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 없는 악플러들은 살인을 하는 현시대의 좀비다.
이미 인터넷 세상은 좀비로 가득한 세상이다. 심지어 인터넷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는 좀비는 현실로 기어 나와 살인을 한다.
요즘은 좀비 영화 드라마가 한창이다. 그것도 K 좀비가 단연 우세종으로 자리를 잡아서 넷플릭스에서 활약을 하고 있다.
'지우학'에서는 좀비 면역자들이 나온다 바로 타인과의 감정적 연결고리가 끊어져 고립된 사람들이다. 허나 타인과 교류를 하는 사람들을 좀비에게 물려버리면 좀비가 되어 살아 있는 사람들을 물어뜯는다.
난 이런 현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이 현실 세계에서도 존재한다고 오래전부터 바라보고 있다. 바로 인터넷 세상에서 말이다. 댓글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어떻게든 악플로 사람들을 물어뜯어 죽이려고 하고 실제로 죽이기도 했다.
내가 이런 현상을 인지 한 건 '이혜련'이라는 연예인의 자살 사건(2007)부터다. 연기를 하다가 유니라고 개명을 해서 가수로 전향을 했는데 어느 날 자살을 했다. 댓글 때문이었다.
내 기준으로 가장 큰 무기로 사용된 악플이 혼자서 춤추고 난리라는 댓글*이었다.
* 난 댓글을 잘 보지 않아서 당시 같이 일하는 동료가 보고 찾아본 댓글이었다.
당시 백댄서가 있었지만 행사장에서 혼자 춤추는 영상으로 편집을 해서 연기자로서도 실패하고 가수로써도 초라한 모습으로 혼자서 춤이나 추는 연예인으로 사람들에게 인지를 시켰다. 물론 이 글 하나로 인해서 자살을 한건 아니었을 거다. 수많은 이빨(악플)들이 이혜련을 물어뜯었을 거니까.
https://blog.naver.com/kmlink/221689997305
난 이 사건이 충격이었다. 댓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했기 때문이다. 같이 기사를 본 동료와도 이런 대화를 했었다.
문제는 댓글을 단 사람들은 지금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잊고 살아갈 것이다. 자신의 악플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말이다.
두 번째 사건은 엄태웅 부인의 유산 사건이다.
엄태웅이 불법 마사지 업소를 찾아간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켜서 사과를 하고, 그 부인이 용서를 하고 함께 하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악플러들은 가타부타 악플을 달아서 엄태웅 부인은 스트레스로 인해서 유산을 했다.
남에 부부 생활까지 간섭하면서 대리 만족을 하려고 하는 '댓글 부대' 혹은 '키보드 워리어'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른 채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을 죽였다.
이혜련 자살 사건이 악플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인지의 시작이라면, 엄태웅 부인의 유산 사건은 악플이 사회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로 활용될 수 있다는 위험을 직감한 시작이었다.
https://www.tvreport.co.kr/941264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악플로 사람들을 죽인 사건들을 열거해서 보면 과연 이들이 인터넷상의 좀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들에 대한 처벌은 없다시피 하니 이들은 진짜 좀비처럼 불사의 존재까지 되어가고 있다.
이 말은 인터넷에서는 버젓이 사람을 죽여놓고 현실에서는 선한 얼굴로 사람들을 만나서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면서 보통 사람들처럼 웃고 울고 하면서 살아간다는 얘기다.
이러니 댓글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강제로라도 인터넷에서 찾아서 처벌을 하지 않으면 이들을 현실 세계에서 찾기란 불가능하다.
댓글로 사람을 죽인 사람들을 다 찾아보면 얼마나 될까? 굵직한 여초 커뮤니티 사람들만 해도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한 50~100만 명쯤은 무리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린 지금 삶 속에서 거리를 걸으며 살인이 보편화되어 있는 살인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 누군가는 자신의 아들 딸들이 살인을 저지른 걸 모르며 함께 저녁을 먹고, TV를 보며 살아가도 있을 것이다.
악플 하나 적었다고 살인자냐?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칼 한 방 먹여서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하자. 그리고 사람은 무조건 칼에 10방을 찔려야 죽는다고 하자. 그리고 사람을 칼로 찌르는 줄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럼 10번째 사람만 살인자가 되는 건가? 앞선 9명의 사람들은 그냥 칼 한 방 찌른 사람일 뿐인가?
◆ 좀비
좀비를 규정을 하자면 ①움직임이 있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 ②소리에 민감하며 본능적인 행동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찾아서 물어뜯는 행위를 하는 존재, ③좀비끼리는 서로 영향을 주거나 받지도 않는 상태의 존재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① 움직임이 있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
난 개인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80%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대체로 삶을 배운 대로 그냥 살아간다. 먹고 살아갈 집이 필요하니 직장을 구하려고 하고, 적당히 친한 사람들과 즐거운 대화를 하지만 딱히 의미 있는 대화는 없는 상태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허나 이들은 교육으로 인해서 사람을 해하면 안 된다는 원칙이 무의식 속에 자리를 잡아서 헐뜯는 얘기도 잘하지 않으려고 한다. 스스로가 그런 상황에 휘말리는 것도 싫어하고, 여차해서 그 피해를 받는 것도 두려워하는 겁쟁이스러운 감정으로 피하는 것도 있다.
기껏해야 직장 같은 곳에서 직접적인 피해를 겪어야 뒤에서 험담을 하는 정도 수준이고 친한 동료나 친구가 당하면 호응을 해주는 정도에서 끝맺음을 한다.
② 본능적인 행동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찾아서 물어뜯는 행위를 하는 존재
허나 이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참다 참다, 억울함을 갖게 되면* 바로 좀비 증상의 대표적인 상태에 이른다. 인터넷에서 바로 살아 있는 사람을 물어뜯는 행위를 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좀비에게 물린 상태와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직장 상사나 모임 속에서 권력이 있는 친구나 동료들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고 이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 없으니 상처받고 말 못 하며 억지웃음으로 무마하며 살아가는 자신을 한심해하는 그런 자신이 싫어 자연스럽게 인터넷 세상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그 억울함을 자신에게 불편함을 준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기준 없이 먹잇감이 될만하다 싶은 영상이나 글을 보고 문맥의 앞뒤를 따지지 않고(전체 내용을 보지 않고) 자신들이 불편해하는 내용만을 발췌해서 악플로 그 사람의 의식을 물어뜯어 피를 흘리게 하는 행위를 하게 된다.
자신들이 현실 세계에서 당한 것을 복수라도 하듯이 말이다. 더 큰 문제는 그 복수의 대상이 불특정 다수가 되어버린 거다. 좀비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보겸이라는 스트리머가 '보이루'라는 인사를 하는데 그 인사말이 여성의 성기와 인사말을 합성한 것이라고 하여, 보겸이라는 사람이 성에 대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처럼 묘사를 하는데 이건 댓글 수준이 아니라 논문까지 제출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IT 스트리머가 스마트 폰 충전기를 꽂는 행위를 하면서 '이렇게 삽입을 해서 충전을 시키면..'이라는 문장에 꽂으면이라고 할 말을 삽입이라고 말했다고 기계 가지고도 성행위로 인지한다고 문제시하기도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_LpMHqmScuk
이쯤 되면 K 좀비의 방향을 대충 예상할 수 있다.
K 좀비는 성문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이다. 그러니 K 좀비는 한국형 페미니스트, K 페미니스트가 가장 대표적인 좀비 집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좀비는 소리에 민감하다. 그래서 소리를 듣고 우르르 쫓아 가 살아 있는 사람이 없다는 인지가 되어서야 다시 본래의 느린 움직임으로 무의식적인 대기 동작에 들어간다.
삽입이라고 한 말 가지고 우루루 쫒아가 이것 가지고 한남충으로 끌어내리려다 200만 크리에이터의 쌓아온 위상을 무너뜨리기 어렵다고 판단하니 대충 포기하고, 불법 마사지 업소에 간 거가 지고 사과를 해도 와이프가 용서를 하고 같이 살 거라고 해도 K 페미니스트들은 그래도 먹을 게 있다는 판단에 남에 남편 가지고 왈가불가해서 다들 한입씩 뜯어먹다가 그 집 뱃속 아이는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이렇게 익명성이 보장된 강력한 댓글이라는 무기로 사람들을 죽이고도 좀비처럼 인지하지 못하고 또 어떤 먹이가 있는지 귀를 기울이며 스마트 폰을 들고 인터넷 세상을 유영한다.
댓글의 장점은 익명성이다. 익명성의 가면은 누가 누구인지 모르니 본성이 드러나도 안전하게 느껴진다.
이 말은 댓글 살인자들은 현실 세계에서는 얼굴을 드러내고 직장을 다니고, 친구들을 만나며, 연애를 하고, 식구들과 밥을 먹는다. 현실 세계에서는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마치 누가 오미크론에 걸렸는지 모르지만 함께 걸어가고,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며, 같은 공간에서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으며 살고 있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허나 댓글 살인자들은 현실 세계에서는 안전한 존재다. 앞에서 말했듯이 얼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들은 가면을 쓰고 밤거리에서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다. 이들은 강력한 무기인 댓글이 있고 공간마저도 제약이 없는 스마트 폰이라는 도구는 이들에게 있기에 현실 세계에서 손해 보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은 단지 현실 세계에서 그런 짓을 하지 않은 척만 하는 연기만 잘하면 된다.
③ 좀비끼리는 서로 영향을 주거나 받지도 않는 상태의 존재
뉴턴의 라이벌인 라이프니츠라는 천재는 모나드는 창이 없다고 했다. 여기서 모나드란 물질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계의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창이 없다는 뜻은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은 현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좀비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간섭도 하지 않는다. 인간을 물어뜯을 때 굳이 먼저 먹고 있는 좀비를 밀쳐내서 떨어뜨리지도 않는다. 그냥 덤빈다.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모나드를 '지우학'에서 감정이 끊어진 인간관계에 대입을 해보면 인간관계의 감정 연결선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계까지 간 혼자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는 외로운 상태에 이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현실 세계에서 진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그러니 감정을 교류할 사람이 없기에 일종에 감정적 솔로인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먹고살기 위해 직장에 나가야 하고, 의미 없는 친구들을 만나며 의미 없는 수다와 웃음을 날리고,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는 가족들을 상대해야 한다.
어쩌면 이들은 무인도에서 혼자 있는 것보다 더 외로운 존재일 수 있다. 그러니 이들은 자연스럽게 인공적인 세상인 인터넷 세상으로 흡수가 되었고 서로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친구들을 만났다.
이들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 대한 악플을 달며 자신들의 숫자를 쌓아간다. 성에 대한 글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다. 직장 유리천장이나 꼰대 남자 상사나 동급 지질한 남자 얘기도 별미다.
현실에서도 이들은 서로 감정적으로 연결돼 있지 못해서 외로운 존재다. 인터넷 세상도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허나 현실과 차이점은 댓글 세상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인터넷상에서도 모나드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의견으로 사람을 죽이는 쾌감을 느끼는 존재가 있다는 건 이들은 최소한 인터넷 세상에서는 혼자가 아님을 느낄 거다. 심지어 댓글로 사람이 죽는다고 한들 법적 문제도 없을뿐더러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악플을 달았기에 죄책감도 없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모나드'다. 이들은 서로 어려울 때는 이들은 서로 돕지 않는다.
군대에 여자들도 가야 한다고 하고 여자들도 가겠다고 나섰을 때 분위기가 진짜 그렇게 될 거 같은 낌새가 정치계에서 1% 정도 나왔을 때 어떤 여자들은 이제 '그만하자 이러다 진짜 가겠다'며 물러섰지만 어떤 여자들은 밀어붙이자고 했다.
왜냐면 법이 통과하려면 지금 시작해도 5년은 걸리고 진짜 말이 왔다 갔다 하면 10년은 걸릴 테니 그때 자신은 30대가 되어서 면제니 그냥 밀어붙이자고 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어차피 가더라도 우리보다 어린애들이나 갈 거라고 하면서 말이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대등성을 말하기 위해서 군대에 가자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안 가니까 가자고 하자'라는 거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보다 어린 여자들은 군대에 가게 되면 그걸 이용해서 자신들도 군대에 가는 존재라고 대등성을 어필할 것이다.
인터넷 좀비인 악플러들은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존재들의 낌새가 약간이라도 있으면 물어뜯는 행위를 서슴없이 한다. 진짜 좀비가 여자 남자를 가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들이 가장 혼자라고 인정되는 사건은 자신이 쓴 글에 남 인척 자신이 댓글을 수십여 개를 달아서 혼자가 아니라는 식으로 어필을 한다는 것이다.
댓글의 강력한 무기가 바로 익명성인데 한 포털 사이트에서 타인의 댓글은 익명성이 보장이 되나 글쓴이가 자신의 글에 댓글을 다는 건 표시가 별도로 되게 만들었고 그건 지난 글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 그랬더니 자신이 올린 남성 편향 글에 수십여 개의 댓글이 다 자신이 단 글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심지어 댓글에 댓글을 단것도 자신이 단 댓글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4HwZg6OxnI
이들의 삶에서 현실과 인터넷 세상과의 차이는 현실은 자신을 감추고 거짓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의견이 아닌 타인의 눈치를 보며 말해야 하는 상황이고, 인터넷 세상은 자신의 얼굴을 숨긴 채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울 수 있다는 차이점일 뿐이다.
심지어 그 댓글에는 논리도 필요 없다. 얼굴과 논리가 필요 없이 내가 바라는 유리한 짧은 글이나 댓글만 써서 올리는 세상, 거기에다가 누군가 피해를 입거나 자살을 하면 죄책감보다는 통쾌함이 더 클지도 모른다.
법도 없고, 얼굴도 드러나지 않으니, 나는 안 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논리로 무장을 했을 것이고, 설사했다고 인지해도 법에 저촉되는 일도 아니라서 죄의식을 느낄 필요 없다는 논리는 더 이들을 자유를 느끼게 만들어 줄 것이다.
어쩌면 이들은 자신들이 선을 행한 정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적인 일을 공적인 일로 포장을 하면 나의 정당성이 타인에게는 물론이고
나 스스로도 당당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허나 결국 이들은 인터넷 세상에서 모두 감정적으로 인간관계가 다 끊긴 모나드(혼자) 일뿐이다.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타인에게 의해서 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감정적으로 인간관계가 다 끊겼다는 것은 나는 그냥 거리에 지나가는 강아지나 고양이, 저 산에 있는 나무나 바위나 다름이 없는 존재일 뿐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인터넷 좀비가 된 것이다.
결국 좀비는 인간 사회에서 감정적 연결 고리가 끊긴 인터넷 세상에서 최후의 '인간형' 존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왜 이들은 현실 세계에서 조용히 존재하는 것인가?(좀비가 되지 않는 것인가?)
그건 바로 사회적인 얼굴을 드러낸 '약한 유대' 관계 때문이다.
나는 점심을 동네 횟집에서 매일같이 가서 먹는다. 그리고 스타벅스로 바로 향해서 컴퓨터 작업을 한다. 블로그 글도 쓰고 지난 사진도 정리하고 동영상 몇 개를 본다. 난 여기에 들리면서 주문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내가 오면 그냥 알아서 회덮밥을 주고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샷을 추가해서 결제를 한다. 이런 이유는 이들이 나를 알기 때문이다.
나를 안다고 해도 제한적이다. 나의 모든 것을 알리 없다. 내가 이 시간에 여기에 오는 목적에 대한 정보만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거기에 가면 아주 약간씩의 대화를 주고받는다.
예를 들면 새해가 되면 복 많이 받으라는 통상적인 인사라던가 시골에서 양봉일을 하고 돌아오면 한동안 안 보여서 뭘 했냐는 간단한 대화는 여기에서는 정겨움으로 느껴지는 대화가 된다.
이런 약한 유대 관계는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만든다.
https://www.bbc.com/korean/news-53296317
나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이혜련의 자살에 일조한 댓글을 썼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세상의 법이 바뀌어서 악플로 자살을 한 사람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사이트가 개설이 되고 이 사람이 얼굴과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고 생각해보자.
이왕 예를 드는 거 좀 심하게 예를 들어보자면 스타벅스에 갔는데 댓글 살인에 일조한 사람은 정문을 통과할 때 알람이 울린다고 해보자. 그래야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법적 처벌은 없다. 주문을 한다. 그럼 직원이 이 사람을 어떻게 볼까? 설사 알람이 없어도 얼마든지 검색으로 알 수 있다는 사실은 공포로 여겨질 것이다.
이런 걸 예상해보면 우리 사회의 약한 유대 관계가 얼마나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는지는 금방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예를 들지 않아도 직장에서 성질대로 했을 때 내가 맞다고 해도 물의를 일으킨 자체를 사람들이 다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회생활은 부담스럽다. 그리고 이런 일이 쌓이고, 쌓이고, 쌓이면 나는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까지 이른다. 심지어 이유가 옳아서 그런데도 말이다.
그러니 이런 사회적 약한 유대관계로 인해서 사람들은 조금은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주변 분위기상 참는 법을 배운 게 되고, 더 현명한 경우는 억울한 일이 생길걸 미리 방지하는 요령을 배우고 터득한다.
이렇다는 건 악플러들은 공식적으로 얼굴이 드러나는 현실 사회에서 악행을 저질러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직장에서 나의 일이 뉴스화 되어 소문이 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거다. 심지어 그게 곧 벗겨질 오해나 누명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인터넷 세상에서도 자신을 대표하는 채널을 개통해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익명성이 보장된 댓글이 주된 무기가 되는 것이다.
우린 긍정적인 면에서 관계의 감옥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다.
애초에 이런 예를 들지 않고 댓글 옆에 얼굴 사진만 나와도 논리 없는 악플을 달지도 못할 거다. 다시 말하지만 악플의 최대 장점은 익명성이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의 약자지만 자신의 존재를 익명성이 보장된 세상 속에서 폭력(악플)으로 자신의 삶을 보상받아 상쇄하려는 존재들이 바로 악플러들이고 이들이 바로 현실판 좀비인 것이다.
피와 살을 물어뜯는 대신 한 사람의 영혼과 정신, 감정을 물어뜯어서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들이 좀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심지어 악플로 물어 뜯긴 사람들은 스스로 죽으니 내가 죽인 것이 아닌 게 되는, 그리고 난 인터넷 세상에서 활동했으니 현실에서 자살을 한 사람과는 다른 세상에 있다는 느낌, 더군다나 아무도 내가 여기에 일조를 했다는 것을 모르는 이 행위는 내가 현실에서 약한 유대 관계로 얽힌 약자로 살아가는 혹은 약자라는 것을 떠나서 손해 보는 것 자체를 싫어해서 보상받는 행위로 정당화하여 나의 일상을 지켜낸다.
이들은 마치 토르의 묠니르를 얻은 것 마냥 마구 휘둘러대며 자신은 인터넷과 댓글 기능만 있으면 강자라고 착각하는 일도 있을 거다. 이 세상에서는 그런 나를 처벌할 법은 없기 때문이다. 법대로 하라는 식의 우리나라에서는 이보다 더 매력적인 피신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악플러들은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여겨서 명분을 이어가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절대 자신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말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논리가 있는 악플러면 그냥 악플러거나 인터넷 논객이지, 댓글 살인자, 인터넷 좀비로 불려질 이유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의 채널을 만들어서 주장을 한다면 확신한 거다. 신분이 확실한 비판자들을 악플러라고는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논리적 비판자와 비논리적 악플러(악플을 위한 악플러)는 철저하게 분리를 해서 다르게 취급을 해야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bJ3vtwCZOMc
비논리적 악플러들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오직 자신들만을 위한, 자신들의 현실의 불리한 삶을 보상받기 위한, 심지어 대상도 개인적 원한도 아닌 시점에 논란이 되는 인물과 화젯거리일 뿐이니까.
대상이 개인적 원한이 아니라는 것은 그 대상에게 논리적으로 반박할 이유가 없으니 그런 것 일 것이고, 그렇다는 건 자신이 잘못한 것인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감정은 상하고, 그 상한 감정을 보상받으려다 보니 화제의 대상과 절대적으로 틀릴 수 없는 주제인 성에 집중되어 있고, 그러면 당연히 남자가 과녁이 되는 것이 편하다. 심지어 성을 상품화해서 편하게 사는 레이싱 모델이나 BJ들도 공격의 대상이 된다.
거기에다가 사회 정의를 위해서 한몫 거든다는 억지 애국정신도 넣어서 열심히 악플을 달다 보니 뱃속에 애까지도 죽여버린 일이 벌어져도 나 몰라라 하면서 아직도 활동하지 않고 있는 그 연예인에 대한 미안함은 털끝만큼도 없을 것이다. 털끝이 뭔가!? 자신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할 거다.
그래서 그 와이프는 삶이 아닌 먹고살기 위해서 생활 전선에 나와야 하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그럼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는 데이트 살인 사건은 무엇인가?
감정적 연결 고리가 다 끊겨 인터넷으로 흡수된 모나드들을 대다수가 여자다. 설리를 죽인 악플러들도 대다수가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이었다.
그리고 데이트 살인 사건은 대다수가 남자다. 남자들은 인터넷 세상보다는 현실에 더 집중하고 댓글이라는 문명을 그리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
남자들은 자신의 현실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려고 집중하지 인터넷 세상으로 자신의 정신을 그리 깊이 들여놓지 않는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경우는 현실 해결용 자료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대신 현실을 잊으려고 게임에 집중한다.)
그래서 남자들이 자신의 유일한 감정적 연결 고리인 자신의 여자 친구와 헤어지게 되어, 약한 유대 관계도 맺지 못하는 모나드가 되면, 완전한 혼자가 되어 정신이 진짜 (정신적) 좀비화가 되어 사람을 죽이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단지 드라마와 차이라면 죽이는 대상의 목적성이 뚜렷하다는 건데, 이것도 좀비가 소리에 민감한 것을 대비해서 설명을 하자면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여 쫓아간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들은 차라리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게 더 낫지 사람들 가득한 세상에서 다들 즐거워 보이는데, 나만 혼자인 느낌은 분노를 낳고, 그 분노는 나에 마지막 연결고리였던 전 여자 친구에게 향하게 되고 그렇게 나의 인간성은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한 사람이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서로와 서로가 연결된 감정적 유기적 존재라는 뜻이 된다.
세상이 멸망해서 혼자만 살아남았다고 가정해보자. 심지어 인간만 멸종했다고 보자.
신세계 백화점에 명품들은 다 있고, 식당에 먹을 건 넘쳐나고, 발전기도 계속 돌아서 에너지도 유지되어 그야말로 의식주 모두 걱정 없는 세상이라고 상상해보자. 돈 걱정 없으니 취업 걱정 없고, 호텔의 객실은 넘쳐나니 매일 돌아가면서 자면 된다. 매일매일이 명품과 함께 하는 호캉스다.
근데 나 혼자다.
누가 날 인간이라고 인정해줄 것인가?
누가 내 이름을 불러주며 나 자체로 존재한다고 말해줄 것인가?
지나가던 사자가 날 보고 인간이라고 인정해줄까? 얼룩말과 다름이 없는 먹이라고 덤벼들까? 에르메스 백으로 막아본다고 한들 사자가 명품이라고 알아봐 주며 비켜갈까?
◆ 악마 같은 삶을 멈추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살인자는 검찰에 송치되기 전에 이런 멋있는 말을 한다. 허나 형량이 나오면 감형 신청을 한다. 이런 멋진 말들은 결국 죄의식에 의해서 나오는 반성의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어느 심리학자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마치 인스타그램(SNS)에서 자신의 존재를 들어내는 행위와 같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런 사건이 있으면 어떻게든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감추려고 하며 취재진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흐리며 도망치듯 호송 차량에 탑승하나, 요즘은 얼굴을 들고 무릎을 꿇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숨 쉬는 것도 죄책감이 든다."라고 마치 준비라도 한듯한 멘트로 담담한 표정과 함께 말한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oid=011&aid=0003894909
이런 행위는 TV라는 매체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행위라는 것은 명백하니 SNS에서 자신을 들어내어 팔로워를 늘이는 행위가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씨엔블루 이종현은 정준영과 함께 물의를 일으킨 당시에 그 상황에 대한 SNS 내용에 좋아요를 누르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 상황이 무엇이든 자신이 더 알려지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 된 것이다. (내가 알기론 그 내용(사진)도 자신이 올린 내용인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이 말은 어떻게든 사람은 사람과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찾아서 함께 하고 싶어 한다는 뜻이고 유명해졌다고 해서 온전한 자신을 드러내어 놓고 팬들과 소통했다는 뜻은 아니니 아마 유명한만큼 외로웠을 거다. 그러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본능적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황당한 쇼까지 벌이는 것이다.
이것이 본능이 아니라면 형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어진 삶을 감옥에서라도 더 성실하게 살아가야 할 텐데 형량을 거부하고 감형을 신청했다는 것은 생각 없이(반성 없이) 본능적으로 쇼를 했다는 증거다.
결국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는 건 나 스스로가 이뤄낸 결과가 아니라, 부모의 보살핌, 친구들과의 놀이, 내가 다닌 학교에서의 배움, 여행 다닌 장소 기억, 연애로 서로 주고받은 영향 등등의 모든 것들이 나를 온전한 주체로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좋은 기억과 경험은 다시 살려서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고, 나의 잘못은 반성하여 고치고, 타인에게 받은 상처는 나를 강하게 만드는 영양분으로 삼아서 나를 온전한 주체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좀비가 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웃고, 즐거운 대화를 하고, 좋은 곳에 여행도 함께 가며, 맛있는 것을 먹으며 미래에 대해서 얘기하는 행복한 삶의 기초인 것이고, 그 기초가 바로 나 스스로가 온전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온전한 주체로써 강한 내가 되는 것은(업그레이드된다는 것은) 내가 잘하는 것이든, 내가 좋아하는 것이든 그 분야에서 탁월성을 발휘하여 그 영향력이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으로 흡수가 되어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인 호모 사이엔스는 100Km 넘게 여기저기 흔적을 찾아다니며 사람을 만났고, 1~2시간 얘기를 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탈것이 없었던 시대였으니 당연히 걸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 거리가 왕복 200km가 넘더라도 개의치 않고서 말이다. 그리고 그 만남에서의 대화를 기반으로 각자의 삶에 적용을 시켜서 자신들의 삶을 바꿔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에게 영향을 주게 되었고 그것이 문명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건 사람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조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조직은 '우리'라는 개념을 낳는다. 그래서 우리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나처럼' 생각했다.
그건 상대방도 나처럼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강해지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런 게 다 세상 탓이라고 하며 그러니 이 세상이 나를 보호해야 한다고 책임을 전가한다. '우리'라는 감정적 관계망에는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런 약한 존재들은 자기 분야에 탁월성이 없으니 '우리'라는 조직에 들어가기 어렵고, 타인에게 영향을 받아서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타인을 배척하고 '나는 나'라는 의미도 파악하지 못하는 문구나 따라 하며 인간의 기본 조건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러니 자연스럽게 인터넷 세상으로 나를 담그게 되고, 나도 모르게 나의 억울함을 공감하는 곳을 찾게 되고, 그 억울함이 비논리적이어도 공감을 얻게 되니, 논의 영역에서 벗어나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고, 어느덧 나도 모르게 악플러가 되어 사람들의 영혼을 물어뜯는 인터넷 좀비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내가 그곳에서는 당연해 보이고, 당연한 난 정상이고, 내가 정상이니 이 세상이 비정상이 된다. 이런 순환이 계속되면 인터넷 좀비들은 사라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설사 이런 논리로 세상이 비정상이라도 우린 현실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거나 아님 적응해서 살아가야 하는데 악플로 사람들을 죽이거나 내가 외롭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정상이라고 믿는 세상이 정상일 수 없으니 혁명은 불가능하거다. 그러니 세상에 맞는 나로 거듭나야 하는 게 순리다.
다시 말해서 강해져야(탁월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경우 인터넷 커뮤니티를 찾지 못하거나, 찾더라도 자리를 못 잡거나, 잡을 자리조차 없는 사람들은 현실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주로 남자다. 남자는 능력이 없으면 이런 자리조차 끼지 못하는 어이없이 웃픈 현실이다.
어느 쪽이 더 낫다 아니다.라는 것을 가릴 논재는 아니다. 둘 다 사라져야 할 존재다.
어떻게든 모나드적 존재를 막아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의무이고 그 의무를 이행해야 이 세상이 안전하다.
◆ 왜 모나드적 존재는 탄생하는가?
이건 지난 글에서 언급을 했다.
요약하자면 과거의 교육은 아무리 공부하라고 해도 놀면서 했다. 골목 문화는 사람들과의 융화를 가능하게 했고 공부는 놀고 나서 해도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건 대학교까지 쭉 이어졌다.
허나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빠르면 유치원부터 영어 유치원을 보내서 대학까지 오롯이 공부에만 집중하게 한다. 그 목표는 바로 취업이다. 취업만 하면 다 끝이라는 식의 교육방식이 대학까지 친구들과의 소통을 막으니 타인과의 융화는 불가능하다.
모나드는 여기서 생겨난다. 유치원 때부터 취업을 목적으로 살아오니 친구라는 개념이 경쟁자로 자리 잡히게 되고 친해져야 하는 이유를 모른 채 나라는 객체만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어 모나드는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나만 중요하니 내가 싫어하거나 불편하면 다른 인간관계를 끊어서 나만 좋아하고 편하면 되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도 '우리'가 아닌 '나와 너'라는 분리된 관계로 형성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까지 자신의 인생을 25년 안팎으로 숨 막힐 듯 달려왔는데 취업을 해도 더 큰 산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취업이 되면 다행이지 취업이 안 되는 사태까지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최악은 집을 살 수 없는 월급쟁이 인생까지 눈앞에 펼쳐진 국가적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운 번아웃 상태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세상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되려 자신이 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들은 사람들과 함께 연결되는 법을 배운 적도 없고, 배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으며, 배워서 뭐하냐고 하고, 결국 내가 중요한 거 아니냐며, 나만을 강조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건 앞에서 '우리'라는 감정적 관계망 속에서 들어가지 않는다는 글에 대한 답이 되는 글이다.
https://blog.daum.net/spike96/16464472
우리가 문명을 만드는 기초인 타인과의 융화를 실천했던 호모 사피엔스와는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허나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네한데르타인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강한 존재였지만 타인과의 융화하지 않아서 멸종했다. 어쩌면 지금 세대는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공존하는 시대로 다시 돌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인간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해서 좀비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영역 안에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다른 영역을 발견하고 서로 협력을 하거나 싸우기도 하지만 결국 그런 식으로 영역을 넓혀가며 인간다운 생활을 이어가려고 한다.
나 또한 그렇다. 지금 이 블로그 글에는 어떠한 댓글도 달지 못하게 설정한다. 나만의 영역에서 나를 인정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들과 문화를 만들어가며 살고 있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융화를 하려고 노력한다.
드라마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큰 틀인 정치계나 학계에서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시스템을 만들지 못하고 있으니 인터넷 좀비들을 피해서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인간 입장에서 본 거다.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인간 사회를 중심으로 보니 그래도 살아가는구나.. 스러운 면이 보이는 거지, 좀비 입장에서 보면 세상은 거의 다 좀비화 되었다.
이 말은 결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라는 개념이 아닌 결국 나만 중요하다는 개념으로 살아갈 것이다. 기업은 이걸로 돈을 벌려고 할 것이고 정치계는 이걸로 표를 얻으려고 할 것이다.
특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정치계는 법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해결을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주 급박한 상황이면 법을 만들 수 있으면 하겠다는 식 정도일 거다.
그래서 내가 항상 주장하는 것은 도덕적인 면은 학자들이 세상에 나와서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려고 해야 한다.
도덕은 법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처벌이 없다고 해서 도덕이 법보다 아래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법은 인간 사회의 규칙에 제일 아래에 포진한 마지노선일 뿐이다.
인간 사회의 도덕이 지켜지면 왜 법을 만들겠는가? 도둑이 없는데 도둑에 대한 법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허나 학자들은 자기 교수 자리나 지키려고만 하지 특별히 다른 생각을 하겠는가? 학생들이 사라져서 학교가 사라지니 자기 자리 위협이나 받는 거나 걱정하지. 결국 지성인이라 불리는 자들도 자기 직급을 직장 수준에서 활용하는 우리와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이라는 거다. 그러니 드라마에서는 결과가 좀비 세상이 되는 것으로 끝이 나는 거라고 본다.
즉 이미 고위급 사람들이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으로 세상을 관망하는데 어떻게 좋은 세상이 되겠는가? 기껏해야 아이패드 좋은 거 나오면 좋은 세상이 되는 세상이 된 거다.
사람을 통해서 얻는 즐거움, 기쁨, 행복으로 인해 좋은 세상이 되는 세상은 점점 멀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건 이미 벌어지고 있는 상태다.
이혼을 60%나 하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고모가 조카를 죽이고, 고모부는 방관하고, 연애 좀 해서 헤어졌다고 찾아가 가족을 몰살하고 그리고 인터넷에서 악플로 사람을 죽이는 세상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뉴스에 나오는데 세상은 점점 더 자신만을 강조하는 사회가 되고 있으니 방법은 없다고 보는 게 좋을 거다.
◆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다시 말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정부에서 나서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정치계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정치인은 정치인을 위한 정치를 하지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정의롭게 정치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행인 거지 인기나 얻으려고 쇼나 하고, 자신의 몫이나 챙겨서 달아나려는 사람보다는 낫다. 허나 국민의 삶을 모르는 사람이 정치를 하면 국민은 나아질 게 없다.
이재명이 되든 윤석열이 되든 심상정이 되든 안철수가 되든 솔직히 내 개인의 삶에는 거의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단지 정의롭지 못한 대가리의 멍청하고 옹졸한 행동에 대한 답답함이 한국에서 살기 싫다는 감정만 불러일으킨다.
그러니 우리 삶은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한다.
우선 인터넷 좀비라도 되어서 속풀이라고 하고 살 건지? 인간처럼 살려고 노력을 할 건지부터 정해야 한다.
전자는 지금처럼 살면 자연스럽게 된다. 나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언젠가는 억울한 일이 생길 것이고 나는 인터넷 좀비가 아니라면서 그럴 거다.
내 삶의 방식을 의심하지 않으면 (주변 상황으로 인해) 내가 바라지 않는 내가 되어버린다.
인터넷 좀비에 대해 요약해보겠다.
인터넷 좀비는 악플로 사람을 자살하게 만들어서 나 몰라라 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사는 존재들을 말한다. 이들은 사회에서도 약한 유대 관계로 이어져 있어서 현실 사회에서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지만 약한 유대 관계마저 갖지 못하는 못난 놈들은 현실에서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존재들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저지른 일을 무기로 자신을 홍보하는 일까지도 하는 무지성적인 행동까지 한다. 그러니까 현실판 좀비인 거다.
약한 유대가 없으면 현실판 좀비, 약한 유대라도 있으면 인터넷 좀비가 되어 사람들을 물어뜯는다.
그러니 좀비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라는 개념을 받아들여라.
그러기 위해선 우선 친한 친구들과 함께하는 법을 배워라. 그냥 '나와 너'라는 개념으로 억지로 끼지 말고, 그냥 수다나 떨지 말고, 진짜 함께 해서 뭔가 일을 해서 결과를 만들어내라.
해파랑 길을 걷든, 한국 100대 명상을 오르든, 경주 같은 한 지역을 정해서 조금은 더 알려고 구경을 하든 같이 해라. 할 사람이 없으면 혼자 시작해라. 그리고 SNS로 홍보하라. 그러면 언젠가는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들과 함께 해라. 같은 경험을 같은 감정으로 공감을 하면 '우리'가 형성이 된다.
이미 이런 경험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면 같이 하자고 연락해라. 그리고 그 친구가 먼저 했으니 그 친구의 감정을 인정하고 함께 하는 법을 배워라. 나중에 들어간 자신을 우선시하려는 태도는 결국 내가 중요하다는 것을 억지로 내세우는 꼴이 된다. 그럼 '우리'가 아닌 같은 일을 하는 '나와 너'가 된다.
함께 한다고 해서 평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디서나 서열을 정해진다. 먼저 하고, 더 많이 알고, 목적이 더 뚜렷하고, 더 멀리 볼 줄 아는 사람이 서열 상위에 있는 거다. 남에 영역에 들어가 놓고 먼저 한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자신이 모나드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내가 함께 함에 지금이 더 좋다는 것을 인정받아라. 내가 함께 하는데 먼저 한 사람이 더 안 좋아하면 결국 나는 모나드적 인간이다.
이걸 직장에 적용시켜라.
내가 이 직장(부서)에 들어왔으면 나로 인해서 뭐라도 더 긍정적으로 바뀌어야
내가 '우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한 상담자에게 직장에 대한 정보를 듣고 난 청소를 하라고 시켰다. 그리고 그 상담자는 청소를 했고 부장님은 그 상담자는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그리고 연봉도 순차적으로 600만 원 이상으로 올렸다. 1년도 안돼서 말이다. 하찮은 일이라도 부서에 도움이 되면 나는 그 부서에 필요한 존재가 되어 '우리'에 들어간다.
블로그에서 자주 언급하지만 난 타로를 배웠다. 그래서 나로 인해서 즐거운 대화가 많아졌고 웃음이 많아져서 난 알바로 들어가서 직원이 된 최초의 사람이 되었고 다른 부서에서도 나를 채용하려고 했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에 들어간다는 것은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이 내가 되는 현상이 생겨, 내가 더 많아진다는 뜻이다. 내가 '부서'에 '흡수(융화)'가 되어서 '나 = 부서(사람들)'라는 공식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만약 친구 무리에 이름이 '해피'라고 한다면 '나 = 해피'라는 공식이 생기는 것이다. 그 해피라는 인원이 5명이면 나를 빼고 4명의 나라는 존재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5배 더 즐겁고, 5배 웃을 수 있고, 5배 더 즐거운 곳으로 여행을 가며, 5배 더 즐거운 맛집을 탐방하게 된다.
과거의 우리는 과정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시스템이었다. 과거 조직(우리)은 중요했기 때문이다. 함께 해야 농업이든, 공업이든, 부서적인 일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거기에는 리더가 있고 그걸 인정했으니 편했다.
허나 21세기는 모든 것이 기계로 대체된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농업도 혼자 하고, 공장에서도 일을 각자 분담화해서 하고 부서적인 일도 컴퓨터만 있으면 혼자 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요즘 직장은 리더가 없다. 좋게 말해서 내가 주체가 되는 직장이지만, 리더가 있는 직장보다 다 알아서 해야 하는 불편함, 어려움이 존재한다.*
* 넷플릭스나 구글 같은 회사는 알아서 성과를 내야 하는 직장이라 우리나라 시스템에 익숙한 사람들은 어려울 거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보다는 '나'라는 존재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 같다. 요즘은 '우리나라'라고 하지 않고 '나의 나라'라고 하는 추세가 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정치인을 고를 때, 우리에게 유리한 공약을 거는 사람보다는 나에게 유리한 조건을 거는 사람을 뽑으려 한다. 그 공약이 '우리'라는 더 큰 조직에 해가 된다고 해도 말이다.
허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없으면 도대체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니 나는 의지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우리'라는 조직에 들어가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는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학자들과 힘을 합쳐서 이런 노력을 도와주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모두가 다 좋다고 말하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어떻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는 세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내가 '우리'에게 들어가면 나에게 손해가 가더라도 '우리'에게 좋으면 나머지 4명의 도움으로 얼마든지 그 손해를 보상받을 수 있다.
이런 시스템으로 세상은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다들 각자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니 다들 조직에서 떨어져 나가 개별자로 존재하게 되어 결국 손해 보는 삶을 살게 되고, 그러니 나만 손해 보는 거 같아 억울함을 느끼는 인생을 살게 되고, 그러고 보니 나만 혼자인 것 같은 세상에 살게 되는 거다.
이걸 가족으로 확대해서 보자면 나에게 손해가 되어도 누나나, 오빠나, 언니나, 동생들이 이득을 보는 일이 생기는 것으로 내 가족은 얼마든지 유지되어 나에 대한 손해가 보상이 되는 거다.
근데 요즘은 핵가족화되어서 자식이 하나인 가정이 태반이다 보니 이런 '우리'라는 개념이 제대로 설 자리가 없다. 가정에서부터 불발이다. 그러니 '우리'라는 개념은 친구들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친구들이 가족에서 형제, 자매의 경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다.
보다 적극적인 방법은 가치관을 세우고 그에 맞는 행동을 어려워도 해내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사실 이런 표현보다는 철학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철학을 하라고 하면 '철학'이라는 단어에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식으로 외면을 해버리니 가치관을 세우라고 한 것이다.
'자신만의 철학 = 가치관의 확립'이기 때문이다.
요즘 철학은 심리학, 과학, 사회학, 분석학, 인지학 등등의 학문에게 자리를 뺏겨서 철학이라는 학문이 따로 있는 거 같고 그것은 마치 철학은 이제 좋은 건 남들에게 다 뺏겨서 필요 없는 부위만 남겨서 배우는 학문 같지만 사실 철학은 모든 것이다. 지금의 학문이 있기 이전에는 그냥 공부 자체가 철학이었고 삶이 곧 철학이었다는 뜻이다.
이걸 쉽게 말해서 철학은 '왜'라는 질문에 답을 해주는 건데 이건 논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인터넷 좀비들은 다 비논리고 억지다. 쉽게 말해서 좀비의 육체에 정신을 불어넣어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철학이라는 것이다.
철학은 우리라는 개념에 내가 존재해야 시작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철학은 백신이자 치료제다. 백신을 맞으면 병에 걸리지 않거나 걸려도 약한 증상만 겪고 낫는다.
현실의 억울함이 왜 나에게 생겼는지 알면 내가 뭘 해야 할지를 알게 되고 목표가 생긴다. 인터넷에 빠지지 않고 나를 현실에서 찾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남에 일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어 악플을 다는 일도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아니 내가 할 일을 하는 것이 바쁘니까.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행복은 뭔지? 그래서 내 행복은 무엇인지? 사랑은 뭔지? 그래서 내 사랑은 무엇인지? 나에게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지? 왜 그 사람이 나에게 중요한지? 등등을 생각하라. 생각하는 것이 곧 철학이다.
알기 너무 어렵다면 책을 봐라. 그래서 책을 읽는 거다.
책 읽는 게 멋있게 보여서, 그냥 읽는게 좋은 거니까 하는 생각으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책을 읽기 어려워한다면 드라마나 영화를 봐라. 다 글에서 나온 형태의 창작물이다.
더 배트맨에 나온 리들러도 여기에 적은 '내가 많아진다.'라는 개념의 내용이 등장한다. 난 보고 감탄을 했다.
글을 읽고 흡수하지 말고 다각도로 정찰을 하라. 이건 비판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맞는지 확인을 해보는 작업. 즉 생각을 하라는 거다. 생각하라고 글을 읽으라고 했는데 글을 읽으면 그걸 흡수하는 방식으로 글을 읽으니 삶에 적용을 못 시키고 그러다 보니 책이 필요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다.
즉 정찰을 하라는 것은 글의 내용을 내 삶에 어떻게 적용을 시켜야 하는지, 어느 부분에 적용을 시켜야 하는지, 누구와의 만남에 적용을 시켜야 하는지 등등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사람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하는 사람들이다."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선거철이나 이번 정권에 적용시켜서 후보를 보는 건 천지 차이다. 좋은 글이 있어도 글자만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글은 선거철에 온갖 비논리와 거짓말로 공약을 걸어서 대한민국을 다 좋은 천국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하는 후보와 정당을 가려낼 수 있는 나의 무기가 될 수 있다. 공약이 진실인지? 실천 가능한지? 실천이 되면 진짜 그렇게 되는지? 그렇게 되는데 대상이 다른 곳이 되어서 부작용은 없는지? 등등을 알아야 제대로 된 투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 민국이 곧 기축 통화국이 될 거라는 것은 고등학생도 안다."라고 발언을 하며 대한민국은 그래서 빚을 더 내도 된다고 발언 하나하나에 대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정찰을 해서 거짓인지 아닌지를 점검한다는 것으로, 나에게 어떤 영향이 있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이 있으며 그로 인해서 나의 투표 방향이 결정이 좀 더 쉽게 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이런 것들이 다 철학인 것이다.
생각하는 자세로 살면서 그 생각을 결과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좀비가 되지 않는 백신인 것이다.
결국 '좀비 = 생각 없는 사람' 그래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현실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이 평범한 논리를 아주 긴 글로 표현이 된 거 같다. 되려 너무 간단한 결과의 글이 사람들의 공감과 설득을 얻기 위해서는 더 길고 장황해지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https://www.youtube.com/shorts/zQ_VMlAq5Cg
(부록)
* 현실 세계의 면역자는 어떤 존재인가?
삼성, 애플, 벤츠, 폭스바겐과 같은 세계적 거대 기업이다. 이들은 악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들이 면역자인 이유는 그런 악플을 받고도 신제품을 내놓으면 다시 사람들은 우르르 달려가서 서슴없이 카드를 꺼내어 결제를 한다. 심지어 악플에 약간이라도 반응한듯한 제품이 나오면 더 좋아하며 지갑을 연다. 그러면서 이들은 더 부자가 되고 '지우학'의 면역자들처럼 강해지는 것이다.
난 '지우학'의 면역자들은 감정적 고립 단계에 있다고 했는데 이들도 그렇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들 알 것이다.
이번 삼성의 GOS 사태도 소비자의 니즈를 반영한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스마트 폰이 고급화되면서 교체 시기가 길어짐에 따라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일부러 성능을 낮춰서 스마트 폰이 시간이 지나 성능이 저하됐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서 스마트 폰을 교체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밝혀져도 여전히 콧대 높은 자세로 응전하는 태도가 최근의 좋은 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yPlehn8kMQ
* 백신 완료자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를 출판하고 나서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라서 편지로 받았다.) 허나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현시대 최고의 진화생물학자로 인지되고 있다. 생각을 하는 사람이니 백신 효과를 극대치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백신은 한 번 맞았다고 해서 평생 효과를 보는 것이 아니듯 우린 계속 철학적 사고를 해야 정신적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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