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인가 - 셸리 세이건
* 죽음이 진정으로 모든 것의 끝이라면 그때까지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게 주어진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 셸리 케이건 -
*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 프란츠 카프카 -
* 개념적인 혼동을 이해해야 비로소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얻을 수 있다.
* 이들 철학자들은 특정한 유형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들은 "인간은 물리적인 존재이며, 그렇게 때문에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다" 고 주장한다. 그리고 "결정론은 자유의지와 양립할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다." 고 말한다. 물론 그런 철학자들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물리적 존재" 일 따름이다.
* <파이돈>의 배경이 된 날은 사형 집행일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아마도 무척 불안하고 절망적인 상태였을 것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야기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행복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영혼의 존재를 믿었고, 육체적 죽음 뒤에도 영혼은 살아남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으면 영혼은 당연히 하늘로 올라갈 거라고 확신했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영혼들이 함께 살아가는 신의 왕국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현세에서 바람직한 삶을 살았다면, 죽은 뒤 영혼은 천국으로 갈 것이라 믿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떳떳한 삶을 살았다고 여겼으며, 그랬기 때문에 죽음에 직면해 흥분과 기대감을 숨기지 못한 것이다.
* 그렇다면 그런 '존재'를 가리키는 특별한 용어가 필요해진다. 플라톤은 '에이도스(eidos)' 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오늘날 이 그리스 단어는 마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데아(idea)'로 번역된다. 하지만 영어로 이데아는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 이라는 의미로,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독립된 외적인 존재가 없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는 존재에 대한 플라톤의 정의와는 거리가 있다.
* 플라톤은 육체로부터 멀어질수록 우리의 영혼은 형상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이런 진실을 깨닫고 훈련을 계속해 '육체'라는 욕망 덩어리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즉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영혼은 플라톤의 천국으로 올라가 신과 불멸의 영혼들을 만나고 형상과 직접적으로 조우하게 된다고 말했다. 반면 살아가는 동안 육체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다시 말해 욕망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인생을 살아간다면,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또 다른 육체로 환생한다. 그 과정에서 운이 좋다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돼지나 원숭이 또는 개미와 같은 동물로 태어날 것이다.
* 플라톤은 인생의 목표가 '죽음을 연습' 하는 일, 즉 최대한 스스로를 육체와 격리시키는 거라고 생각했다.
* "어떤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대상이 돼야 한다" 는 뜻이다. 또는 플라톤 본인이 사용한 표현을 빌려, 유사한 존재마이 그 유사한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와 같은 말이다.
* 아마도 물리주의의 관점에 서서, 정신이 육체에 의존하고 있으며 정신이란 육체가 제대로 작동할 때 비롯 나타날 수 있는 기능이라는 사실을 이해했을 것이다.
* 제대로 조율된 악기가 아름다운 멜로디와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제대로 조율된 육체는 뛰어난 정신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화음의 비유는 바로 이런 의미다.
* 정체성의 본질은 나와 관련된 특정한 사실 또는 나라고 하는 인간의 다양한 단계들 사이의 관계에만 의존한다.
* 사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또는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 우리 모두는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불멸을 확신하고 있다. - 프로이트 -
* 우리 모두 언젠가 죽을 거라고 쉽게 말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사실 우리는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 죽음이 살아있는 여러분에게 나쁘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죽음이 어떻게 '죽은 이'에게 나쁠 수 있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죽음을 나쁘다고 할 수 있는 핵심적인 이유이자 여기서 주목해야 할 요소다.
* 왜 죽음이 나쁜가? 죽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존재는 왜 나쁜 것인가? 삶이 선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살아있으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좋은 것들을 죽고 나면 하나도 누릴 수 없다.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을 송두리째 앗아가기 때문에 죽음은 내게 나쁜 것이다.
* 아무리 다양한 조합으로 산다고 해도 '영원히' 앞에서는 지겹고 고통스런 일일 뿐이다. 아무리 멋진 인생도 영생이라고 하면 절대 깨어나지 못할 악몽으로 변하고 만다.
* "영생을 누려도 좋을 만한 형태의 삶이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나는 여러분의 대답을 구하고 있다. 여러분이 정말로 갈망할 만한 정도의 영생이 존재하는가?
* 기억이 사라지는 것처럼 관심과 욕망도 변한다.
*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은 영생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탈출구와 같은 것으로서 우리에게 오히려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감정적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 고 믿었다.
* 데카르트는 신이 수학적 사실을 바꿀 수 없다면, 그건 전지전능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 "내게 주어진 시간을 알게 된다면, 정말로 원하는 일에 더 집중하게 될까?"
* 죽음에 관한 바람직한 태도가 무엇이건 간에,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가지 않는 태도는 분명 잘못됐다고, '삶에 대한 진정성'이 결여돼 있다고 말하고 있다.
* 카프카는 말했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 두려움의 대상은 나쁜 것이어야 하고, 그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무시하지 못할 만큼 높아야 하며, 그일이 벌어질 거라고 확신할 수 없어야 한다.
* 우리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감정은 두려움도 분노도 아니다. 대신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일 뿐이다.
* 우리가 신중하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죽을 운명이기 때문은 아니다. ....... 그것은 추구할 만한 가치 있는 목표가 매우 '많이' 있고, 그런 목표들을 달성하는게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에 비해 우리의 수명이 너무 짧다는 사실 때문이다.
* 우디 앨런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 "작품을 통해서 영생을 누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정말로 영원히 사는 영생을 원한다.
* 가치 있는 삶을 회복할 가능성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고통스런 삶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 역시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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