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없는 국가는 국민을 사람을 죽이는 좀비로 만든다.
모든 생물은 학습으로부터 이뤄진다. 그런 개념으로 본다면 우린 모두 좀비다.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만이 존재자다.
(2023년 8월 6일 최초발행)
◆ 인트로
정유정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신림역 칼부림 살인 사건이 또 발생했다. 정유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죽이고 싶어서 죽였다는 것도 먹고살기 어려우니 그런 것 일 테고 이번 살인 사건도 같은 말을 직접적으로 했다.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학교에서 때리고 싶어서 때리는 학교 폭력의 연장선과 다름이 없다. 그렇게 본다면 학교 선생을 때리는 초등 6학년도 이미 싹수가 보이는 애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둘을 연결해서 보지 않는다. 한쪽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성인의 짓이고 또 한쪽은 아직은 어른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더군다나 초등학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초등학생은 딱히 부모의 지도를 제대로 받기는 어렵다고 봐진다. 그 부모도 자신들의 자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물이라고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최소한 부모가 자식을 통제하지 못하는 수준의 어른이라는 것은 변함없을 거라고 본다. 그러니 이걸 감당 못하는 교사는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 좀비가 하나면 감당이 가능하겠지만 때로 몰려오면 이길 수 없다.
결국 우리나라는 이런 흐름으로 갈거다. 철학이 사라졌다는 것은 국민들이 어려울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좀비가 된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 우리나라 국민들은 과거의 철학에 배신을 당해 철학 자체를 무시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좀비를 올바른 길로 안내할 새로운 철학은 나오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돈과 명품과 몸매 그리고 이걸 아우르는 라이프 스타일을 철학 대신으로 삼고 있는 실정이다.
난 이런 자랑하는 삶을 사는 계층을 '하이브리드 좀비'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난 이들을 나쁘게 바라본다는 뜻은 아니다. 되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때는 이들을 따라하라고 하는 주의다. 지금 시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세상인데 분수에 맞게 한다는 가정하에 이런 거라도 따라 하지 않으면 사람을 죽이는 좀비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을 끄는 수준의 방편이지만 현재 국가가 철학을 가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자의 가치관을 만들라고 한다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세상도 아니고, 가장들 보고 가훈을 만들어서 실천하여 자식들에게 가치관으로 심어주라 해도 못할 건 뻔하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는 노무현 정권이 국가 철학을 세우기 적기이자 적합한 사람이었는데 그 시기를 놓치고 다들 외면하고 살아왔다. 이런 정책은 돈도 안되고 설사 그 때 잘해서 지금 우리가 이런 살인 좀비들이 나타나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아무도 그걸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잘 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스타그램 라이프*라도 시도해보라는 것이고, 내가 기대하는 건 하이브리드 좀비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면 삶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사람이 1,000명 중 1명은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1,000명 중 10명을 그래도 의미 있게 따라 해보려고 할 수 있고, 또 1,000명 중 10명은 다 의미 없다고 조용히 자신만의 삶에 집중하려고 할 수 있고, 또 1,000명 중 100명은 황새 쫓아가려고 하다가 가랑이 찢어지는구나.. 싶어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자랑이 될만한 라이브 스타일을 추구하는 삶
물론 쉽지 않을거다. 그래서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니 대다수 의미 없는 인스타그램 라이프를 살고 있을 거다. 실패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실패를 하는것보다 더 위험한 삶은 실패조차도 없는 아무것도 안 하는 삶이다. 무언가를 시도해서 물리적 실패를 해보야 다른 방법도 찾아보고 다른 의미를 모색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1,000명 중 100명은 감당하지 못할 빚을 져서 인생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더 좋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도 좋지 않은 생각이다.
1,000명 중 200명은 그래도 돈이 있어서 골프를 할거다. 그런 사람들이 골프라도 해야 시장 경제가 돌아가는 효가가 있다. 짐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도 개인적으로도 좋지만 국민 건강은 국가적으로도 좋은 거다. 그러니 캐나다 같은 나라에서는 운동에 쓰는 돈을 국가가 보조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최소한의 효과고 뭔가 다른 의미를 찾아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난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 그러니 다 큰 성인들은 이런 충고를 자신의 삶에 맞게 편집해서 알아듣는 능력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제주도 골프를 치러 가는 인스타그램 라이프 보다가 형편에 맞게 따라 하기 위해 제주도 15,000원짜리 숙소에 묵으면서 올레길 걷는 수준으로 낮춰서 해보는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모든 인생을 그리고 개인 인생의 부분부분을 전부 국가나 타인들에게 책임지라고 하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건 국가의 무책임이 아니라 당사자의 무지 때문이니 당사자 책임이다.
20살 이후는 모두 자신 손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라진 시대다 보니 이런 것도 가르쳐줘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은 30살 이후로 자신의 생각으로 의지를 발휘해서 행동으로 옮겨 사는 사람도 대견해야 하는 세상이 온 거 같다.
◆ 좀비
좀비는 아이티에서 나온 개념이다. 죽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걸 좀비라고 불렀고 여기에 상상력이 더해져서 걸어 다니는 사람이 나왔고 사람을 잡아먹었다. 주술에 걸려서 그런 것이다.
*언데드
그러니 좀비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남의 의지로 움직이며 사람을 해치는 존재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주술이라고 하니 마법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아니다. 우리나라는 이런 주술에 걸려서 다 같이 힘을 합쳐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여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전쟁이었고, 그전에는 일제강점기가 있었고, 그전에는 노비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조선시대가 있었다.
그러니 현대에 들어서 우리는 지도자들의 주술에 걸려서 다 함께 이런 세상을 만들었다. 그래서 난 개인적으로 여기까지 오게 만든 지도자들은 다 위대하다고 본다. 김대중 정권까지가 딱 그렇다고 보는데 이들이 얼마나 쳐 먹었든 간에 이런 지도자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런 풍족한 삶을 살지 못했을 거다. 그러니 과거 복수에 매달리는 정권만큼 한심한 정권은 없다.
이렇게 본다면 국가의 위기가 곧 주술의 토대 혹은 기초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적당한 물질을 쥐어준다면 그 주술이 완성된다. 우리는 실제로 한국전쟁 몇 달 전 토지개혁을 해서 국민들이 자기 땅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한국 전쟁을 극복할 수 있었다. 국민들이 각자의 땅을 다시 찾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싸웠던 것이다. 만약 이승만 전 대통령이 그런 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북한에 대항해서 죽을 듯이 싸우는 정도는 아니었을 거다. 조상 대대로 가져보고 싶었던 내 땅을 이제야 가지게 되었는데 몇 달 지나지 않아서 그걸 북한에게 뺏긴다고 생각하니 그 억울함으로는 살지 못할 거 같아서 악착같이 싸운 거다.
실제로 김일성은 생각보다 빨리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 놀랐다고 한다. 김일정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자신을 환영해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일성은 대한민국에 토지 개혁이 일어나니 모르고 있었고 전쟁당시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이렇게 버티는 힘을 알지 못해서 고심한 거 같다. 어쩌면 김일성이 미리 알았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거 같다. 김일성은 우리나라를 침공했을 때 미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고 침공을 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런 개념으로 주술을 받아들인다면 마법이 아닌 정신분석학 쪽이나 심리학, 요즘은 뇌과학 쪽의 개념이라고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을 거라고 본다.
그래서 국가가 올바른 철학으로 국민들을 물들여 올바른 정책으로 정치를 하면 그 국가는 평온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좀비를 보면 좀비끼리는 해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좀비의 이미지는 사람을 뜯어먹는 행위를 하는 것이니 나는 보통의 사회적 존재들 혹은 상식선이 통하는 보통의 존재들을 '카피본'이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가 하는 말이나 행동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와 학교와 친구들로부터 배우고 익혀서 온 습관으로 나오는 것이기에 우리의 자아는 완전히 독립적이지는 못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자아의 독립을 이룬 존재는 칸트나 헤겔 같은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봐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인간이라고 칭하면 당연히 우리는 이들의 가치관을 답습하고 살아가는 카피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스스로 카피본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상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적 관계를 유연하게 맺을 수 있는 인간들을 사람이라 칭하고 칸트 같은 사람들은 니체가 만든 용어인 위버멘쉬*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봐진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슈퍼맨, 초인으로 해석을 했으나 이러한 해석은 요즘 슈퍼히어로 영화로 인해서 진짜 슈퍼맨으로 받아들여지는 바람에 그냥 위버멘쉬 원어 그래도 사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우리나라를 이렇게 만든 건 첫 번째 철학(주술)은 '착하게 살아라'였다. 내가 어렸을 때 가장 많이 들은 철학이었던 거 같다. 사실 철학이라고 할 것도 없어 보이는 이 단순한 말은 우리나라가 가난이라는 시대를 거치면서 그래도 악에 물드는 것을 꽤 오랫동안 막아준 철학이라고 봐진다.
하지만 이 말의 내막은 '복종하며 살아라'에 가깝다. 시키는 대로 해라와 차이가 없다. 이렇게 접근을 하면 우리나라는 이 철학으로 4,300여 년을 지탱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이 철학이 아니었다면 주 6일 동안 일을 하는 것도 모자라 새벽 2~4시까지 철야까지 하면서 심지어 다음날 정상 출근을 하며 정년까지 일을 할 수 없었을 거다. 그야말로 정신력으로 버틴 삶이었다.
그리고 이 철학의 실천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산업은 눈부시게 발전하여 "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기 이르렀고 올림픽을 계기로 세계에 대한민국은 얼굴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런 세상을 직접 경험하고 이런 세상을 이룩한 산업의 역군들은 90년대까지 착하다는 이 선한 이미지의 단어에 복종하며 정말 열심히 살았다.
국가적으로는 올림픽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집 한 채 구입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이벤트였다. 남이 만들어놓은 공장에 들어가서 착하게 복종하면 일한 결과가 눈에 보이는 것은 이 철학이 맞는 거 같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노동의 대가는 골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올림픽 이후로는 화이트 칼러 계층으로 인해서 무시라는 개념도 우리에게 스며들었다. 그래서 두 번째 철학인 '공부해라'라는 철학이 대두되었다. 사실 출세를 해야 한다는 개념은 오랫동안 있었을 거다. 하지만 평등하게 공부로만 출세가 가능한 시대가 되었어도 일단 먹고 살길부터 터야 했기에 보류가 된 상태에서 집 한 채 장만하고 난다음 자식만큼은 착하게 살되 출세해서 골병 안 드는 삶을 살기를 바랐기에 공부라는 개념은 좀 더 늦게 도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보면 차이는 없다고 해도 될 정도지만 말이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아무것도 없던 시대에 공부만 잘하면 판검사가 되어서 세상을 호령했다. 최소한 공장을 벗어나 사무실에게 깨끗한 셔츠를 입은 화이트 칼라로 살며 무시당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아마 과거에는 착하게 살라는 철학을 가난과 함께 업그레이드해서 올바르게 정의감 있게 사는 것과 합쳐져서 대한민국을 그래도 살만한 세상으로 만든 사람들도 꽤 많았을 거다.
이 기초적인 철학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효과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걸 맛본 대한민국은 지금 세계에서 사교육이 가장 발전된 나라가 되었다.
초기 사교육은 그래도 정의를 호령하는 사도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공부를 해야 하고 생각해서 발전이 되었을 거다. 이렇든 저렇든 출세를 한 사람들은 잘 사는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런 두 가치를 현실로 이루게 해 준 '열심히 부지런하게 살아라'라는 철학은 대한민국은 뭐든 할 수 있는 나라로 부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철학들은 90년대 초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전조증상을 보이고 97년 IMF라는 대지진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렇게 2000년대를 맞이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패션은 기존의 통일성과 규격화를 벗어버리고 각자 개성에 맞는 무대의상으로 등장했다. 이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입각해 등장한 포스트 모더니즘적 성향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초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착하게 살아라,라는 철학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 호구로 살아가라,라는 철학으로 전락했고, 공부해라,라는 철학은 공부만 해서는 출세할 수 없는 시스템과 늘어난 부자들로 인해서 돈이 공부하는 세상이 되어 따라잡을 수 없게 되었고, 열심히 살아라,는 철학은 공부를 잘해도, 착하게 살아도 집 한 채 살 수 없는, 심지어 우리는 대학을 나왔음에도 기술을 (야매로) 배운 중, 고졸 아버지처럼 골병만 드는 인생에 상대적 박탈감까지 더해지는 인생을 강요받는 썩은 철학이 되어버렸다.
https://www.youtube.com/watch?v=8J3m-ao43Bs
IMF 당시 김대중 정권에서 개방을 시행했고 드디어 국민들은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보고 들은 게 많아졌다. 얘기로만 듣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외국 문물을 개인들이 받아들이게 되어 IMF와 선진 문물의 경험은 국민들의 눈을 뜨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대한민국의 시작이었다.
그럼 그다음 타자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역할을 정해진 것이다. 새천년의 대한민국 철학을 정립하는 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되려 사법고시를 막아버렸다. 새천년의 철학을 확립시킬 의무를 가질 대통령이 돈 많은 사람들이나 공부하는 거라는 식으로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교육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한 것도 아니다. 늘 그렇듯 우리는 역시나 지식 위주로 배우고 있다. EBS 위주로 수능을 친다는 것이 그리 중요한가? 사회에서 어떻게 독립된 개인으로써 살아가는 교육이 중요한 거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연설능력은 다들 인정했다. 그래서 나는 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새로운 철학을 제시하는 대통령이 되었어야 했다고 봐야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새로운 철학을 제시하기는 목소리가 너무 얇고 쇳소리 섞여 있기에 설득력이 없잖은가. 그에 반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목소리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연설에 힘을 가진 사람은 사람들을 이끌 수 있기에 어려운 일을 시도함에 사람들의 동의를 끌어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 같은 새로운 철학이 필요하다는 연설을 할 수 있고 국민들의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대통령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어야 했다. 심지어 고졸 대통령이다. 교육 철학을 업그레이드시킬 대통령으로서 아주 적합한 대통령이었지만 하지 않았다. 되려 자신이 대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그들과 동급이 되려고 하는 모습으로 기억된다. 그렇기에 자신과 같은 출세자가 나오지 못하게 길을 막은 게 아닌가 싶을 생각이 드는 정책을 내놓았다. 고졸 대통령이라는 유일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공부를 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철학을 세우는 시기를 그렇게 허무하게 날리고 말았다. 모든 권한과 책임을 EBS에게 퉁치고 넘겨버린 것이다.
EBS 위주로 공부해서 대학 잘 가서 뭐 하나? 지금 이 문제로 골머리 앓고 있지 않은가? 의대 말고는 의미 없고 의대도 이제 소아과는 없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것이다. 응급실이 주 4일만 운영되는 곳도 있다. 응급의학 출신 의사가 없으니 벌어지는 일이다. 좋은 대학의 의대 그것도 성형외과와 피부과나 잘되는 세상이 되고만 지금의 세상은 노무현 정권부터가 시작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국가 철학은 대충 넘어가도 되는 수준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할 덕목이고 좋은 대학을 가도 올바른 학문을 해야 사회를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 인재가 나오는 것이다.
좋은 인재가 되지 못하니 노력도 의미가 없다. 설사 좋은 인재가 되어서 소아과를 나왔다고 해도 착하게 살아라,라는 국가 철학이 사라졌으니 부모들이 의사를 들들 볶고 협박까지 한다. 그래서 남은 건 소아과가 없는 국가다. 착하게 살아가는 것이 호구라는 것을 깨달은 국민들은 다른 철학이 없으니 개념 없이 자신만 아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건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이 아프리카 동물로 전락한 꼴이 된 것이다. 그러니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을 제시하지 못한 불발로 인해서 먹고살기 어려워진 것은 의사뿐만이 아니라 전국민적 문제가 되었고 그래서 좋은 대학을 나와도 먹고살지 못하는 일로 인해서 사람들은 독해지기 시작하는데 착하게 살라는 철학까지 사라진 세상에 서로 할퀴거나 의리 없는 동맹을 맺음으로써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는 자세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쉽게 얘기하자면 예전에는 외상이라는 것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먹고 도망가는 것을 걱정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착함이라는 철학을 올바름이라는 철학으로 업그레이드를 하지 못한 탓에 온 국민이 의심적 존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열심히 사는 세상은 의미가 없다. 열심히 노력해서 돈 벌어봤자 전세 사기로 날리 수 있다는 공포는 이런 철학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더 부추긴다.
https://www.youtube.com/watch?v=0tenL-Q_DiM
https://www.youtube.com/watch?v=x76vG6e_qYY
이렇게 된 세상에 드디어 우리나라에 있을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죽이고 싶어서 사람을 죽이는 진짜 좀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적 자아를 확립한 사람들을 위버멘쉬라고 보고 그들의 인생을 답습해서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를 인간으로 본다면, 본능으로 살아가면서 모습이 인간과 같아 기분에 따라 사람들을 죽이는 존재는 '좀비'라고 봐야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람들을 먹이로만 인지해서 물어뜯는 존재를 생각해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사회적 명칭은 사이코 패스겠지만 생각 없이 자기 기분에 본능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그냥 좀비다. 영화적 설정으로 인해서 꼭 시체 모양을 하고 있어야 좀비라는 개념은 버리면 이해가 쉬울 거다.
같은 사람이라고 취급하다가는 우리도 당한다. 차라리 시체 모양이라도 하고 있다면 피해 다니기라고 하지 같은 모양새니 쉽게 대처할 수도 없다. 그러니 영화보다 더 위험한 세상이다. 단지 수가 적으니 빈도가 적을 뿐이지 걸리면 누가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결국 이 말은 사람이 정신이 죽으면 무덤에 있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삶이 힘들어도 억울해도 서로 돕고 살면서 최소한의 정신을 국가 철학으로 유지시켰으나, 국가 철학이 사라진 현대에는 사람들이 힘들면 정신이 죽어버린다. 그리고 주술로 살아난 좀비와 같은 행태로 기분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삶을 살아가는 거다.
심지어 알파까지 등장한 인간형 좀비도 있었다. 바로 조주빈이다. 나는 처음에는 저게 무슨 사건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어떻게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거지? 그것도 사회적 계약을 위반하는 행위를?이라는 의문을 가지고 봤다. 그리고 정유정 사건으로 확실하게 이건 사람들이 좀비로 변하는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신림역 살인 사건이 이 생각을 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조주빈은 좀비들을 파악해서 그들 사이에서 우두머리(알파)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신기한 건 역순으로 이런 사람들이 등장했다는 거다.
물론 비약이 심한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하고 살기로 했다. 그래야 내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카피본 인간의 정점은 '대학 교수'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2,500여 년 전부터 발전한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최고의 지성이이라고 부른다. 근데 이상하지 않는가? 과학 기술은 발전해서 사람들은 아이패드를 들고 다닌다. 소크라테스는 아이패드가 없다. 그런데도 철학은 왜 아직도 2,500여 년 전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현대인들은 아이패드를 들고 다니고, 인류는 화성으로 이주를 준비 중이고, 그 중간에 달에 전초 기지를 만들고, 사람들의 돈을 벌어서 축척하고 그 인구는 자꾸 늘어가서 이제는 남해에서도 포르셰 SUV가 심심치 않게 보이고, SNS로 전 세계인들이 개인 삶을 공유하는 시대가 왔는데 철학은 어째서 늘 제자리인가?
과학 유튜브 채널은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데 철학 유튜브 채널은 늘 과거 얘기만 한다. 기껏해야 심리학 정도가 일이 발생하면 그걸 설명하려고 애쓰는 모습이나 보이지 딱히 그것도 맞는 건 아닌 거 같다. 배운 거 돌려 막기 바쁜 정도라고 할까. 그래도 교수니까 무슨 말은 해야 하니까 말이다.
이 말인즉슨 대학교수라고 하는 사람들도 인간의 삶의 행태를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을 할 수 있다. 혹은 인간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나. 인간을 다루는 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이 말이다. 그러니 과거에 인간에 대한 관심이 위버멘쉬들의 말을 배워서 그거나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국가 철학을 제시하지 못하는 거다. 이제는 우리나라는 국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국가를 안전하게 만들어줄 철학을 제시할 위버멘쉬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버멘쉬의 카피본인 인간들끼리만 사는 세상이 되었으니 위버멘쉬 빈자리에 좀비가 등장한 것이다. 우리에게 영향을 역으로 줄 존재들이 생겨난 것이다.
지금까지 위버멘쉬들은 국민을 보호하는 국가철학을 만들고 개인들이 좀비가 되지 않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가치관을 부여 주고 있었으나 그들이 사라져, 그 기능이 카피본들로는 전달이 되지 않아 해체가 되면서 국민 서로를 귀찮아하게 되게 만들고, 함께 하는 사회는 같은 계층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인간들 사이의 계급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 기준은 돈(물질)으로 설정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좀비들이 등장하는 시대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나라에 위버멘쉬가 있었나? 기껏해야 착하게 살아라, 공부해라, 부지런하게 노력하며 살아라,라는 정도의 수준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지? 철학이라고 한다면 그걸 누가 어떻게 전파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 않는가? 그냥 국민정서였을 뿐 아닌가?
그렇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해방과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시대의 흐름에서 살기 위해서 사회적 합으로 이뤄진 정서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우리에게는 위버멘쉬가 없었다. 하지만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국가의 위기로 인한 국민들의 단합과 그걸 이끄는 리더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토지개혁으로 한국전쟁을 극복할 수 있었고, 박정희의 경제정책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전두환과 노태우의 범죄와의 전쟁으로 인해 깡패들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확보했으며, 김영삼의 금융실명제로 인해서 국가의 부패 속도를 늦출 수 있었으며, 김대중의 세계화 정책으로 우리는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우리들의 리더들이 자신이 책임질 임기마다 하나씩은 한 일이다.
하지만 이후부터는 리더라기보다는 보수공사에 더 가깝다. 이명박은 예상을 하고 시행했는지 몰라도 4대 강 사업으로 국가를 홍수와 가뭄으로부터 비교적 덜 피해를 입혔고, 박근혜는 외교와 재정 능력으로 국고를 채웠다.
이런 맥락이라면 노무현은 김대중 뒷일이나 수습할게 아니라 국가의 새천년을 책임질 철학을 제시하고 국민을 설득해야 했다. 새로움이란 늘 반발에 부딪히게 마련이기에 노무현의 연설능력을 히틀러 급으로 올려서 우리를 리드해야 했다. 하지만 노무현은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민주당이 존재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한 시대가 됐을 거다. 그렇게 하지 못한 대가로 노무현 친구라는 카피로 대통령이 된 카피본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임기 초기에는 김대중 따라 하기 바빴고 말년에는 노무현 따라 하기로 양산에 내려갔다. 고작 공중화장실 휴지통 제거라는 업적 하나만을 남기고 말이다. 심지어 종이빨대 의무화도 문재인의 업적이다. 따라 할 것이 없으면 고작 이 정도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고 하는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보통 인간들이 좀비가 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게 아닌가 할 정도다.
그렇게 여겨지는 것이 문재인은 청와대에서 마실 수 있는 술을 자기 집에 들고 와서 마시고 있고, 심지어 테이블과 의자도 청와대거다. 그리고 새로 지은 양산집의 지붕은 청색이다. 카피본의 정석이라고 볼 수 있다.
학창 시절에 공부를 그렇게 잘했다고 하고, 인권 변호사를 했으며,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한 사람도 이 정도인데 일반 국민들은 철학이 사라진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제대로 살 수 있겠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그래도 권력이라도 있으니 카피 인생을 살 수 있기라도 하지 권력도 없고, 돈도 없고, 미래도 없는 일반 시민들은 기댈 대가 없는 인생에서 도저히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봐야 할 거다.
◆ 인플루언서 (하이브리드 카피본)
철학이 사라진 국가에 새로운 삶을 대체한 존재들은 SNS의 인플루언서라고 불려지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등장은 전 세계를 휩쓴다.
이들도 철학이 사라진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을 거다. 하지만 하이브리드답게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섰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헬스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국가의 철학이 사라져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깨어있는 사람들은 일단 확실하게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운동을 선택해서 자신을 알렸다. 그리고 그에 발맞춰 레깅스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이들을 따라 운동을 시작했고 레깅스를 입기 부끄러워하던 사람들도 왜 입어야 하는지를 기능적으로 알게 된 이후부터는 당연시 입게 되었다. 물론 레깅스가 일상복화가 되면서 많은 논란에 중심에 있었기도 했다.
하지만 논란을 일으키는 존재들은 시대의 변화에 발을 맞추지 못하는 낙오(과거) 지향적 카피본들이었다. 그리고 나름 합당한 이유를 제시한다. 운동할 때 입는 옷이면 운동할 때 입으면 되지 왜 일상복으로 입냐는 이유다. 하지만 이건 핑계다. 이들의 심리는 함께 낙오하자는 심보로 더 나아지는 존재들을 보고 싶지 않아서다.
일단 몸이 좋아짐으로 인해 생겨나는 나비효과는 연애(결혼) 시장이다. 연애는 그냥 하는 거고, 저절로 되는 거고, 운명으로 엮인 인연이 나타나 만나게 되어 있다는 환상(착각)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다. 이 불공평한 세상에 연애만큼은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공평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운동하는 사람들을 민망한 옷이나 입으면서 성적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존재로 폄하하기 시작했다.
연애는 자동이라고 생각하는 낙오지향적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늘어남으로써 자신들이 만날 수 있는 좋은 사람을 운동하는 사람들이 차지할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냥 함께 안 하면 서로 편하고, 공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에 운동까지 한다는 것은 낙오지향적인 사람들에게는 버거운 생활 패턴이기 때문이다.
운동을 한다는 인플루언서들은 내가 여유가 있다는 것도 보여주거나 힘든 삶에서도 자기 관리를 한다는 이미지를 어필하는 용도로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힘들더라도 따라 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연애의 지평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국가 철학이 사라진 시대에 새로운 보급형 리더가 될 수 있을 거 같다는 희망이 보이는 면이다.
하지만 이런 기능은 곧 사라지고 '부자 놀이'로 전락한다. 명품과 호캉스, 골프 그리고 테니스로 이어지는 인플루언서 문화는 맵새가 황새 쫓아가다가 가랑이 찢어지는 곡소리 나는 경우를 만들기도 했다. 차라리 곡소리라도 나면 다행일지 모른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이들은 집 밖으로 나오기를 꺼려하는 사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깅스 문화를 비판하던 낙오지향적인 인간들도 음소거에 들어갔다. 비판을 할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선 그들만의 세상의 이야기로 넘어가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레깅스 문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현저히 사라진 이유는 레깅스 문화가 오래된 문화가 되어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낙오지향적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한계를 뛰어넘은 문화에 놀라서 그렇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레깅스 문화 하나만 지속되었다면 논란의 강도는 줄어들지언정 지속은 되었을 거다. 인플루언서들의 활동이 낙오지향적인 사람들의 인지 수준을 비현실적으로 느끼게 할 만큼 수준을 넘어서서 레깅스 논란도 함께 끌려간 거다. 호캉스에는 레깅스보다 더 자극적인 비키니가 존재하니 말이다.
그러니 결국 국가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제주도로 골프 치는 인플루언서가 부럽다면 1박에 15,000원짜리 숙소를 찾아서 올레길이라도 걸어야 하는데 그렇게 움직이게 해주는 철학이 없다 보니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이불속에서 스크롤이나 올리며 부러워만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까지 꼭 국가 철학까지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든다. 하지만 개인 가치관을 가지기에는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은 너무 가혹하고, 그렇다고 가훈을 가져 자녀들에게 심어주기에는 현대 가장들의 삶도 그리 녹녹지 않다. 그렇다고 대가족 제도로 돌아가서 어른들의 삶을 배우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이런 사태를 국가가 하지 않으면 국민들은 이렇게 방황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가가 철학을 제시하지 못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이브리드 카피본*인 인플루언서의 삶을 모방하게 될 거다. 곡소리가 나더라도 견딜만하면 지속적으로 명품을 자랑할 것이고, 호캉스를 갈 것이며, 골프와 테니스를 치면서 예쁜 옷을 자랑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삶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배우자를 찾는 것이 결혼의 목적이 될 것이다. 그건 결국 물질만 우선시하는 조건으로 결혼을 생각하게 된다는 뜻이다.
*교수 카피본보다 아래 계층에서 꿈을 이룬 등급보다 아래의 삶을 사는 존재로써 삶의 여유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라이프 스타일을 만드는 사람들.
결국 철학이 없이 인플루언서를 무작정 따라 하는 행위는 악순환만 계속 될뿐인 것이다. SNS의 주술에 걸린 좀비가 된다는 것이다. 이건 생각이라는 것은 인스타그램에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그걸 따라하는 수준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삶에서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에서도, 일상에서도 우리는 늘 다른 사람에게 생각을 맞기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좀비가 된다는 것은 전혀 과한 표현이 아니다.
그리고 인플루언서들은 리더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증명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가 사랑하고 꿈을 이룬 유재석과 아이유도 리더가 될 수 없는데 심지어 김연아, 손흥민 조차도 리더가 될 수 없는데 인플루언서랍시고 리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어불성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 리더가 될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냥 인기만 많고 좋아요에 민감하며,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특별하게 보일지만을 고민하는 그들 또한 SNS의 노예일 뿐이니까. 인플루언서들도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와중에 우연히 운 좋게 이렇게 살게 된 인생에 대해 지속성만을 바랄 뿐이다.
결국 위버맨쉬나 혹은 그와 상응하는 불행한 사건이 없는 대한민국, 여기에 리더가 없는 대한민국에서 생겨난 것은 사람을 죽이는 좀비다.
MCU로 비유하자면 오딘이 살아있을 때는 아스가르드의 정신도 살아 있기에 헬라를 막을 수 있었지만 오딘이 죽어서 아스가르드의 정신도 사라져 헬라가 해방된 것과 같은 것이다. 헬라의 해방 때 아직 토르는 오딘의 정신을 이어받지 못했기에 헬라에게 필적할 수 없었다. 헬라에게 필적하기 하기 위해서는 힘든 여정을 해야 했다. 그렇게 해도 헬라는 상대하기 어려워 수트르의 도움(?)도 받았다. 대가는 아스가르드 행성이었다.
대한민국에 사람을 죽이는 좀비가 나타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대학 교수들은 안 나설 거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도 그들을 욕하지 않기 때문이다.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아무도 학장을 욕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학교담의 보호를 받고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 사는 인물을 존경하거나 동경하거나 부러워할지언정 그들을 탓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은 어차피 나아지지 않을 거 같은 세상에 자신들을 희생하는 선택을 하지 않을 거다.
위버멘쉬의 최고 카피본들의 교육을 받은 대학생들도 어쩔 수 없을 거다. 취업에 목을 매고 살다가 이제는 취업도 신경 쓰지 않은 삶을 사는데 무슨 대책이 있겠는가? 결국 대학 교수들은 학생들을 취업도 못 시키고 삶의 철학도 심어주지 못했다. 심지어 공부 잘하는 애들은 다들 사회에 나가서 갑질하는 수준의 인성을 지니는 일도 흔하다. 학교에서는 공부 잘한다고 착하다고 칭찬 듣던 학생들이 말이다. 결국 대학도 교육에 맞는 정책에 실패를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몇 천만 원이나 드는 돈을 싸들고 가서 배운답시고 책상에 앉아 있다.
이렇듯 위버멘쉬의 부재, 리더의 부재, 위기의 부재로 인해서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죽이는 좀비가 나타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오딘이 죽어 사라진 세상에 헬라가 나타난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미국 좀비들은 하나의 나라에 여러 인종이 살다 보니 백인 이외의 인종에 대한 차별로 인해서 국가 철학이 보편화되지 못함으로 좀비가 생겨날 수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는 그래도 아직은 한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같은 민족을 죽이는 사태까지 온건 진짜 위기라고 봐야 할 시점의 초기라고 볼 수 있다.
◆ 교육
그래도 아직은 좀비 숫자가 적다. 사람을 직접적으로 죽이는 숫자가 적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아직은 그래도 그나마 어쩌면 마지막 기회로써 희망이 있는 시점은 아닐까 한다. 그러려면 일단 교권에서 답을 제시해야 한다. 교육이 제대로 된 방향만 잡아서 다시 일어선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시점인 것이다.
서이초 교사가 자살을 했다. 학생도 학생이지만 학부모의 입김과 치맛바람을 못 이겨 자살을 한 것이다. 그래서 드디어 터질 것이 터졌다는 듯 교사들이 뭉쳤다. 단 한 번도 학생들의 인권을 위해서 뭉친 적 없는 교권이 자신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더 참지 못해서 뭉쳤다.
과거 학생들을 사랑의 매랍시고 학교폭력의 주범인 자신들을 합리화해서 열심히 때릴 때는 한 번도 모여서 학생 인권에 대한 논의를 해본 적도 없었으면서 자신들이 죽겠다고 뭉쳤다. 그래서 그 시대의 학부모들이 억울해서 우리 자식은 그런 대접받게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어 매를 못들게 하니 학생을 가르칠 방법이 없다고 포기하고서는 한 번도 뭉쳐서 회의를 해본적도 없는 교사들이 자기들 죽겠다고 드디어 뭉쳤다. 부자들의 치맛바람은 돈이라도 들어와서 위로가 되지만 돈도 안 들어오는 학부모의 말도 되지 않는 민원은 괴롭다고 하면서 뭉쳤다. 알고 보면 지금의 학부모들은 지금 교사들의 선배들이 다 교육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교육이 바뀌지 않은 상태로 졸업을 해서 사회 변화에 어떻게든 적응을 한 사람들이 지금의 학부모라는 것이다. 요구사항의 내용은 그야말로 어이없다. 그래서 교사들 편을 들어주고 싶다. 지금 당장만 보면 말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학생들을 위해서 정당한 공교육을 위해서 뭉쳐본 적이 없는 교사들로 인해서 사회에 나타난 좀비들은 어떻게 누가 책임질 것인가? 배워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한 번도 자신의 직업적인 고민을 하지 못하고 뿌린 대로 거두는 경우를 보고 마냥 안타깝다고 말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뭉쳤을 때가 기회다. 발단이야 안타까운 사건으로 시작됐지만 그래도 이렇게 교사들이 뭉치는 일은 이제 없을 거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라도 뭉쳤을 때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건 분명히 학생들의 본보기가 될 중요한 시점이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자기반성을 하고 심기일전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배워서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는 자의 당연한 일이지만 그동안 하지 않은 그 당연한 일을 지금이라도 한다면 귀감이 반드시 된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학생들을 개개인을 알려고 했는지, 학생들을 위해서 사회경험을 얼마나 했는지, 자신들도 그리 좋은 직업이 아니면서 안정적이랍시고 좋은 직업이라고 착각하며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배워놓고는 가르칠 때는 서울대 갈 공부 잘하는 애들 말고는 왜 무시를 했는지, 공부 못해도 서로를 위해서 공존하는 학생들이 양아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왜 도와주지 않았는지, 축구하고 싶어 하는 학생에게 왜 강제로 화학 주기율표를 강제로 외우게 했는지, 학생들의 잠재능력을 끌어내 줄 생각을 하지 않고 무조건 외우는 교육만 했는지 등등을 자성하고 수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이다.
그러고 대책을 세우고 공교육과 사교육의 차별성을 제시하고 그러기 위해서 정부에게 자신들이 제시한 방향을 위해서 수능제도를 이렇게 저렇게 바꾸는 것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청원을 넣어서 다시는 교사들이 자살을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교사들은 뭉쳐서 무턱대고 정부 잘못이라면서 정부 탓만 하고 있다.
결국 교사들도 사회에서는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본 적이 없다는 명백한 증거를 지금 사회에 알리고 있는 거다. 그도 그럴 것이 교사들은 학교를 졸업해서 학교로 돌아가는 악순환적인 시스템으로 인해서 사회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사회경험이라고 해봤자 교무실이 전부이며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이유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아서다. 그러면 사회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교사로 받아들일 생각을 하고 그에 맞는 시스템을 만들어봐야 하는데 그러지 않을 거다. 자기 밥그릇 뺏길까 봐서 말이다.
자기들 좋은 건 어떻게 서든 지키고 나쁜 것만 좋게 바꾸려는 심보로는 지금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신처럼 절대적으로 믿고 지키려면 우리가 각자 알아서 대책을 마련하고 정부에게 건의해서 도와달라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 교사들처럼 무조건 정부 탓으로만 돌리고 책임지라고 하면 모든 권한과 권력을 정부에게 이양하는 꼴이 되는데 그게 바로 사회주의이자 공산주의이자 독재로 이어지는 길이다. 민주주의는 각계층마다 모여서 회의를 하고 사회적으로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서 그것이 사회적으로 이점이 있다는 것을 정부에게 알리고 도와달라고 해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무조건적으로 정부 탓만을 한다면 그래서 정부가 알았다고 해서 정부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이 사회주의가 아니고 뭐겠는가? 교사들이 이미 사회주의로 사회를 몰아넣고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배워서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이미 이렇고 있다는 거다. 이미 그러고 있다는 뜻이 무엇인지 아는가? 지금의 교사 선배들에게 배운 사람들이 사회에 나와서 교사들 보고 우리 자식 책임지라는 것과 같다는 거다. 그래서 지금 학교는 학부모라는 계층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교사들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서이초 교사 자살사건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무마하려고 하고 있다. 이미 자신들은 안이한 직업정신으로 많은 고3들을 자살로 밀어 넣었으면서 말이다.
지금의 학부모들의 동년배들을 자살로 밀어 넣은 사람들이 교사들이라는 거다. 그렇게 '서울대, 서울대'거리면서 인생이 마치 대입시험에 다 달려있다고 가스라이팅하면서 12년을 세뇌시켰으니 수능을 망치면 당연히 살길이 없다고 자살을 하는 것을 수 십 년 방치했으면서 서이초 교사가 자살을 한 거 가지고 이렇게 뭉쳐서 못살겠다고 집단시위를 하고 있는 거다.
수능 성적을 보고 자살을 한 학생을 위해서 이렇게 교육이 되면 안 된다고 정부를 향해서 지금과 같이 집단시위를 한 번이라고 했으면, 교육에 대한 정당성을 위해서 한 번이라도 뭉쳐서 의논 끝에 제시를 했다면 과연 서이초 교사는 자살을 선택할 일이 생겼을까?
결국 다 같은 가해자들이면서 피해자인 사람들인데 이럴 때 서이초 초등교사가 죽음으로 마련해 준 이 황금 같은 기회를 한 번 성숙한 어른의 자세로, 좀 많이 억울하겠지만 그래도 학생들 가르치는 선생님이니까 직위에 맞게 잘 살려본다면 정말 마지막 기회를 어떻게든 살려서 대한민국을 좀비에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449T71axyFI
◆ 마무리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또 칼부림 사건이 일어났고 예고 살인을 하겠다는 뉴스가 쏟아진다. 과연 이런 사태를 보고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나설 때라고 생각할까? 아닐 거다. 그러니 이제는 각자 알아서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댓글로 독설을 뿜어 살인을 저지르는 댓글 좀비들이 나온 지 20년 정도가 지난 시점에 이렇게 현실 좀비들이 칼을 들고 나온 걸로 유추를 하자면 앞으로 20년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과거 깡패는 모습이라도 다르고 나름에 가오라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건 양아치들이었고 지금은 그야말로 생각 없이 기분에 따라 행동을 하는 사회현상의 주술에 걸린 좀비들이 칼을 들고 설치는 시대가 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학교에서 선이라고 불려지는, 학교에서 그렇게 만들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선의의 행동을 하지 않아서, 되려 생활형 악행을 저질러서 벌어진 인재다. 하지만 그들은 안전하다. 아무도 탓하지 않고 있고 위험한 곳에는 가지도 않으며 위험한 곳에 가더라도 보호해 줄 무언가는 다들 가지고 다닌다.
행여 나 같은 사람들이 그들을 탓한다면, 그들의 변명은 모든 건 학교에서 우리를 수능 자판기로 만든 교육 시스템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카피본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 마치 AI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아날로그 AI에 불과한 것이고 디지털 AI에게 자리를 뺏길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몰살하고 지구를 차지한 것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에게 새로운 철학을 제시해 줄 위버멘쉬의 등장이 지금 상황을 뒤집을 유일한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타나지 않을 거다. 지금 간디 같은 사람이 새천년의 철학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나타난다고 하면 분명 소아성애자, 이기주의자라고 알려져서 그의 올바른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거 기 때문이다. 지금의 인도에서는 간디도 SNS로 인해서 그렇게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에서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 목을 끊은 인물이 마광수 교수라고 생각한다.
이런 세상에 우리를 구원해 줄 위버멘쉬의 등장도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수도 아마 SNS 시대에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했을 거다.
https://www.youtube.com/watch?v=BRBzqXi_8kY
https://spike96.tistory.com/16464475
▲ 이 글을 쓴 지 6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댓글 좀비들이 진짜 현실로 나와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니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위험해질 거 같다.
(상담 신청)
혹시 이 글을 읽고 조언이 필하다고 느끼시는 분들은 비밀 댓글로 상담 신청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간략한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사연을 남겨주시면 서로 약속을 잡아서 진행하면 좋을 거 같습니다.
단, 제가 외국이나 다른 곳에 있다면 즉각적 소통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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