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 경험론/인생

인생이 힘든 이유

_교문 밖 사색가 2022. 6. 23. 14:45

인생이 힘든 이유

 

 

급변화에 적응하라. 그렇지 않으면 40대부터 사라진다.

 

 

얼마 전 같은 직장에 다니던 한 살 많은 형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같은 직장에 다니다가 이직을 해서 자리를 잡은 동갑내기 동료도 다시 새로운 직장으로 옮겼다가 쫓겨났다는 소식도 함께 들었다.

 

당연히 이들은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할거다. 자식이 있고 빚쟁이 삶에서 자리 잡고 결혼하고 카니발도 샀다고 자랑도 했으니 그런 삶을 유지해야 하는 것도 있고 그러니 말이다.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가정을 어떻게든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 남들에게 그래도 어떻게든 잘살고 있는것처럼은 보여야 한다는 이런 사사로운 이유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은 먹고 사는 문제는 와이프들에게 전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은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없다. 이들은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겠지만 현실은 그렇다. 30대와는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하는 40대를 준비하지 않아서 퇴사를 했으니 결론적으로 이들은 인생을 와이프에게 암묵적으로 전가를 한 것이다.

 

이들이 생계에 대한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었다면 분명 40대를 준비했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옆에서 그렇게 20대때부터 준비를 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지했거나 하기 싫어서 안 한 것이다. 

그런 무지한 인간이 지금에 와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겠는가? 하기 싫어하는 인간이 와이프 돈 벌고 있는데 굳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답시고 하기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찾아서 하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또 자신에게 맞는 직장을 찾아 나설 거고 그런 것처럼 보이는 직장에 들어가서 아닌 걸 확인한 후 1년 정도면 나오게 되어 있다. 

 

45년 이상의 평생을 하지 않은 준비를 이제 와서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도 어떻게 할지 모르며, 어떻게 할지 알아도 반드시 잘될 거라는 확신을 가지기 어려우며, 확신을 가지더라도 시간과 돈에 대한 투자를 따질 것이며, 반드시 자신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임에도 불구하고 손익을 따지면서 고민을 할 것이다.

 

결국 지금 있는 자신의 기술을 가지고 자신의 성향에 맞는 직장을 찾게 되어있다. 그리고 이들의 성향에 맞는 직장은 없다. 왜냐면 40대부터는 자신이 다니는 직장에서 분위기를 자신의 성향에 맞게 만들어나가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사람에게 무슨 자신에게 맞는 직장이 있을 것이며,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다고 해도 이미 같은 또래의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에 맞게 만들어 놓은 분위기에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40대의 실업자 신세가 얼마나 위험한지 안다면 자신에게 맞는 직장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와이프에게 기대는 자신의 삶이 부부라는(평등이라는) 이름으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에 가망은 없다고 봐도 좋다.

 

최고의 기대치는 아주 친한 사람이 그것도 자신의 성향과 맞는 사람이 자리 잡아놓은 곳에 들어가는 것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거의 불가능한 방법이다.)

 


 

*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정답은 내가 이 블로그에서 계속 말하고 있는 변화다. 시대가 변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그리고 우린 아직 여기에 적응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부모님 세대가 직장 생활을 오래 하는 것을 봐왔으니 나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거라고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취업한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정년까지 잘 유지하고 다녔다.(부모님 세대) 허나 지금은 40대에 퇴사를 하는건 당연하고(현 세대) 그걸 인지한 새로운 세대는 3년 다니는 것도 직장을 아주 오래 다닌다는 생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걸 인지한 나는 이들에게도 대기업에 다니는 사촌 형에게도 한 10년전에 리더십을 배우라고 했다. 허나 역시나 기억은커녕 자신이 부족한 게 무엇인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아직도 재취업을 하지 못하고 명예퇴직해서 주는 혜택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3년 정도 퇴사 기업에서 외주업체식으로 일거리를 준다고 하는데 1년 남았는지 모르겠다.)

 

40대는 일은 잘한다, 기술이 좋다, 라는 개념은 기본이다. 그게 우수한 덕목이 아니라는 거다. 근데 다들 여기에 머문다. 20년 일한 사람이 일 못하면 그건 당연히 쫓겨나는 거다. 20년 일한 사람이 기술이 없다는 것도 당연히 쫓겨나야 하는 거다.

 

 

▼ 사촌 형 사례

 

40대 이후 재취업이 힘든 이유 (40대 이후가 위기인 이유)

40대 이후 재취업이 힘든 이유 40대가 되어도 대학 졸업장 하나로 인생을 계속 이어가려는 사람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한 8년전 쯤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자리에서 대기업에 다니는

blog.daum.net

 

 

 

[갤럭시 노트 9] 시골은 변화가 없다. 시골도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농기계의 발전과 집을 리모델링 하는 정도지 근본은 변하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는 큰 괴로움은 없다. 단지 지루함만 있을뿐. 지금 세대는 급변하는 도시냐? 변화없는 시골이냐? 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듯 귀농을 하고 다시 돌아가는 과정을 겪고 있는듯 하다. 괴롭지만 최대한 버텨보며 재밌는 삶이냐? 편안하지만 지루함을 견디느냐의 싸움인것이다. 허나 변화에 적응한 자들은 재밌는 삶을 살면서 휴가와 주말을 편안한 자연에서 누릴 수 있을거다.

 

 

 

[키미션 80] 로마에서 열린 축제다. 유럽에서 관광업 2위인 이탈리아는 변화가 없다고 봐도 좋을거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어린 아이부터 할머니들까지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축제를 이어가고 있다. 이런 이벤트가 있다면 우리 시골도 3세대가 어우려지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참고로 9월에 열린 이축제는 검색을 해봐도 찾을 수 없어서 축제 이름을 모르겠다. 난 로마는 몰라도 이 축제는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걸 모를 리 없는데 왜 이들은 리더십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가?

 

보이지 않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는 사람 있는가? 자유는? 정의는? 없을 거다. 그러니 이런 것을 생각해본 사람들이 40대 이후를 책임질 수 있게 되는 거다.

 

사람 손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해야 하는 80년대의 직장이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자동화, 기계화가 되면서 사람의 손이 필요 없게 되어버렸고 그러면서 40대 이후는 함께 일을 함에 협동이 가능하고 부서의 활력을 돋우며 같은 목적을 향해서 일을 하는 즐거움을 이끄는 사람들이 필요해졌다. 이제는 돈을 벌기 위해서 직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기계와 컴퓨터에 의해서 대체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잘못된 혹은 기존 세대의 회식문화를 답습해버렸고 억지로 화합을 유도하고 권위로 누르려고 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새로운 세대들은 적응 하기 조차도 싫어하게 되어서 3년도 오래 다니는 것이 직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라도 혹은 잘못된 방식이라도 화합을 유도한 사람이 살아남았다. 뭐라도 하는 사람이 살아남는 거다.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이 일만 하고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냥 무(無)다. 그러니 사라지는 거다. 허나 새로운 세대는 잘못된 방식에 반기를 들어서 3년도 다니지 않는다는 무기로 대응을 해서 현재는 새로운 리더십을 요구하는 사회가 되었다.

 

결국 리더십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구체화해서 생각하고 결과를 내어서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하는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호모 사피엔스고 약자의 위치에서 살고 있던 동물 사회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살아남은 방법이다.  

 

이들이 쫓겨난 이유는 하나같이 직장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해서다. 그전에는 잘 어울리다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바로 나이 때문이다. 40대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바라는 것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바로 존중감이다. 존중을 받고 싶다. 흔한 말로 표현하자면 나이대접을 받고 싶어 한다.

 

나도 이런 경험을 동네에서 겪는데 아이 둘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는 아버지에게 내가 내리면서 인사를 하고 내리니 그 아이 아버지가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내 인사를 받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다. 아무리 늙게 봐도 30대 후반인데 40대인 나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것도 아닌 인사를 받는 제스쳐를 취한다는 것은 별로 썩 기분 내키지는 않았다.

 

하물며 계속 직장 생활을 하는 이들은 어떻겠는가? 나이는 들어가지만 진급에는 한계가 있는 직장 생활에서 되려 오랫동안 봐온 사람들은 더 무시를 하는 일을 겪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웃음과 행동이 나오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언제부턴가 눈꼴 사나 온 행동과 말들이 오갔을 것이고 그것이 쌓이면 이런 불경기 때는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잘 어울리는 것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기도 하다. 젊다는 것 자체가 무기이기도 해서 이런 공통점만으로도 잘 어울려 보이는 효가가 있었다. 허나 40대부터는 더 이상 젊지 않다. 늙었다고도 하기도 그렇지만 젊지가 않다. 변화의 시기가 온 것이다.

 

이런 변화의 시기를 돌파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리더십이고, 리더십은 젊은 세대를 생각하고 살았다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40대를 살아가게 하는 당연한 무기다.

리더십은 나를 따르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주변 사람들을 압도 하지만 든든하게도 하면서 내 중심으로 웃게 만드는 힘이 있다. 허나 이들은 이것을 준비하지 않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보였으면 했을까?

 

우리의 최초?의 고통은 이유식이다. 모유를 먹다가 이유식을 먹으라고 하면 우린 운다. 심지어 젖병을 물다가 그 편리함에 익숙해져서 엄마젖을 물려고 해도 회피한다. 허나 먹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면서 적응을 하려고 한다.

기저귀도 그렇다. 용변을 막 싸다가 기저귀를 때야 할 때는 용변을 가려서 해야 하는 고통(스트레스)을 느낀다. 요즘은 이런 과정이 아기들에게 무의식 중에 트라우마로 남아 성격이 이상해진다고 해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기저귀를 때는 시기를 기다리기도 한다고 한다. 6살이 되어도 말이다.

그리고 어린이 집에 가면서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을 어려워하지만 적응을 하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사귀는 고통과 과거의 유물 같은 선생들의 부조리함에 치를 떠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다가 대학의 자율성에 혼란을 느끼고 개그우먼 고 박지선은 적응을 하지 못하고 친구 따라 공부하다가 교생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직장에 들어가면 최고의 고통인 진짜 현실의 삶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고통의 과정이기에 우린 미리 준비를 하기도 하고 준비가 되지 않아도 곧 적응을 하거나 하려고 노력을 한다.

 

허나 40대 이후의 삶은 모른다. 취업을 하면 이직이나 진급 정도가 눈에 보이는 변화의 수준이지 더는 큰 변화는 없다고 생각을 해서 준비는커녕 적응조차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40대부터는 학교에서 배운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써먹는 것은 30대까지다. 

 

내가 이들에게 리더십이라고 말을 했지만 이들은 아마 기억조차 못할 거다. 자신들이 쫓겨난 이유는 사회 부조리 때문이거나 저년이나 저놈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생의 고통은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것이어서 살기 위해서는 견디고 적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40대부터는 알 수가 없다. 누가 말해줘도 모른다. 알기 싫어서다. 받아들이다고 해도 어떻게 할지 모른다. 하기 싫어서다. 리더십에 대한 덕목은 서점, 영화, 유튜브 등등의 매체에서 얼마든지 알 수 있다. 근데 안 한다. 이들은 본 적이 없기에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완전히 모르는 것은 다 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행복, 정의, 자유, 사랑, 평등 등등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봤다. 직장에 40대를 훌쩍 넘어도 안전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실장님을 10년 이상 같이 다녔으니 본 거다. 본 정도가 아니라 경험을 한 거다. 근데 이들은 보지 않았다. 40대의 인생을 생각해본 적도 없고 자신들은 늘 안전할 거라고 여기며 위험하다고 해도 나 같은 착한 사람은 괜찮을 거라는 안이한 확신감이 이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들은 봤지만 지금 이 순간도 인지하지 못할 거다.

 

내가 예를 든 전 직장 동료와 사촌 형 그리고 간략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취업까지의 과정을 보자면 인생이 왜 고통의 연속인지를 알 수 있을 거다.

 

결국 변화다. 각 과정을 옮길 때마다 우린 적응을 해야 한다. 그 적응의 과정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도 인생이 힘들다고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허나 이것이 인생인 것이다.

 

 

 

작년에는 '마틸다'라고 이름을 붙인 고양이가 새끼를 낳고 우리집 마당에서 새끼를 길러 나갔다. 올해는 '엘리자베스'라고 이름을 붙인 고양이가 3마리의 새끼를 낳고 우리집 마당에서 새끼를 길렀다. 그 중 첫째(?)인 '루피'가 이제 독립을 하고 숨어들은 곳이다. 루피가 힘든 이유는 어미가 없는 변화된 삶에 적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찌저찌 두달간 배운 사냥 기술을 배워서 살아가야 한다. 근데 아직도 미숙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런곳에 숨어서 엄마를 부르고 있었다. 그 소리가 없었으면 난 루피가 여기에 숨어 있었는지도 몰랐을거다. 잠시 기를까도 생각했지만 먹이를 앞에 두고 다음날 보니 다먹고 사라졌다. 혼자 살아가야 하는 변화된 삶을 잘 적응해서 살아가길 바란다. 

 

 

 

적응을 잘하는 사람들은 고통이 적거나 심한 경우는 도전을 즐긴다. 허나 적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고통의 강도는 세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살을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40대 남성 자살률도 세계 1위인 이유는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래서 그런가 우린 애써 40대 이후의 인생에 대한 적응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대체로 직장 적응이 마지막 단계고 이직해서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는 정도가 연장선에 있는 것일 거다. 결국 20대 사회 적응이 마지막 단계라고 보는 거다. 그리고 30대는 아직 팔팔하다는 생각에 20대와 다름이 없는 과정으로 여기고 적응을 포기한다.

 

난 그래도 좋다고 본다. 단 40대에 죽으면 말이다. 예전에는 평균 수명이 40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단계라고 보지만 이제는 80세가 기본값인 시대인데 다시 말해서 30대는 40대 이상을 준비하는 중요한 시점인데 사람들은 그걸 그냥 흘려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요즘 사람들은 더 젊게만 보이려고 노력을 해서 40대에 30대 같다는 소리를 듣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 같다. 마치 외모만큼은 30대로 머물러서 40대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의지가 보이는 것도 있다고 여겨진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삶을 적응하는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안티에이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늙은이 취급을 받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 싶어서 그러는 건 확실하다고 본다.

 

 


 

 

그럼 안티에이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피터팬을 꿈꾸는가?

 

 

외모가 늙어 보이면 주변 사람들의 처우가 달라진다. 옷가게를 가더라도 음식점을 가더라도 백화점을 가더라도 말이다. 젊음이라는 상실을 느끼는 고통은 우울증을 유발한다. 심하면 자살도 한다. 여기에 갱년기까지 겹치면 마음속에 폭풍이 일어난다. 여기에 자식의 사춘기까지 겹치면 가정에 폭풍이 일어난다.

 

어쩌면 요즘 사람들이 운동을 하는 건 얼굴도 중요하지만 몸매도 중요해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늙음에 신체기능이 떨어지는 것도 늙음의 척도이기에 여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일수도 있다. 나 또한 그걸 중점으로 두고 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허나 신체가 30대처럼 보인다고 해도 우리는 결국 나이를 먹는다. 직장은 젊어 보이는 것에 대해서 좋게 보는 수준이지 그 사람의 나이와 경력은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 나이에 맞는 대처는 어쩔 수 없는 필수다. 결국 눈에 보이는 고통에 대한 대처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대처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자신들보다 더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진 네안데르탈인을 말살하고 지상의 최상위 포식자가 된 것은 바로 언어이고 그 언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는 힘이 있었으며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는 힘은 사람들을 모으고 결집시켜 집단행동을 하게 해서 그런 거다.

 

그러니 우리가 존중이라는 것을 받아서 사회적으로 자긍심 느끼고, 가정으로부터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 살려고 한다면 40대 이후로는 호모 사피엔스 후손 다운 능력을 발휘해야 할 시점에 온 것이고 비교적 안정적 구간인 30대는 리더십을 준비해야 할 중요한 시점인 것이다.   

 

과거에 사회 변화의 속도가 느릴 때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져도 되는 것이라고 여겨졌던 리더십은 이제는 거의 모두가 가져야 한다. 안 그러면 쫓겨나고 먹고살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모아 둔 돈 다 써버리는 불상사가 생기기 때문이다.

심지어 핵가족이 되고부터는 가정을 이끌기 위해서는 리더십이 필수다. 가정을 함께 만들어가는 거라고 말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힘들 땐 내 책임을 너에게 맡기겠다는 심보라고 봐도 좋다. 함께는 없다. 리더가 이끌고 의견을 수렵하는 것이 함께인 거지 리더 없이 함께라는 개념은 이글에서의 퇴사자들처럼 나는 이제 끝났으니 와이프 보고 돈 벌어오라는 사람과 다를 게 없다. 이들의 함께는 이런 것이다.

 

아마 안티에이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피터팬과는 반대방향인 인간의 이상형이 되어가고 있는 중일 거다. 외모, 지식, 지성, 능력 등등을 다 갖춘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건 보통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인 것이다.

 

과거에는 예쁜 사람은 공부를 못하고, 못생긴 사람은 공부를 잘한다는 이론이 성립했고 내 초등학교 때도 그랬다. 그래서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이건 평등을 뜻한다. 완전한 평등은 아닐지언정 균형을 맞추는 힘이 있다. 허나 요즘은 예쁜 사람들이 공부도 잘하고 능력도 좋다. 타고난 미모는 아니어도 공부도 잘하고 능력도 좋은 사람들이 외모에 더 신경을 쓰고 금전적 여력도 있으니 예뻐지는 것도 있을 거다.

 

인간이 점점 더 완성형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가? 이건 왠지 불평등하게 여겨진다. 허나 누구에게도 따질 수 없다. 노력해서 얻은 것에 대한 것을 누가 따질 수 있는가? 그리고 이들은 계속해서 노력하여 더 가지고 다 가진다. 요즘은 그야말로 뚱뚱하고 못생긴 사람일수록 능력 없고 핑계 많고 투덜대고 사회만 원망하는 세상 같다. 내 어릴 때는 외모가 좀 못나면 공부 잘하게 생겼다는 말을 칭찬 삼아했던 시절도 있었다. 진짜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말은 어디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불평등은 사회불안을 야기한다. K-페미니스트들이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4B라고 해서 비연애, 비섹스, 비혼, 비출산을 지향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 K-페미니스트들의 외모는 거의 남성형에 가깝다. 그것도 못생긴 남성.. 어쩌면 이들이 적대시하는 존재는 남자 자체가 아니라 다 가진 여자들이거나 그 여자들만 좋아하는 남자들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니 성으로 돈을 버는 레이싱모델이나 스트리머들에게도 가차 없는 공격을 하니 말이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이런 완성형 인간을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 직장에서도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40대가 되면 리더십을 가진 사람을 바란다는 것이다. 사회가 완성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니 사회에 속한 직장에서도 더군다나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존재를 두고 나머지들은 A.I.로 대처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섭리인 것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존재는 사람이 경쟁 대상이 아니다. A.I. 가 경쟁대상이다.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뇌과학 박사 정재승 교수는 자기과 학생들에게 인문학 서적을 500권을 읽어서 리뷰 영상을 각 권마다 2시간 정도 제작하라고 했다고 했다. 어차피 지식은 줄세우면 A.I.가 1등이니 인간이 이길 수 있는 방식은 결국 인문학이라고 생각해서 내린 방식이라고 했다. 이게 효과를 거두면 카이스트 전교생들에게 적용을 시키려고 자기과 학생들에게 시범적으로 한다고 했다.

 

이런 사회가 된 것이다. 과학, 수학 공부만 하다가 갑자기 인문학을 공부(생각) 해야 하는 카이스트 학생들은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것도 500권이나 말이다. 허나 이것을 극복해야 A.I. 에 맞서는 인간으로 진화를 하는 것이니 당연히 해야 할 것이다. 이들의 경쟁자는 A.I. 니까. 

 

반면 인문학자들도 이제는 과학적 지식을 모르면 대화가 안 되는 세상이 도래했다는 것도 증명이 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정재승 교수의 방식을 적응한 진화된 학생들이 대거로 사회로 배출되면 1년 차이라도 인문학을 하지 않고 지식만 배운 과학자들은 결국 이들에 의해서 좌천될 것이다. 지식만 있는 과학자와 지식과 인문학 교양이 있는 과학자는 천지 차이니까.

 

보라. 지금의 세상이 이런 세상인데 40대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출퇴근만 하는 것은 대놓고 40대는 나가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칼 세이건은 인문학 소양이 뛰어난 천체학자로 유명하다. 코스모스가 그 증거라고 볼 수 있다. 허나 칼 세이건을 질투한 물리학자들은 칼 세이건을 폄하하여 저널리스트 정도 수준이라고 낮춰 불렀다. 허나 우리가 아는 과학자는 결국 칼 세이건이다. 그를 욕한 과학자는 누군지조차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내가 볼 때 연예인 중에서는 이 둘이 가장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같다. 김혜수는 이별후에도 시상식에서 자연스러운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별이 성숙한 사람은 인간적으로도 성숙하다. 차승원의 인격은 다들 잘 알것이다. 이런 사람이 요리까지 잘한다는 것은 행복의 의미를 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존재는 불평등을 야기하지만 누가 탓할 수 있으랴.. 노력해서 얻은 것이니 말이다. 노력하지 않는 우리가 잘못인거다. 이들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 사람들이라고 본다.

 

 

 

[갤럭시 노트 FE] 우리 동네에 강연하러 왔을 때의 모습이다.

 

 

우린 태어날 때부터 고통을 겪고 적응하고 극복하면서 살아왔다. 단지 그 과정이 20대에 취업을 하면 끝이라고 생각을 해서 더 이상의 진화를 생각하지 않아서 좌천된 것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리더십에 대한 역할은 저변 확대되어 우리의 영역에 들어왔다. 리더십은 거의 마지막 단계의 변화의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 안에서 50대, 60대의 방식에 대한 차이점이 있을 뿐. 어쩌면 나도 50대가 되어보지 못했으니 보지 못하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생각이 드는 건 다음 세대를 위한 '희생'이라는 덕목이 우선 떠오른다. 허나 희생은 거의 죽음에 앞둔 자의 덕목이라고 생각이 되니 70대 이후로 잡아도 좋을 듯하다.

 

아무튼 이렇게 급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필요한 덕목을 찾아서 배움을 게을리하지 마라. 급변화는 인간에게 완벽을 요구하고 있다. 그에 적응하는 자들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며 굳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능역이라도 외모가 뛰어난 사람, 같은 외모라도 인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사람, 같이 인문학적 소양이 뛰어나더라도 목적의식이 뚜렷한 사람, 함께 목적의식이 뚜렷하더라도 리더십이 있는 사람을 찾는 게 지금의 급변하는 세상이다.

 

그러니 이점을 인지하여 세상에 적응을 게을리하지 마라. 안 그러면 세상에서 낙오되어 방구석에서 탈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일 잘한다. 기술이 좋다는 건 40대 이후부터는 기본 중에 기본이다. 여기에 머물러 있으니 인생이 괴로운 거다. 이제 대한민국은 대충대충 사회가 아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G1MC5LdfE8

누리호의 성공은 대한민국이 더이상 대충대충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라고 본다.

 

 

[갤럭시 노트 9] 비온뒤 남해. 이런 곳에서 직장 걱정없이 차별없이 이탈리아처럼 3세대가 어우러져 축제 준비하면서 살면 행복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