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 경험론/인생

부부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불편한 진짜 의미

_교문 밖 사색가 2020. 10. 24. 12:13

첫 화 마지막 장면을 보고 "뭐야 이거!!!" 하면서 봤다.

그리고 마지막화는 "왜 사람들이 명품 드라마라고까지 말하는지 알겠다." 라고 생각했다.

 

 

 

 

 

첫 화에서 느낀 파격적인 느낌은 마지막화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는 느낌이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마무리지었다.

 

많은 사람들이 믿었던 부부관계에 대한 배신에 촛점을 두고 봤을 테지만 이 이야기는 초점은 처음부터 준영이 이야기다. 

반드시 신경을 써야할 내용(인물)이 마치 우리 현실처럼 가려지고, 숨겨지고, 잊혀서 사라진 것처럼 보일뿐.

늘 존재했고 그래서 신경써야 할 인물은 준영이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으면 그때부터는 모든 중심은 아기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피해자인 준영이는 단독 이미지조차 찾기 어렵다. 현실에서는 아이들이 중요하고 미래라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없는 존재처럼 무시되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이 드라마의 주제는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결혼을 해서 자식을 갖는 행위는 범죄와 다름이 없다." 라는 것이다.

(다소 과격한 표현이지만 이정도는 말을 해야지 제대로 이 글을 받아들일 거 같다.)

 

 

 

그리고 이건 내가 아주 어릴때부터 생각했던 거고 상담을 할 때 결혼해서 행복하고 싶다면 자식을 잘 기르는 부모가 될 생각으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내 생각이 정확했다는 것을 틀림없이 보여주는 내게 있어서 증명의 드라마였다.

더불어 부부의 세계가 막장 드라마가 아닌 명품(?) 드라마로 입지를 굳히고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명확한 지향점이었다고 본다.

 

 

허나 내가 이 드라마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아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들 이태오의 불륜과 그에 대응하는 지선우의 불륜과 범죄 행각 혹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드라마 진행방식 등에 초점을 맞춰서 얘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생각한 내용을 피력하면 다들 내 생각을 부정하지 않는다.

격하게 공감을 하면 했지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준영이를 다들 불쌍해한다.

 

 

 

그럼 왜 다들 준영이를 불쌍해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이 드라마에서 나와 같은 주제를 보지 못했을까?

 

 

 

이태오의 말도 안 되는 행동과 대사들 그에 대응하는 지선우의 불륜 행위와 범죄 행각들이 너무 도드라져서 그런 걸까?

아님 부자들도 행복하지는 못하는 거다. 돈 혹은 성공이 전부는 아니다. 라는 위로의 메시지에 더 귀를 기울여서 그런 걸까?

 

 

이런 것들도 이 드라마에서 충분히 어필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허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준영이고 그 준영이에 대한 불행한 사건을 말했을 때는 아무도 나에게 말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럼 명백한 주제는 부모가 될 자격(능력)이 없는 어른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결혼을 해 자식을 낳아 키우는 행위는 범죄 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왜 아무도 준영이에 대한 불행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아마 모두들 생각할 것이다.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어떻게 자식을 "잘" 키우는 부모가 되는지 모르겠으니 외면하게 되는 것이라고.

 

 

표면적으로는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못하더라도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 중에 이런 생각이 깔려있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럼 왜 우린 자식을 잘 키우는 법을 모를까?

 

 

1. 현실적으로 아무도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정규 교육 과정에서는 자식을 잘 키우는 법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2. 아무도 알려고 들지 않는다.

우리도 이렇게 자랐고, 교육기관도 없고, 먹고살기 바쁘고, 취업도 어렵고, 인간관계도 불편한 세상에서 지금 당장의 문제가 아닌 미래의 자식을 잘 키운다는 것까지 배워나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자식을 잘 키우는 방식을 배운다는 것을 외면하는 것에 대해 면죄부가 충분히 적용이 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죄인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현시대의 부모를 자식들의 신체 보호자라고 부른다.

오로지 자식들이 다치는 것만 신경 쓰지 정신인 면은 철저히 학교에 위탁을 하고 외면(혹은 안심)하고 산다.

 

그리고 어른들은 자식에 대한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더 이상 신경쓰지 않는다. 자식의 미래에 대해서 말이다.

 

 

오직 신경 쓰는 건 성적이다.

그 성적이라는 것이 좋아야 미래가 밝다고 생각하는 굳건한 종교와 같은 믿음이 더 학교 성적만 신경 쓰게 만든다.

이렇게 정신적인 면(인성과 교양 정도의 것들)은 외면한 체 어른(부모)들은 오직 자식들의 신체 손상에 대해서만 신경 쓴다.

 

 

 

정신적인 면은 학교에서 충분히 배웠을 거라고 생각하고 하교 후의 신체는 부모들 몫이니 그렇게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그런 교육을 받은 우린 왜 삶이 어려울까?

 

 

우리도 이런 식의 어른들의 사고방식으로 키워졌잖은가?

그러니 우리는 정신적인 면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근데 우린 너무 힘들지 않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고, 친구와 어떻게 해야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내며, 직장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원만하게 유지하면서 일을 할 수 있을지 아직 우린 모른다.

 

 

이 말은 결국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방식, 어른들의 사고방식이 틀렸다는 뜻이다.

너무 명백하다.

주변을 돌아보라. 어느 누구 하나 지금 환경에서 정신적인 안정을 추구하면서 살고 있는지 말이다.

 

 

거의 없다.

 

그래서 한때 제주도로 이주도 많이 했지만 결국 실패해서 다시 돌아오고 대안으로 강릉 같은 곳에서 서핑하면서 살 거랍시고 도망치듯이 살고 있다.

물론 서울 살 때보다 행복하다고 하면서 살 수 있겠지만 그것도 먹고사는 문제가 제대로 평생 해결이 되어야 (억지로라도) 행복하다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린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구조)은 틀렸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런 시스템을 이미 겪고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죄다.

그러니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에 죄인이다.

 

 

 

그러니 우린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정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써주지 않는다.

잘 생각해보라 정계에 있으신 높은 분들은 자녀들을 다들 너무 좋은 나라에 학교에 유학을 보내면서 왜 그런 교육 시스템을 수입하려고 하지 않는가?

이것만 생각해보더라도 정치인들은 우리나라 교육 방식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어른들이 해야 한다.

우리나라를 신경 써야 하고 우리 국민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안 하니 당연히 내 자식을 신체만이 아닌 정신적인 면도 지키고 아울러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어른(부모)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연구하고 자식(아이)들에게 전파를 해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학교에서는 정신적인 면을 키우는 기관이 아니라 단순 지식을 전달하는 기관이 되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을 넘어 인정해야 하고 부모들은 거기에 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부모들이 신체 보호자로서의 역할만 하게 된다면 아이들이 성인 되었을 때 사회에 나와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하게 된다.

 

지금 어른이 된 우리들처럼 말이다.

 

여러분들을 보라. 이제는 이런 식으로 자란 어른들이 이 글을 보는 시대는 되었으니 바로 여러분들이 그런 교육을 받아서 자라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하고 있는 것이다.

 

 

 

 

극 중 이태오를 보라.

영화 찍는답시고 제대로 된 일도 하지 않고 바람만 멋들어지게 피우지 않는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자신이 야구를 좋아하니 야구를 재밌게 보기 위해서 자식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딸이었으면 그러지 못할 확률이 높다.)

 

증거 1) 내연녀에게 가방을 사주기 위해서 준영이 보험을 깼다.

 

자식을 자신의 손으로 키우고 싶어 했지만 결정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돈 한 푼 안 벌어온 인간이다.

그래도 멋들어진 바람 능력으로 재산가의 여자와 결혼을 했으니 그 돈으로 잘 키우면 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 주먹으로 준영이 얼굴을 가격했다.

 

증거 2)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

 

 

결국 준영이 보다 자신의 체면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건 준영이를 사랑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럼 왜 그렇게 준영이에게 집착하면서 키우려고 했을까?

 

1. 보험이다.

 

 

지선우는 이태오의 지갑이다.

그래서 이태오는 여다경과 잘되지 못했을 경우, 다시 지선우에게 돌아가기 위한 볼모로 아주 강력한 무기다.

이렇기에 이태오는 자신의 체면을 우선시해서 준영이 얼굴을 가격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면 준영이가 왜 오해를 받는지부터 파악하려고 했을 것이다.

 

 

 

2. 두 번째는 놀 친구가 필요했다.

 

여다경은 딸을 낳았다. 같이 야구 볼 친구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 딸도 야구를 좋아할 수 있다.

허나 딸이 야구를 좋아할 시점까지 놀 친구는 필요했다.

나이가 40대 후반인데 딸이 야구를 좋아할 시기까지 기다릴 심심함을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이 없다. 그리고 일도 없다.

또 딸이 야구를 좋아한다는 보장은 더 없다.

 

 

바람만 안 피우면 언젠가는 한방에 성공할 영화감독으로서 아내 지선우를 무지 사랑하고 자식과 잘 놀아주는 아빠로 위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파보면 결국 위와 같은 것들을 드러낼 수 있지만 굳이 아무도 파보려고 하지 않기에 위장이 가능하다. 더군다나 지선우가 이 모든 것을 다 알아도 행복하다고 하면 끝이다.)

 

 

 

하지만 이태오는 바람을 피우지 않을 수(?) 없었다.

잘난 여자 만나서 일도 안 하고 편하게 살 수 있고 그 재산의 정도가 생일 파티를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차려줄 수 있는 어마어마한 경제력을 갖춘 그것도 자수성가한 여자를 만난 것은 성공 작품 하나 없는 이태오에게 남자로서 자신감이 바닥을 치게 만드는 요소다.

 

 

 

이태오의 현실을 아주 직설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친구(?) 손제혁. 이런 친구가 곁에 그것도 앞집에 산다면 이태오는 죽어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할 수 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이태오가 지선우를 사랑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주변에서 자신을 보는 시선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자신의 남성성을 어떻게든 끌어올려야 한다. (영화감독으로서는 가능성이 희박했으니 남성성을 대신 끌어올리는 방법이 이태오에게는 유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태오는 그걸 표면으로 끌어올렸다.

 

 

지선우만 모르게 자신의 지인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에게 여다경의 존재를 알리고 제주도에 다 같이 여행까지 갔다.

 

 

다들 여기서 미친 개새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건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내가 못난 놈이 아니야. 이 여자를 봐라. 아버지가 이런 사람이고 이렇게 예쁘고, 지성적인 여자다. 라고 어필을 함으로써 영화 인생에서 이제는 히트 작품 하나는 내놓아야 할 시점에서 영화 대신 여다경을 필두로 자신의 남성성 혹은 실패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필한 것이다.

 

 

 

 

그럼 만약 영화를 하나 히트 쳤다면 이태오는 여다경을 만나지 않았을까?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다.

완벽한 아내, 자신의 입지, 같이 놀아줄 아들 이 정도면 바람을 피더라도 아주 단순한 바람 정도지 목숨을 건 바람은 피지 안았을 것이다.

 

 

 

 

이태오 버전은 우리나라 교육에서 책임감이라는 것이 결여된 꿈(만)을 좇으라는 무책임한 교육을 받은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극 중 이태오의 나이를 48세 정도로 볼 수 있을 거 같은데 그 정도면 우리나라 선생님들이 꿈, 꿈 거릴 때다. 그 꿈을 언제, 어떻게, 언제까지 확인을 할 그런 것들은 하나도 가르쳐주지 않고 말이다.

 

 

내 말은 꿈도 좋지만 꿈을 꾸지만 이룰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의 성과를 보여지게 할 시점에 따라 성공 여부로 인해서 실패할 경우 다시 사회로 적응해야 하는 점들은 무시한 채 꿈만 지랄같이 강조하고 반대로 성공했을 때의 자세도 무시한 채 또 지랄같이 꿈이 있어야 한다는 교육만 받았을 거라는 뜻이다.

 

 

더 큰 문제는 선생님들은 아마 꿈이라는 것이 뭔지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을 거다.

 

 

어쩌면 지금 어린 친구들은 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입시만 신경 쓰는 교육일 것이다.

난 반반 교육을 받았다.

 

 

암튼 이런 교육을 받은 이태오는 결국 꿈꾸는 책임감 없는 낭만적인 어른으로 성장했다.

요즘 내가 보는 30대들과 다름이 없다.

 

요즘 교육이 아무리 입시만 가르친다고 해도 입시에 모두 성공해서 모두 돈 잘 버는 어른으로 사회에 나올 수 있는 건 아니기에 결국 본능적으로 꿈이라는 것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 꿈은 성공이라는 이름과 동일시시켜서 변형된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한방이라는 생각도 갖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한방. 결국 책임감은 없다.

교육이라는 것이 책임감을 무시한다. 겨우 청소시간에 청소 잘하라는 것으로 책임감을 가르치려고 하는 교육으로 사람들은 책임감을 배우지 못한다.

 

 

지식을 머릿속에 구겨 넣는다는 것은 청소시간의 책임감론보다 더 책임감을 배울 수 없다.

 

 

 

즉 이태오에게 결여된 건 바로 이거다. 책임감.

이태오는 책임감이 결여된 꿈 꾸는 낭만적인 어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니 우리가 배운 적이 없다. 그럴 기관이 없다. 는 변명을 하면 우리가 이태오가 되어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고 바람을 피거나, 지선우가 되어 이런 남자를 만나서 피해를 입거나, 여다경이 되어서 바람을 조장한 년이 되거나, 준영이가 되어서 외로움과 괴로움을 느끼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꿈을 꾸라고 하고 성공을 하라고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그렇게 되지 못하는 자들을 앞으로 어떻게 살지에 대한 걱정하는 듯한 말투로 비아냥 거리면서 그래도 살아갈 방법이 있는 것에 대한 답을 해주지 않는다. 실제로 사회는 성적이 우수하지 않더라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는데 말이다.

 

선생(학교)도 모르니까 못 가르치는 거다.

 

 

그래서 우리 어른들이, 부모들이 이걸 가르쳐야 한다.

다시 가정교육(밥상머리 교육)이 중요한 시대가 온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자식들이 가정을 꾸미고 살 것이라는 것은 거의 명백하니 좋은 부모가 되어주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이상은 우리나라에서는 결국 대량의 이태오와 그에 대응하는 지선우가 나올 것이 분명하고 이런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은 결국 여다경이라는 존재는 필수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물론 절대적으로 준영이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강력한 피해를 입게 되어 있다.

 

 

 

그럼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최대치는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을 파악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최소치는 나의 세상과 자식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해서 많은 것을 파악한다는 뜻이 된다.

 

 

 

말이 거창한데 아주 간단한 답으로 귀결이 된다.

바로 "함께" 사는 법에 대한 방법을 파악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다.

세상은 점점 혼자 살아가는 방식으로 진화(?) 하고 있다.

허나 이번 팬데믹 사태로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 나온다.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 거 같은 삶의 방식이 오류가 있다는 것이 드러난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이 아주 약한 유대 관계로 인해서 위로를 받고 혼자 살 수 있다는 착각을 했다는 것이다.

 

 

직장에 가고, 자주 가는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적당한 단골집을 파놓고, 일주일에 필라테스 2번 정도를 받으며, 적당한 친구들을 만난다.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마음을 터놓고 인생을 함께 할 사람들을 찾지 못한다.

 

 

근데 우리는 그닷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바로 직장, 스타벅스, 단골 맛집, 학원 등을 다니면서 깊지는 않지만 적당히 아는 사람들로 인해서 주고받는 인사 속에서 그야말로 적당히 위로를 받으면서 존재를 인정받으면서 살아가니 그런 거다.

 

 

 

근데 팬데믹 사태로 직장, 스타벅스, 학원, 맛집을 찾지 못하니 우울증에 걸렸다.

우린 꽤 많은 약한 유대 관계로 이 세상을 살고 있고 홀로 살 수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우린 거의 대부분 관습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을 한다.

이런 약한 유대관계로 세상을 살고 있는 습성을 파악하고 고치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러면 가정이라는 소속에서 가정생활이 좀 어려우면 다시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찾게 된다.

혼자만의 안락함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이태오가 되는 것이다.

 

 

가정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꿈이 중요하고 그래서 만들지도 못하는 영화를 계속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이태오는 스스로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도 자각했을 것이다.

만약 만들 수 있다면 영화에 매진했을 테니까. 바람에 매진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는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태오는 스스로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스스로 했을 것이다.

단지 영화 외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다른 일은 고생스러우니 피하려고 영화를 한다는 핑계로 숨어 산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는 모두 지선우에게 맞긴체로 말이다.

 

그 증거로 여다경과 결혼 후 여다경의 아버지의 돈을 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만들지 못했잖는가.

투자자가 없어서 그랬다는 건 역시나 핑계일 뿐이었다.

 

 

그리고 지선우가 과연 의사가 아니었다면 간호사였다면 이태오는 지선우와 결혼을 했을까?

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결혼 생활을 유지했을까?

만약 여다경이 지선우와 같은 명예직의 직업을 가졌다면 지선우를 다시 찾아가서 그랬을까?

 

 

암튼 다시 얘기로 돌아와서 그러니 자신을 영화감독이라는 것으로 증명을 할 수 없으니 남자라는 것이라 증명을 하기 위해서 여다경을 만난 것이다.

(혼자였을 때 지선우를 만난 것처럼 지선우와 결혼 생활에서 자격지심을 느끼고 영화감독도 되지 못하는 어려움에서 다시 혼자의 습성인 능력 있는 여자를 만나는 일을 벌인 것이다.)

 

 

 

이것이 혼자 살아가는 인간이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결여된 상태에서 결혼을 했을 경우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여자라고 다를 게 없다. 

내가 받는 가정이 있는 여자들의 불륜의 이유는 남편에게서 받지 못하는 여자라는 감정을 불륜남에게서 느낀다는 이유가 절대적이니까.

 

 

이렇게 되는 이유는 바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함께 살아가는 최소 단위는 가정이다.

 

이태오는 지선우가 아무리 돈을 잘 벌더라도 아버지 역할을 할만한 돈을 벌일을 찾아서 해야 했다.

만약 스스로 재능이 있었다면 지선우가 의사이니 만큼 계속해도 되는 시간문제였을지 모르지만 극 중 아무리 생각해도 이태오는 재능이 없었고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면 포기하고 돈을 벌었어야 했다.

 

남편으로써가 아니라 준영이 아버지로서 말이다.

그래서 그 돈으로 생활비가 아닌 준영이 게임기도 사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야구장도 함께 갔어야 했다.

 

 

영화감독이 되지 못한 인간이 남자로 사는 것에 대한 갈망을 아버지의 책임과 능력으로 채웠어야 했다.

 

 

즉, 가정을 이뤘다면 자신이 이태오가 아닌 준영이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가정을 이뤘다면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규정할 줄 알고 적당한 선에서 자신의 꿈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준영이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가르치고 자신의 특기인 연애하는 방법도 가르쳐야 했다. 

더 나아가서는 학교와는 다른 직장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 강자가 되는 것이 좋다고 가르쳐야 했고 강자가 무엇인지 가르쳐야 했다.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꿈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가르쳐야 했고 꿈을 함께 찾기 위해서 자신이 번 돈으로 준영이 함께 여행을 떠났어야 했다.

 

 

 

강자가 되기 위해서 꿈을 찾지 못했다면 잘하는 것을 찾아서 해야 한다는 것도 가르쳐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준영이의 꿈을 찾아서 떠난 여행에서 이태오는 준영이를 유심히 보면서 준영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줘야 했다.

준영이가 싫어하는 것 중에서 잘하는것이 보이면 그것이 싫더라도 왜 해야 하는지도 가르쳐줘야 했다.

 

 

 

준영이가 20대를 살면서 자신이 배운 것과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 생기는 괴리감을 설명해줘야 했고 그로 인해서 불합리함과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줘야 했고 참는 법과 인내하는 법도 가르쳐줘야 했다.

 

 

또한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변하게 될지를 공부해서 인도해줘야 했다.

그리고 이 지혜를 준영이가 결혼을 해서 그 자식에서 가르치는 것도 알려줘야 했다.

 

 

여다경이랑 바람피우는 대신 말이다.

(결혼을 했으면 준영이 아버지로 살아야지 이태오로 살려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함께라는 것을 알면 가정에 충실한 방법을 찾는 것이고, 함께라는 것을 모르면 어려운 상황에서 도망가려고 바람을 피운다.

왜냐면 내가 중요하니까. 가정보다 말이다.

 

 

그래서 자기중심적인 말이 나온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죄는 아니잖아."

혼자 터무니없는 짝사랑을 하는 사람이면 가능한 얘기를 가정이 있고 아들이 있는 남자가 한다는 것은 함께가 아닌 혼자라는 개념이 아주 강하게 박힌 사람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얘기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바로 세상 이야기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세상이 되는 것이다.

 

 

준영이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거라고 한다면 더 큰 세상을 이태오가 공부했으면 됐고, 준영이가 지금 세상에서 살 거라고 한다면 지금 세상을 더 깊이 공부했으면 됐을 것이다.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삶을 알아간다는 뜻이다.

준영이는 사람이고 그러므로 인간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고 세상은 인간으로 이뤄져 있으니 말이다.

 

 

결국 좋은 부모는 내 자식이 살아갈 세상의 사람들을 알아가는 존재, 그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살아온 세상부터 파악한다면 그 이상의 세계는 쉽게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삶의 방법의 방향은 "함께" 살아가는 법이라는 방법으로 귀결된다.

부모는 이걸 아는 존재 알아가는 존재여야 한다.

 

 

이걸 버리면(모르면) 이태오처럼 되는 것이다.

혹은 이태오에게 피해를 입는 지선우가 되는 것이고, 이용되는 여다경이 되는 것이다.

 

이 와중에 사람들이 보지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 버림받은 피해자 준영이가 탄생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아를 찾을 수 있는 시기는 자식이 홀로 설 수 있을 때이지 육아에 힘들다고 자아를 찾고, 결혼만 안 했으면(영화감독이 됐을 텐데) 같은 핑계를 댈 때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우린 이걸 모른다.

그래서 부부의 세계를 보고도 진짜 주제를 보지 못 하는 것이고 알아도 말을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정부는 신경도 써주지 않고, 학교는 함께 사는 책임감에 대한 공부를 버린 지 오래다.

오직 성공과 성적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다들 모르고 배운 적이 없어서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세를 찾아서 배우고 익히고 이 지혜를 전달하는 사람(부모)들이 있다.

그러니 가르쳐주는 곳이 없고, 배운 적이 없다는 핑계를 대지 말고 찾아서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린 제2의 준영이를 만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니까.

 

 

 

다시 아주 강력히 말하지만 학교와 정부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가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