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쌓기/런던살이 2023-24

Day 162 런던살이ㅣ26. January. 2024

_교문 밖 사색가 2024. 1. 27. 09:32

Day 162 런던살이ㅣ26. January. 2024

 

무단횡단이라는 이 행위는 우리가 많은 제약을 받으면서 살아감에 있어서 아주 약간의 희열과 자유를 느끼게 해주는 거 같다.  

 

[Galaxy A34] 알고보면 우리는 신호등의 명령에도 복종하고 사는 시스템에서 살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그 규칙은 안그래도 힘든 우리의 삶을 느껴지지 않게 더 지치게 만드는 것 같다.

 
사람들이 이상증상을 보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뼈대인 정신을 만들지 못해서고 두 번째 이유는 밀실의 자아를 만들지 못해서다.
 
플라톤은 세상을 크게 이데아와 현실 세계로 나누었고 이데아가 진짜 세계고 현실 세계는 가짜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이 이론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이데아를 정신의 존재 세계로 보고 있고 현실을 그 정신을 이어받은 존재자의 세계로 보고 있다.
 
무단 횡단의 문화를 보면 인간의 판단력과 자유에 대한 개념으로 만들어진 현실 문화다. 그걸 받아서 움직이는 자들은 그 정신을 흡수한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그럼 판단력과 자유에 대한 개념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존재 자체다. 존재라는 것은 실체가 없어도 있는 것을 말한다. 자유, 정의, 사랑, 평화 등등의 개념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이나 다른 문화적인 통로를 통해서 이런 개념을 흡수하고 그것을 자신이 사는 사회에 적용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개념에 해당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런 개념이 별로 없다. 철학이 없어서다. 교육을 지식으로만 치부하니 철학을 만들지 못했고 철학 자체를 모르니 수입을 해서 개량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거의 올바른 정신을 강조하는 것으로 버티다가 물질 사회의 진입으로 인해서 무엇이 올바른 것이 의미를 깨닫지 못해서 무너지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개인의 삶의 중요성이라는 쓰나미가 닥치니 갑질을 롯데리아에서도 하는 민족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전쟁과 가난과 일제강점기의 치욕과 공포 서러움 등의 감정으로 이데아를 형성했고 그런 감정을 흡수한 존재자들이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하지만 이제 전쟁도 잊었고, 가난은 먼 나라 얘기가 되었으며, 일제강점기는 기술의 발전과 부의 축적으로 극복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데아가 없다. 그래서 흡수할 철학이 없으니 사람들은 너도 나도 갑질을 하고 싶어 한다. 이제 우리에게 이데아는 크게 학력에서 이어지는 삼성이나 해외 직장 혹은 연봉 1억 이상의 직업과 몸짱으로 이어지는 외모 문화, 그리고 그냥 돈 자체가 많아서 일을 하지 않아 되는 삶을 꿈꾸는 것이 이데아가 되었다. 
 
원래는 이것이 현실에 있어야 할 것들인데 빈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원리로 인해서 이데아로 흡수가 된 것이다. 학력, 돈, 외모가 이데아가 된 세상에서는 자유와 평등과 정의와 사랑과 존중과 배려와 중용 같은 철학은 이제 탄생해서 자리 잡을 여유가 없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피난처는 있다. 밀실의 자아라는 공간이다. 인간은 크게 광장의 자아와 밀실의 자아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광장의 자아에서는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인간이라는 보편적 자아를 드러냄으로써 사회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삶은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삶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밀실의 자아가 필요하다. 그곳에서는 뭘 해도 타인에 대한 간섭만 없다면 다 해도 괜찮은 공간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볼 때나 안 볼 때나 한결같아야 한다는 문화가 잡혔다. 그래서 자아를 분리시키는 능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가부장적인 집은 아버지의 직업적 성향으로 가정을 이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직장생활에서도 그런 사람을 강조하는 경향도 있다. 그래서 사생활도 관리하는 문화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낯선 문화는 아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이런 삶을 지쳐하게 되었고 분리된 삶을 지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몰라서 어처구니없게도 인스타그램에 노출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그것이 직장과 분리된 삶인 건 맞지만 밀실까지 들어가는 자아는 아닌데 말이다. 익숙하지 않은 거다. 말 그대로 밀실이니 아무도 본 적이 없기에 따라 할 무언가를 얻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인 거다.
 
밀실의 자아는 광장의 자아나 혹은 남들이 나를 보는 이미지대로 살아가기 피곤할 때 들어가서 남들이 보는 자아를 드러내고 그 감정을 충분히 소비하는 공간을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행위가 자위인데 우리나라는 성문화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바람에 밀실에서도 그 자아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는 경향도 생기게 된다. 그래서 차라리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나이키 한정 상품을 사거나 하는 행위로 풀어버리는 경우도 생기게 되는 거고 최악은 여성혐오로 이어지게 된다. 이건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건 여성들이 원조고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배운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성은 여성들에게 먼저 차단당한 밀실의 자아였고 그래서 남성들보다 먼저 자신의 감정을 소비하는 형태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명품 문화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것도 탄생 이유의 하나이다.
 
 
유재석은 삶의 방식을 자신의 경험과 많은 독서로 흡수해서 그 방식대로 살아가는 존재자 같다. 하지만 이선균은 학교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냥 좋은 사람으로 살아간 거 같다. 이 모습이 보통 우리 모습이다. 광장의 자아로써 살아가다가 지쳐서 쉴 곳이 필요했는데 완벽한 밀실을 찾지 못해서 그곳에 누군가를 초대해서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밀실의 자아를 용납하지 못했고 가면을 고쳐 쓰고 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하지만 엉뚱한 곳에서 자신의 공간이 털려버리고 광장의 자아는 밀실의 자아를 용납하지 못했다. 광장의 자아는 나 혼자만의 자아가 아니다. 나를 그런 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 포함한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이는 밀실의 자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자아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밀실과 광장의 자아 철학이 들어와서 그 밀실에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를 대중에게 설득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알려지고 논쟁과 토론이 되기까지 했더라도 이선균은 최소한 자살은 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이선균의 죽음이 우리에게 영향을 오래 미치는 이유는 국가와 사회가 살아가라는 대로 살아가면서 착하게 살고 후배들 잘 챙기고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잠시의 여유도 허용하지 않는 사회의 배신 때문이기 때문이다. 승리는 잘 살아가고 이선균은 자살을 선택해야 하는 착한 사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삶을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401260753367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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