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쌓기/런던살이 2023-24

Day 144 런던살이ㅣ08. January. 2024

_교문 밖 사색가 2024. 1. 9. 09:49

Day 144 런던살이ㅣ08. January. 2024

 

자기 계발만 판치는 도서시장에서는 책이 많이 팔린다고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다. 

 

* 성룡이 악당에게 당할 때 진짜 극악무도하게 당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나는 분노심을 느꼈다. 그리고 성룡의 복수로 카타르시스를 느꼈던거 같다. 이때의 액션에는 감동이 있었다. 거기에 블랙팬서 같은 CG 액션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물질 사회는 인간의 감정과 교환된 사회 같다. - 영화 '취권' -

 

 

오늘 런던에도 눈이 왔다. 그냥 싸라기눈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눈으로 볼 때 좋다고 느끼기에는 부족함은 없었다. 그래서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동네산책을 나가보았다. 일행이 도서관에 간다고 해서 지하철 역까지 함께 가서 동전으로 오이스터 카드 충전을 하고 집으로 다시 향했다. 지하철을 나올 때 어느 남성은 인상을 쓰고 들어왔다. 눈을 보는 시각은 이렇게 다르다. 나 역시도 직장 생활할 때는 눈을 그리 좋아했던 건 아니었던 거 같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20대였는데 그때는 아무나 하는 말이나 하고 죽은 성철 스님은 진짜 대단한 사람인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산은 그냥 산인데 내가 그 산을 좋다 생각하는 것이고 어떨 때는 나쁘다고 생각하게 되는구나..라고 깨닫게 되었다. 다 인간의 마음에 따라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것이지 스마트 폰이 마냥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튼 사람은 이렇게 감정을 느껴야 한다. 그것이 부정적이 감정이든 긍정적인 감정이든 간에 말이다. 최근 일행의 에세이 방향을 문학으로 할지 도덕으로 할지를 고민했다고 했다. 일행은 방향을 도덕으로 잡았지만 나는 문학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무빙이라는 드라마를 봤다. 하지만 무빙은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같은 시점에 본 애니메이션은 푸른 눈의 사무라이였다. 이건 다시 보고 싶다고 했다. 당시는 서양 작가가 만들어서 그런가 사무라이 정신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서 다시 봐야 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 두 TV 시리즈의 차이는 문학적 관점의 차이였다. 문학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첫 번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감정을 느껴야 하고 감정이 순환하지 못하고 비어있거나 단순한 감정만으로는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감정의 부재로 인해서 자신도 모르게 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문학 작품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살아왔지만 다행히도 나는 미국 드라마를 통해서 감정에 대한 순환을 많이 느끼고 살아왔다. 그 대표적이 드라마가 바로 ER이라는 드라마다. 그래서 나는 메디컬 드라마가 나한테 맞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감정이 살아 있는 드라마가 나한테 맞는 드라마였다. 마블의 데어데블 시즌 1과 3도 꽤 좋은 작품이다. 선행으로 눈을 잃은 소년이 성장을 함에 악당의 손에서 초인적인 힘을 얻게 되고 아버지와 같은 스승을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상황과 사회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이 함께 섞여서 살아가는 히어로 이야기는 여타 다른 마블 시리즈와는 다른 행보를 걸었다.

 

이런 드라마를 보면 감정의 순환이 일어나고 대리만족이 일어난다. 결국 뇌는 현실과 상상을 구별할 줄 모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으로 인해서 현실로 돌아온 순간 좋은 감정은 좋은 대로 남고 나쁜 감정은 그게 내 현실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감정으로 남게 된다. 이런 감정의 순환이 있어야 친구와의 사이도 직장동료들과의 사이도 원만해질 수 있다. 더 좋은 건 서로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경지까지 갈 수 있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여명의 눈동자가 우리나라 최고의 드라마라고 했다. 극강의 감정을 끌어올렸던 드라마 같다. 영화로는 70~80년대 나온 오신 영화가 있는데 김민희라는 배우가 어릴 때 주연을 한 영화다. 내용은 엄마 찾아 삼만리와 같은데 어린 나이에 엄마 찾아서 세상사 다 겪으며 결국에 엄마를 찾아서 만났을 때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진짜 펑펑 울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사회규칙에 의해서 다시 혼자가 되어 돌아가는 내용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이런 감정이 있을까? 분명 사람이니 일곱 개의 감정 그릇은 있을 거다. 하지만 요즘은 삶의 획일성으로 인해서 다들 감정이 단순화되었고 그마저도 크게 채우지 못할 거다. 그러니 그나마 아는 즐거움이라는 감정이라도 가득 채우기 위해서 클럽을 가고 마약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청소년 마약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쉽게 된다. 나 때는 그냥 친구들이랑 노는 것이 좋았는데 요즘 어린 친구들은 그런 감정도 모르고 살았을 테니 청소년이 되면 메마른 감정에 대한 고통으로 인해서 마약에 손을 대게 된다고 합리적 유추할 수 있다. 그러니 가정의 행복이 이렇게 중요한 요소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이 리더십을 가지고 가정을 이끌어가는 힘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함께 하는 것이 생기는 것이지 절대 책임을 미루는 가정에서는 함께가 불가능하고 그런 가정은 불안을 안고 살아가게 되어 있다.    

 

결국 문학이 재역할을 하지 못하고 드라마나 영화도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재미만 추구하고 역사나 운운하는 수준에 머무니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감정을 채울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무빙은 감정이 없다. 능력을 가진 자들의 삶에서 느껴지는 뭔가가 아무것도 없다. 국정원의 졸개로 살아가는 자들의 어려움 정도다. 마치 지금 직장인의 어려움을 그냥 표현한 정도다. 차라리 미생을 보는것이 백번낫다. 능력에 대한 고찰이나 사명감과 눈을 피해서 살아가는 삶의 애환은 없다. 오직 있다면 연애 감정만 있다. 그마저도 그리 설득력있게 와닿지는 않는다. 하지만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전국시대(?) 때 서양인의 사생아로 태어난 자의 억울한 삶과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모르는 할아버지에게 붙어서 시종을 들며 칼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어쩔 수 없이 남장을 하고 살아가야 하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의 복수를 위해서 검술을 배워야 하는 그래서 때가 되어 드디어 복수를 하러 가는 자의 감정을 알 수 있기에 다시 보고 싶었던 것이다. 거기에 처음에는 악인이었던 사무라이도 어릴 때는 사회가 그렀으니까 주인공을 괴롭혔던 거고 커서는 꽤 괜찮은 사무라이로 성장해서 정정당당함을 보이기도 하는 면모는 인간사를 아주 잘 반영한 연출로도 보였다. 

 

이제 우리나라는 연애도 제대로 못하는 나라다. 그러니 사람들은 감정이 죽은 채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것은 너무 자명하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미세먼지 속에서 사는 것보다 더 힘들다. 우리 집 옆집에 이사 온 분은 내가 인사를 해도 위아래로 꼴아본다. 그래서 이사를 적극적으로 생각한적도 있었다. 일행의 아버지도 지금 아파트 위치가 좋아서 계속 살고 싶지만 이사 오는 사람들이 이제는 좀 그렇다며 이사를 한 번씩 생각하신다고 한다. 

 

법대로 살고 규칙대로 사는 세상은 정말 각박하다. 롤스로이스를 타고 사람을 죽여도 죄의식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세상이 좋다고 생각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은 인정과 상식과 도덕과 윤리의식으로 돌아가야 살만한 세상인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정부터 다시 불을 지펴야 할 거다. 

 

역시 세상이 이렇게 된 건 인문학자들이 게을러서 그런 거였다. 게으른 선은 뭐다? 부지런한 악보다 더 악한 거다. 악이 번성하는 이유는 선이 게을러서 그런 거니까.  

 

(side talk)

 

점심때 위의 이야기를 하면서 일행이 영문과를 나온 것이 생각나 물었는데 학교에서는 셰익스피어를 다 외우게 해서 빈칸 채우기 시험으로 공부를 했다고 했다. 작정한 문학과가 이렇게 배우는데 우리는 도대체 감정을 어디서 채울 수 있을지 난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