을 이용하지 못하기에 제한속도를 다 준수하면 2시간 30분 걸린다. 아마 국도를 이용하면 신호까지 다 감안해서 4시간 걸릴 거다. 심지어 차를 2시간 이상 타면 피로함으로 인해서 인지 판단 능력이 떨어져서 경험상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럼 더 쉬어가야 하는데 그럼 시간이 더 걸린다.

 

3. 개의치 않고 계속 1,2차로를 이용한다.

- 어차피 트럭에 대한 세금 혜택이 있으니 그 혜택을 벌금으로 낸다고 생각하고 다니는 거다. 심지어 내 목숨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허나 이차는 내차가 아니기에 내가 세금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딱지가 끊기면 기분이 너무 더럽다. 특히 부조리한 법에 대한 통제를 받고 있다는 분노심이 생겨버린다. 부가적으로 벌점이 누적된다.

 

 

하나같이 다 부질없는 해결책이다. 약자이자 소수는 이런 대접밖에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상담 프로그램을 한 이유는 바로 이런 약자이자 소수집단은 어쩔 수 없으니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큰 주제가 있었다.

 

즉 소수는 약자이니 강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고 강자 집단에서는 최소한 부조리한 대접으로 억화심정이 생기는 일은 없어서 삶의 질이 특히 감정적으로 손해 볼 건 없는 삶을 살아서 훨씬 쾌적한 삶을 살 수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꾸 법이 잘못되었고, 규칙이 잘못되었고, 뭔지 모르지만 잘못된 것에 대한 탓만 하면서 자신은 변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건 소수집단에 있는 약자의 변명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난 이 차를 몰고 다니는 한 그리고 농사일을 돕는 기간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앞에 3가지 방법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도와줄 경찰도 없다. 심지어 경찰이 부조리한 법의 편에 서서 정의의 이름으로 나를 감시한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기간은 그 부조리함을 견디고 이 시간이 끝날 때를 예상하고 그 시기를 기다리며, 그 기다리는 동안 돈을 열심히 모아서 좋은 세단을 구입해서 몰고 다니는 것이 고속도로의 부조리한 법을 벗어나는 방법인 것이다.

 

허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방법에 대한 것을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법이 바뀌어야 한다. 규칙이 바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더 강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원망만 한다. 이 원망이 짙어지면 복수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복수라는 행위는 약자들이 계속 약자로 남아서 살기를 원하는 게으름의 산물일 뿐이다.

 

최고의 복수는 내가 강자가 되어서 억울함 위에 서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원망의 대상을 잊는다. 왜냐면 인간은 강자일 경우 약자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단하지 않나? 자기 자식 그렇게 입학시켜서 떨어진 사람의 고충은 전혀 안전에 없는 건 당연하고 입학 취소가 되니 더 윤 당선인에게 대한 억울함을 하소연하듯 하는 말은 자신이 마치 약자인냥 하는 태도는 결국 강자는 약자를 인지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예로 봐도 무방해 보인다.

 

 

내가 부조리함을 느끼는 이유는 대한민국에서 픽업트럭을 타는 소수자고 소수자는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실 최고의 복수는 내가 국토교통부 장관이 되어서 이 법을 수정하는 것이 제일일 것이다. 근데 고작 이 정도의 부조리함으로 되지도 못할 국토교통부 장관이 되려고 하는 것보다는 앞선 방법이 내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만족도가 더 높다.

 

만약 내 가족 중에 이런 부조리함으로 트럭에 깔려 죽었거나 한다면 법을 공부해서 강자가 되는 것은 동기부여도 있고, 의미도 있고, 최고의 복수도 되는 것일 것이다.

 

이소은은 유퀴즈에서 법을 공부한 이유가 아버지가 부조리함에 당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 알베르 카뮈는 반항하는 삶을 살라고 했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함을 살아가는 방법 3가지가 있다고 했다. 자살과 희망 그리고 반항하는 삶이다.

허나 여기에서 반항하는 방법은 내가 법을 무시하고 1,2차선을 이용하라는 말이 아니라. 법이 그러하니 그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라는 말이다.

 

처음부터 얘기를 하지자면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가 바위를 끊임없이 계속 올려야 하는 삶이라는 부조리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대한 답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자살, 희망, 반항 이 세가 방법이고 자살과 희망은 좋지 못하니 끊임없이 계속 바위를 올리는 것을 명한 신은 시지프스가 괴로워하길 바란 것이니 그것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기뻐하면서 바위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경우를 대입하면 3번처럼 사는 것이 방법인 것처럼 보이는 단어지만 실은 2번처럼 하면서 이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안전하다고 강제적인 생각을 주입해서 그냥 시키는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 허나 고속도로에서 법대로 한다고 해서 사고가 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나의 경우는 되려 위험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건 인간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조리함에 통제된 삶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 함께 살아갈 규칙 아래에서는 최소한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DNA에 의해 통제된 삶을 살아가는 동물과 다른 점이고 프로그램대로만 하는 A.I. 와는 다른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앞선 질문 왜 그 교통순경은 시키는 대로만 할까? 라는 답이 나온거 같다.

그 교통순경은 시키는대로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착각)을 하고 살기 때문이다.*

* 이건 알베르 카뮈가 말한 해결책 중에서 희망에 속한다. 

 

교통순경은 학교에서 시키는대로만 하면 된다는 프로그램을 입력받아서 그러면 잘 살 수 있다는 거짓된 교육 이외의 어떠한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교육의 피해자인 것이고, 그로 인해서 대한민국 교통법은 충분히 수정이 되어서 누구도 다치지 않고 되려 소수자도 더 안전한 운전을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어서 이런 부조리함으로 누군가가 덤프트럭에서 흘러내린 바위에 깔려 죽어서 그 가족은 가슴에 피멍이 드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교통순경들이 이런 교육의 피해를 받지 않고 깨어있다면 나와 같은 생각으로 교통법규에 대한 부조리한 면을 찾아내서 다 함께 의논을 해서 합의가 됐다면 상부에 보고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대한민국은 고속도로에서 더 안전하고 쾌적한 운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알베르 카뮈식으로 생각을 하자면 결국 우리나라 교육은 거짓된 희망을 심어줘서 우리를 강자가 시키는 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프로그램대로 살게 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진짜 그렇게 되고 있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이제는 꽤 살만한 직업으로 인지가 되고 있고 그로 인해서 인기 직종이자 배우자감으로 1위를 찍은 적도 있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고등교육으로 배출된 사람들이 선생님이라는 존재를 넘어선 사람이 얼마 되지 못하니 결국 대한민국이 이런 위기를 겪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사명감으로 하는 존중받아야 할 대상일 뿐, 직업군에서 먹고 살아갈만한 상위에 속했다는 건 고작 74년밖에 되지 않은 대한민국이 후퇴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학교에서 배출된 사람들은 학교를 뛰어넘어야 하는데 학교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교육 아래에서 지배당하고 있고 그것도 모자라 어디에 속하든 학교 방식인 시키는 대로 하고 시키는 것만 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그 교통순경은 어찌 보면 서민들을 도와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부조리한 법을 어기는 합리적인 같은 서민을 잡아서 딱지나 끊으면서 자신은 할 일을 했다고 생각을 하면서 일 열심히 했다고 스스로를 뿌듯해 할 수도 있고, 딱지를 끊고서 돌아가 왜 사람들이 (부조리한) 법을 위반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부조리한 법에 대한 인지를 하지 못한 채 정말 그야말로 강자가 시키는 대로 강자가 만든 법을 시행하면서 같은 서민들을 괴롭히는 악성 코드 같은 존재가 된 것일 것이다.

 

조금만 생각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부조리한 법은 무시하거나 어쩔 수 없이 잡아서는 훈방 조치만 해도 될 텐데 말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위에서 알아서 해결해줘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허나 앞에서 말했듯이 강자는 약자를 모른다. 인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심지어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더 모르고 당연하다. 이 얘길 강조하는 이유는 나도 그렇고 당신들도 강자가 되면 그럴 거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해결이 되면 좋겠지만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걸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더 현명하고 현실적이고 이득적인 자세다.

 

그러니 이런 현실 속에서 같은 약자 중에서도 그래도 강자와 연결점이 있는 사람들이 뭉쳐서 부조리함을 해결해주려고 해야 하는 것이고 해결이 안 되면 적당한 조치를 취해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A.I. 와 다른 인간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는 '어차피 죽을 삶'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한 대문호이다.

 

 

* 교통순경이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어야 한다.

 

위에서 모르고 만들어 놓은 부조리한 법을 애써 카메라로 잡아서 벌금 통지서를 보내는 것이 아닌 교통순경을 배치해서 잡으라고 하는 것은 교통 카메라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는 뜻이라고 봐야 한다.

 

왜냐면 교통순경은 사람이니까! A.I. 가 아니니까! 교통 카메라가 아니니까!

 

그래서 사람처럼 생각해서 법의 부조리한 면을 보고서는 현장에 맞는 질서를 잡으라고 사람을 배치했는데 A.I.처럼 프로그램 그대로 실행하는 그 교통순경은 과연 무엇인가? 아니면 누구인가?라고 물어야 하나? 아님 무슨 일을 하는가?라고 해야 하나? 혹은 강자의 힘을 대표하는 법이라는 제도를 뒤에 업고 약자를 감시하는 강자 인척 할 수 있는 약자일 뿐인가?

 

이렇든 저렇든 결국에는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이런 약자들이 자각을 해서 다 같은 생각을 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건 다 시키는 대로 살라고 하는 교육이 바탕이 되어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선생님이 사회생활을 하는 교무실 분위기부터 인간들이 살만한 이상적인 분위기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즉 이 모든 원인이 되는 곳은 바로 교무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근본이 바뀌지 않는데 어떻게 교육이 바뀌겠는가? 형식 좀 바뀌었다고 해서 시키는 대로 하라는 방식이 바뀌겠는가?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보면 결국 우리의 삶은 부조리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강자가 되어서 세상의 질서를 만들려고 한다고 상상해보라. 어떻게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 다 정밀하게 누구도 손해 볼 수 없는 규칙과 법을 만들 수 있겠는가? 안될 거라는 답은 아주 간단히 나올 거다. 

심지어 강자가 되면 약자를 인지하지 못한다. 이러니 부조리함은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일부다. 이걸 받아들여라.

 

그러니 우린 이런 부조리한 삶에서 최대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약자로 남아서 부조리함에 남아 있으면서 윗사람들 보고 어떻게든 구해달라는 식의 태도는 우리의 삶을 전혀 바꿀 수 없다.

 

물론 내가 윗물에서 노는 사람이면 정치인들이나 힘 있는 자들을 꾸짖는 글을 쓸 것이다. 허나 나도 약자인데 무슨, 더군다나 내가 강자여도 여기에 그런 글 하나 쓴다고 강자들이 이 세상을 약자들을 위해서 얼마나 신경을 써주겠나 명망 높은 대학교수들이 유튜브에 나와서 한소리 해도 의미 없는 울림으로 끝나는데 말이다.

결국은 세상은 약자들에게 부조리함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걸 받아들여라.

 

그러니 우리가 이런 부조리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목표를 잡아라. 그게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목표를 잡아라. 그래야 움직이고 성장하고 발전해서 조금이라도 부조리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약자는 간단하다. 낮은 목표를 잡아서 그걸 이루고 그 월급에 만족하며 연금 나오니 퇴직해도 먹고살 수 있다는 조그만 기쁨을 안은 채로 살아가니 약자가 되는 거다. 그리고 약자의 삶이 지속 가능한 약자는 더 약한 약자를 괴롭힌다.

고속도로에서는 나와 같은 특별 차종을 모는 소수자를, 학교에서는 공부를 왜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나 같은 소수자를, 회사에서는 더 나은 인간관계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나같은 소수자를 괴롭혔듯이 말이다.*

* 경찰, 선생님, 직장동료들은 우리가 함께 잘 어우러져 살아가야 할 존재들인데, 보라. 약자로써 지속 가능한 삶을 사는 이 약자들은 조금이라도 강자 인척 하려고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소수 약한 집단이라고 인지를 해서 괴롭히지 않는가? 부조리한 법이라도 지키는 것이 강자쪽에 달라붙어서 약자들에게 강자인척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강자가 되면 약자를 인지하지 못하는 일은 약자일 때부터 예정된 상태인 것이다. 그러니 세상은 부조리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약자는 같은 약자를 괴롭혀서 상대적 강자가 되려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 진짜 강자가 되려는 것이 아닌 상대방을 괴롭히고 낮춰서 상대적 강자의 느낌을 받으려는 것이다. 이런 유영들이 진짜 강자를 만나면 아부와 아첨을 커피 마시듯이 한다.

 

 

나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낮은 위치에서 삶을 영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거라는 생각으로 마치 세상이 우리 편으로 돌아설 거라는 희망을 품는 그런 약자를 싫어한다. 그런 세상은 전쟁 말고는 오지 않는다. 그럼 전쟁 나길 바란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전쟁만큼 사람들의 지위가 수평적으로 이뤄지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전쟁만큼 평등을 만드는 부조리함은 없을거다. 출처 : https://www.topstar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4684695

 

 

그러니 진짜 강자가 되어야 한다. 강자는 움직인다. 세상의 변화에 맞춰야 하기에 강자는 움직인다. 높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공자와 일론 머스크 같은 이상적 목표면 더 좋다. 못 이뤄도 상관없다. 움직이면 지금 여기는 벗어나니까. 머물면 부조리함에 갇히게 된다.

그러니 높은 목표를 가지고 움직여라. 세상을 이성적으로 바라보고 파악하라. 그리고 나에게 맞는 곳을 찾아가라. 그리고 그곳에서 시간을 활용하라. 

 

개인이 세상의 부조리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강자들이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바꿔줄 거라고 착각(기대) 하지 마라. 강자들이 세상을 공정하게 만들어 줄거라고 착각(기대)하지 마라. 계속 말하지만 결국 여러분들도 강자가 되면 지금과 다를 게 없는 세상을 만들 수밖에 없을 테니까.

 

교통법의 목적은 도로에서의 안전이다. 그리고 짐이 없는 픽업트럭은 안전하지 못하는 주행을 해야 하는 부조리한 법에 저촉을 받는다. 법을 수정하는 복잡한 과정을 생략하면서 이런 부조리함을 완화시켜주는 존재가 바로 교통순경이어야 한다. 심지어 교통순경은 그런 조치를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부조리함을 알릴 수 있는 권력과도 닿아있다.

 

허나 이들은 그러지 않는다.

이번 나의 경험은 '팀 쿡'이 걱정하라는 인간이 점점 A.I. 화 되어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한다.

 

성소수자는 약자 집단이다. 그리고 팀 쿡도 성소수자다. 허나 팀 쿡은 강자. 그래서 그는 약한 성소수자보다 강하게 버틸 수 있다. 만약 애플 CEO가 아니라면 어땠을까? 그러니 우린 강자가 되어야 한다. 사진 출처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00949#home

 

약자들은 깨어나야 한다. 인간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서로 뭉쳐서 강자들을 대적하는 집단을 형성할 수 있다. 그건 약자도 강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 약자들은 서로 뿔뿔이 흩어져서 약자로 살면서 더 약한 약자들 찾아서 괴롭히는 부조리함을 행하고 있으면서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강자들이 만들어 놓은 법과 규칙에 붙어서 말이다. 그러면서 상대적 강자 느낌을 받으면서 좋아하고 뿌듯해해 하면서 자신들이 같은 약자의 집단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있듯이 약자의 적은 결국 약자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아마 강자들이 바라는 약자의 세상일 것이다. 그래야 감히 자신들에게 대적하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난 이런 강자의 계략에 교육이 바뀌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안 그러면 왜 우수한 교육 방식을 수입해서 바뀌려고 하지 않겠는가? 형식만 바꾸면서 근본을 바꾸지 않고 있는 지금의 우리나라 상황은 내가 이렇게 생각하기에 충분한 시대라고 봐진다.

 

결국 현시대의 강자들은 이 세상이 자기들 마음대로 통제에서 벗어난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이지 더 나은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 좋은 머리로 이런 세상을 만드는 것만이 최선이겠는가?

 

그러니 우린 이걸 받아들이고 인정해서 여기에 맞는 나의 삶의 형태를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면 약자라고 해서 우리가 A.I.라는 뜻은 아니니까!

 

 

[쿨픽스 P900] 비판없이 시키는대로 따라만하고 의미를 모른체 DNA 시키는대로 살아가는 존재는 서로 같은 상태일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iv9IdOOIH0

차다리 A.I.가 나을지도 모르는 교통 순경의 만행

 

https://www.youtube.com/shorts/JJjTY_-QduA

 

 

https://www.youtube.com/shorts/uL0qA4Rb6eE

 

https://www.youtube.com/shorts/YdO-6nFBV_Q

 

https://www.youtube.com/shorts/BjtSjOv-nys

 

 

https://www.youtube.com/watch?v=Ymu1CcN4mGo

이 영상으로 미국 교통문화와 비교해보면 좋을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iFsBkjIZ5ss

 

https://www.youtube.com/watch?v=jVc8vB2ox0Q

이런 생각은 할 수 있다고 본다. 결혼은 돈이 중요하니까. 허나 선생님 정도의 직업에서 이정도의 조건을 공개적으로 내세우는건 억압된 교육방식으로 인해 선생님 수준을 넘어선 인재가 없어졌다는 반증이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학교 선생님의 직업이 아주 좋은 직업으로 부상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사회가 퇴보하고 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