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쌓기/런던살이 2023-24

런던살이 Day 70 (2023.10.26)

_교문 밖 사색가 2023. 10. 27. 09:46

런던살이 Day 70 (2023.10.26)

 

누구나 처음에는 생각도 없고 의지도 없다. 하지만 25살이 넘어서 생각 없이 살고, 30살이 넘어서 의지 없이 산다면 40대 때는 반드시 억울한 삶을 살게 된다.  

 
 
나는 그림을 모른다. 그래서 굳이 따지자면 싫어한다는 쪽에 가깝다. 그림을 볼 바에야 다른 재밌는 것을 하는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이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하지만 런던에 와서 내셔널 갤러리를 안 들리고 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너무 유명한 그림들이 즐비해서 그 자체가 유명한 명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소라고해서 세인트 폴 대성당처럼 건물이 그렇게 웅장하거나 예쁜 것도 아니다. 즉 내셔널 갤리는 그림을 좀 아는 사람들이 와야 재밌는 곳이라는 뜻이다. 즉 나도 여기를 오는 이유가 유명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2016년도에 런던에 처음 왔을 때도 그랬다. 유명했으니 왔지 아니면 오지 않을 곳이었고 파리 오르세 미술관도 같은 이유로 갔다. 
 
그렇다면 이건 내 자유의지가 맞는 것인가? 사람들은 자기자신이 스스로의 의지로 산다고 착각하지만 우리는 의지는커녕 생각하는 대로도 살지 않는다. 즉, 내가 내셔널 갤러리를 가는 이유는 사람들의 많이 가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일 뿐이라는 거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 내셔널 갤러리를 가는 이유는 나를 아는 사람들의 속의 나의 자아 때문이다. 내가 런던에 살았다면 분명 누군가는 내셔널 갤러리를 가봤냐고 할 것이고 그림에 취미가 없어서 안 갔다고 하면 그 친구와의 대화는 좀 식을 것이고 대충 둘러만 봤다고만 해도 살다 온 사람으로서의 태도도 아니기에 역시 대화가 식을 거다.
 
그러니 기왕 유명해서 갈 거면 그리고 내가 타인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그 친구 안에 있는 나의 자아를 더 견고히 다지기 위해서라도 내셔널 갤러리는 자주 가는 것이 좋다. 꼭 일부러 갈 필요는 없지만 별일 없는 시간에 들리는 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혹은 앞으로 나와 같은 친구를 만들기 위한 과정으로 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도 절대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감정이라는 끈으로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는 존재다. 그것이 인간이다. 이런 생각을 깊게 심으면 내가 내셔널 갤러리에 가는 것도 스스로 생각을 하고 가는 것이 되는 거고 지속적으로 간다면 자유의지로 방문을 하는 것이 된다. 나만 생각하는 건 원시인이다. 원시인은 동물과 동급이다. 원시인은 사자가 사냥을 한 초식동물을 사자가 다 먹고 남은 걸 하이에나가 먹고 또 남은 걸 까마귀가 다 먹는 걸 숨어서 기다렸다고 경우 뼈에 몇 점 남은걸 먹는 존재였다. 디지털 원시인이 되려면 차리리 사자처럼 강해지던가, 하이에나처럼 목적에 맞는 사람들이라도 모아서 함께 하던가, 까마귀처럼 작다라는 이점이라도 가지고 있던가 해야 할 거다. 원시인은 먹이사슬 하위의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생각을 해서 올라왔고 의지를 가지고 움직였기에 최상의 포식자가 될 수 있었던 거다.    
 
그래서 오늘도 내셔널 갤러리에 갔다. 의지를 가지고 네 번째 방문을 했고 세 번째 입장을 했다. 오늘을 저번에 봐뒀던 귀를 자른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보러 44번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뜻밖에 41번 방에서 모네의 작품들을 보게 되어서 일단 41번 방부터 다 훑어보았다. 그리고 내 취향을 알게 되었다. 붓터치감이 살아 있는 그림을 보면 내 마음이 편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림을 최소한 30초 이상은 계속 쳐다보고 더 보고 싶다면 그냥 더 보는 방식으로 그림을 봤다. 애써 옆에 설명서를 읽지도 않았다. 영어기에 그거 번역기로 돌려서 읽는 시간까지 더하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감상의 흐름이 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44번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고흐의 작품이 있는 방은 43번 방이었다. 역시나 고흐의 작품은 인기가 많았고 가이드가 패키지 손님을 대동해서 설명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길을 끈 작품은 다른 작품이었다. 그 풍경을 사진으로 찍으면 너무 심심해서 나중에는 버릴 풍경이지만 섬새한 붓터치가 느껴지는 밋밋한 그 풍경의 그림은 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몰입을 시켰다고 해야 하나 집중하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마음이 편안해진건 사실이었다. 일행에게 돈을 주고 살고 싶다고까지 말을 했으니 말이다.
 
그림은 35,000원짜리 유명화가 프린팅한 거로 만족하던 내가 오늘 그림에 살짝 눈을 뜬 거 같다. 오늘은 그림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사소한 얘기를 할 수 있는 날의 시작이다. 유명하다고 해서 찾아가는 것은 생각 없이 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가는 거다. 그래야 최소한 뭐 하러 간지 모르겠다고, 라고라도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성의를 더해서 타인과 대화를 시도해 보려고 자세히 본다면 타인과의 관계를 정성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생각을 더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있는 면을 찾아서 보는 관점을 기르면 좋다. 대화가 건조할 수 있지만 풍성해진다. 여기에 의지를 가지고 끝가지 보게 된다면 그리고 운이 좋아서 나처럼 뭐 하나 발견하게 된다면 타인과 융합이 가능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뭘 할지 모를 때는 본인의 생각과 의지와는 무관한 유명한 곳부터 찾아봐라. 본래 시작은 그렇게 하는 거다. 당신이 뭘 좋아할지 모른다면 그 시작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거다.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면 끝을 볼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굳이 애써 가져다 붙인다면 이것이 까뮈가 말한 반항하는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Galaxy A34] 이런 단순함에 끌리는걸 보니 요즘 내 마음이 복잡한거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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