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 행복한 회고록은 없다. (행복한 유년시절 같은 것은 작가가 되는 데 심각한 장애물이다.) 영감은 고통스러운 경험에서만 나오는 것 같다.
* 황금시대에 행복한 삶은 인류에게는 항상 딴 세상의 것이었다. 인류가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 때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인류가 그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잃어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 행복은 일시적인 것일 텐데도 영속적인 상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 행복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고, 계속 노력을 하는 것이다.
* 행복해지는 것은 번영하는 것이다.
* 그것(행복)은 다른 일을 하다가 우연히 얻게 되는 산물이라는 것이다.
* 선함은 눈에 보이지 않고 행복은 말이 없다.
* 삶과 행복을 즐기는 목표에 몰두하는 더 세련된 이유를 찾아낼수록 진정한 만족감은 더 멀어진다.
* 이슈를 거부하는 것은 해방감을 안겨주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노예가 되는 행동이다. 자신만의 해결책을 만들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의 것을 써야 한다. 니체가 경고했듯이, "자기 자신에게 복종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명령을 받게 된다." 더욱이 명령을 내리는 그 사람은 십중팔구 당대의 평균적 인간일 것이며, 그 해결책이라는 것도 별 신통치 않은 권고나 저주의 혼합물일 것이다. 이런 현상은 글에도 나타난다. 동시대인의 작품만 읽거나 그나마도 읽지 않는 소설가와 시인 지망생들이 많은데, 이런 게으름이 선배들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이 되고자 하는 대담한 투자라고 정당화된다. 하지만 영향 받기를 기파하는 이런 시도는 일반적 영향력 가운데 최악의 것, 즉 현대 대중들의 취향에 굴복하는 결과를 낳는다.
* 원하는 자리에 걸맞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거의 없다.
* 환상으로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행복 환상론자들도 있다. 기분 좋게 살아가는게 해주는 편리하고 해롭지도 않은 방법이 아닌가? 하지만 삶은 환상을 산산이 부숴버리는 사악한 즐거움을 느끼는 성질이 있으며, 그런 경험은 환상을 내몰아내거나 애초에 커지기 전에 예방했을 때보다 더 고통스럽고 더 큰 피햬를 입힌다는 것이 문제다. 환상이 현실과 무관해지려면 완전한 망상으로 변해야 한다. 자신이 정말 나폴레옹이라고 믿어야 한다....
* 당신이 공연히 당신 자신인 척할 필요는 없는 법이라는 원칙이다. 호랑이는 공연히 호랑이인 척할 필요가 없다. 원래 쾌활한 사람은 쾌활해지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쾌활하고 미소 짓는 즐거운 하루의 시대에 항우울제가 점점 더 많이 처방되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환하게 웃고 있는 우울증 환자라는 것이 지금의 시대적 현상이 된 것 같다.
* 우리는 모두 각자 속으로는 죽을 계획을 세우고 있으면서도 웃고 유쾌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증상이 너무 심해지면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는 순간에도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다.
*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일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일하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방법을 안다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근사하게 살 수 있다."
* 행복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그런 기분 자체라기보다는 그것과 함께 오는 가능성의 전율인지도 모른다.
* 안에 들어가면 젊고 매력적인 판매직원이 다가와서,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당신의 눈을 바라본다. 그렇게 하여 당신도 젊고 예쁘다고 착각하고 만든다. 돈을 쓰는 일은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제일 쉬운 방법이다.
* 부처에 의하면 근본 문제는 무지(無知)이다. 무지는 욕망과 갈망으로 이어지는 집착을 부추긴다. 욕망과 갈망은 불평불만을 가져온다. 무지가 문제라면 해결책은 지(知)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통찰은 곧 죄로부터 구속(救贖)이고, 이해가 곧 구원이다.
* 그리스도가 나오기 오래전에 부처는 우리가 타인의 잘못은 똑똑히 보지만 자기 자신의 잘못에는 편리하게 눈을 감는다는 것을 알았다.
* 명상이란 불상(佛像)이 보여주는 것처럼 눈을 무겁게 내리깐 엄숙한 상태가 아니라 '항상 깨어 있음', '주의 깊게 지켜보기', '사려 깊음' 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강렬한 정신적 활동이다.
* 스피노자는 생명유기체를 삶의 조건을 최적화하는 시스템이라 규정하면서, 우리의 본성 자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충족된 욕망은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세상의 그 어떤 만족도 그 갈망을 굴복시키고 무한한 갈망에 한도를 설정하고 그 심장의 바닥없는 심연을 채우기에는 부족하다.
* 웅크리고 있는 '자아'는 가장 끈질기고 위험한 적이다. "당신이 만날 수 있는 적들 가운데 가장 위험한 적은 항상 당신 자신일 것이다.
*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사회적 존재를 경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한다."
* 관심을 보이라는 요구는 점점 더 강해지고 다양해지는데, 이는 내면이 공허하다 보니 외부에서 부여되는 정체성이 필요해지는 증상이다.
* 제멋대로 구는 태도도 매력적으로 보인다.
* 쇼펜하우어가 지적했듯이 , 인간 본성은 항상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 보편적 수단인 화폐가 보편적 목표가 되었다.
* 여가의 세계에서 쇼핑과 여행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 불필요한 구매의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을 수집하라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 수집가로 재분류되는 것이 …… 학자인 체하는 전문성, 고급 감상자의 감식안이라는 분위기를 풍긴다.
* '당신은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라는 것은 근본적인 명령이지만, 변화 그 자체를 숭배하라는 뜻은 아니다. 변화는 책임감과 헌신의 필요에 대해 균형이 잡혀야 한다.
* 문제는 풍요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자만심이나 경멸, 원한, 조급함, 성급함, 무엇보다도 더 많은 부에 대한 욕망 같은 성격적 결함을 조장하는 것이다.
* 삶에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기대이다. 그것은 내일에 의지하여 오늘을 허비한다. - 세케카 -
* 불행하게도, 세상에서 어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 충실한 성찰은 기독교가 지상에서 행복해질 가능성을 거부한 덕분에 천 년 이상 망각되어왔다.
* 권위는 존경을 받고 권력은 그것을 요구한다. 권위는 겉치례가 필요 없고 권력은 거창한 의상이 필요하다. 권위는 솔직하고 권력은 비밀주의이다. 권위는 열린 마음이고 권력은 닫힌 주먹이다.
* 바리새인은 에리히 프롬이 '권위주의적 성격' 이라 규정한 유형의 인간이다. 이런 유형은 권력 그 자체를 숭배하며, 권력자를 존경하고 약자를 경멸한다. 그들의 방향성은 사도마조히즘적이다. 위로는 아부하고 아래로는 짓밟는다. 이 유형은 권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권력이 필요하지도 않은 인물을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탄압하려 한다.
* 책임감이란 물러서는 일 없이 선택권을 행사하라고 요구하는데, 이는 고통스러울 때가 많기는 해도 여건과 자아를 초월하는 유일한 길이다.
* 실존주의의 목표는 고요함보다는 강렬함이다.
* 알베르 카뮈는 행복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부조리와 공생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행복과 부조리는 서로를 강화해줄 수 있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땅의 두 아들이다. 그것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행복이 반드시 부조리한 감정에서 솟아난다고 말한다면 잘못이겠지만, 부조리한 감정이 행복에서 솟아나는 수도 있다."
* 부처와 스피노자가 주장했듯이, 지금 당장의 만족을 원하는 욕구에 저항하는 것이 더 장기적인 충족감을 가져올 수 있다는 증거도 있다.
1970년에 월터 미셸은 네 살짜리 아이들 앞에 마시멜로를 담은 접시를 놓고 실험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잠시 방을 비울 텐데 돌아올 때까지 마시멜로에 손대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보상으로 한 사람당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들 중 3분의 1가량은 마시멜로를 그 자리에서 먹어치웠고,
3분의 1은 잠시 참아보려 했지만 다양한 시간차를 두고 유혹에 굴복했으며,
3분의 1은 끝까지 기다려 두 배의 보상을 받는 데 성공했다.
15년 뒤에 미셸이 그 아이들에 대해 조사해보았더니,
자제력이 있었던 아이들은 교육면에서나 성격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더 성공해 있었다.
만족을 유보하지 못했던 아이들은 성취도가 낮았고 마약이나 알코올중독 문제를 겪는 경우가 더 많았다.
또 흥미를 있는 일은 그들이 폭력배가 된 사례가 많았다는 것인데,
이는 권력에 대한 욕구란 채워지지 않는 것에 탐닉하는 일종의 탐욕이라는 것을 확증해주는 사례다.
조사를 더 진행해나가자 자제력 있는 아이들의 핵심적 재능은 의지력이라기보다는 거리 두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눈앞에 있는 맛있는 것보다 다른 것을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한 것이다.
네 살짜리 아이들 중의 3분 1이 어린 부처라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이 고전적인 실험이 행해진 때는 1970년이었고, 광적인 소비의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오늘날의 네 살짜리 아이들이라면 아마도 마시멜로를 마구집어먹고 나서는 마시멜로는 맛이 없다고 투덜댈 것이다.
*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소유함으로써, 혹은 소유에 대한 기대만으로도 우리는 요구는 즉시 증가하며, 이것은 더 큰 소유와 더 큰 기대를 하는 우리의 능력을 증가시킨다. …… 뭔가 바라던 것을 얻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적응' , '습관화' , '쾌락주의의 쳇바퀴' 라 부른다.
* 습관화는 돈, 물건, 쾌락만이 아니라 명성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들은 대개 출판, 전시회, 공연 기회 등 그저 소박한 수준의 인정만 원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수준이 달성되는 즉시 그들은 더 이상을 갈망한다. 상한선은 없다. 굉장한 유명인사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보게 되면 언짢아한다. 이는 기억해둘만한 취약점이다. 아주 변변찮은 일반이도 찬양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방법으로 유명인사를 화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 자기 정당화의 재능은 인간의 진화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 꽃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이간 두뇌가 달성한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어떤 행동을 정당화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모든 인간은 아인슈타인의 수준의 지성과 셰익스피어와 같은 상상력, 예수회 신도같은 섬세함을 지니게 된다.
내가 특히 강한 인상을 받았던 사례는 아내를 때리는 남편이 했던 변명이다. 그의 아내는 심한 타박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였는데도, 그는 인내심 깊게 그 상처가 자기가 아니라 아내의 극악한 행위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기처럼 온화한 영혼의 소유자가 참지 못하고 폭력에 호소할 정도라면 아내가 얼마나 심하게 도발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지걱이고 예민한 사람이었고, 정직성, 관용, 여성에 대한 사랑의 시로 유명한 시인이었다.
*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키가 더 커지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 전문직 종사자들은 더 행복한데, 이는 그들의 소득이나 특권이 더 크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더 잘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값을 따질 수 없이 귀중한 자율성이라는 선물을 받았으며, 개인적 책임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
* 문제는 돈이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서열이다.
* …… 판자촌에서도 치명적인 속물주의는 존재한다. 초기에 정착한 자들은 자신들을 뒤족으로, 신참자들은 쓰레기 같은 존재로 여긴다.
권리 요구의 시대에 모든 사람은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들보다 더 우월하게 보이고 싶어한다.
* 브랜드는 …… 소비를 계속 밀어주는 힘은 대부분 무리보다 앞서 가기 위한 무익한 시도이거나, 너무 뒤처지지 않기 위한 방어적 필요성이다.
* 긍정적 감정은 변덕스러운 당일치기 여행객이지만, 부정적 감정은 침입하고 압도하고 점령하고 정복할 작정으로 들어오는 제국주의자다.
* 긍정적 감정은 날갯짓하며 잠깐 내려앉았다가 곧 날아가버리는 나비이다.
보는 자의 눈도 그에 상응하게 균형을 잃는다. 사람들은 은혜는 금방 잊어버리고 더러운 술수는 영원히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결혼의 어려움 중의 하나도 이것이다. 한 번 저지른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좋은 일을 엄청나게 많이 해야 한다. 죄를 짓기는 쉽지만 그 대가를 치르기는 무척 싫다. 조너선 하이트는 돈을 따는 쾌감은 같은 액수의 돈을 잃는 고통보다 강하지 않다면서, 이 원리를 금융과 도박에도 확대 적용한다. 나쁜 것은 항상 좋은 것보다 더 강하다. 셰익스피어는 이 사실을 오래전에 다룬 바 있다. "인간의 나쁜 매너는 황동에 새겨져 있지만, 그들의 덕성은 물에 기록된다."
* 부처, 스피노자, 프로이트는 모두 자기 이해와 변신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며, 인지행동치료법 몇 차례를 받는다고 해서 인생이 바뀌기는 힘들다.
* 심리학자 대니얼 네틀은 …… 토쟁이 곧 의미라는 이론을 내세운다.
* 우리는 노력하도록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행복한 삶을 향해 노력하도록 태어난 존재다.
* 가상현실이 발명되기 전인 1970년대에 철학자 로버트 노깆은 모든 면에서 실제처럼 느껴지지만 오직 즐거운 경험만 맛보는 삶을 제공하는 기계가 있다고 가정할 때, 그런 삶에는 진실성이 없기 때문에 그런 삶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에 정말 결여된 것은 진실성이 아니라 노력일 것이다. 결정적인 요인은 그것이 어렵다는 점이다. 귀중한 것은 모두 애써 얻어야 한다.
* 프로이트는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구원할 방식을 혼자 힘으로 찾아내야 한다." 영국의 철학자 존 암스트롱은 이런 접근법을 판독시라 불렀다.
* 늙은 나무도 그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 이것 역시 오래된 이념이다.
* 부처 이후 사르트르까지 모든 사람이 죽음을 인식하라고 설파해왔다. 죽음을 항상 강렬하게 의식해야만 관습의 공허함을 폭로하고 일상의 딱딱한 껍질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강렬한 삶을 보장해주는 것은 죽음뿐이다.
* 모든 것이 쉬워지기를 기대하는 시대에 가장 결정적인 계시는 가치 있는 모든 것은 얻기가 어렵다는 깨달음이다. 사실 쉬운 해결책 찾겠다는 시도는 그 시도가 피하려 했던 그 문제를 유발하게 된다.
* 살아남는다는 것은 힘껏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노력하려는 경향이 문제다.
세속적 성공을 이룬 자들을 모방하려는 경향이 특히 그렇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대단한 동력과 지적 소양을 가진 검색엔진이지만 검색의 매개변수를 어떻게 선택할지, 결과를 어찌평가할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상태다.
그러니 방향을 잘못 잡은 노력이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할 경우에는 노력 전체를 거부하는 것밖에 달리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여 카리브 해의 해변에 누워 코코넛 오일 마사지나 하기로 작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 노력은 힘들 뿐만 아니라 그 목표도 불분명하다. 이것 역시 기원전 제1천년대의 중반쯤인 축의 시대 이후 수없이 되풀이되어온 주제다.
* 인간의 지혜는 그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움이 변할 것이다.
* "영웅은 깨닫게 되는 자이다."..... 추상적 탐구자의 목표도 그와 마찬가지로 네 단계를 거쳐 도달된다. 그것은 거리 두기, 어려움, 이해, 변형이라는 단계이다.
* " 자네들이 날 발견할 수 있다면 자제들은 분명히 똑똑한 걸세. 난 한 번도 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거든." 이라고 대답한 소크라테스도 있다.
* 의미에 대한 탐구 그 자체가 곧 의미라는 것이다. 길이 목적지이고 그것을 찾으러 나서는 원정이 곧 성배이다.
* 현대인들은 비난이나 그보다 더한 책임 추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보다는 모두들 어떤 질병의 희생자 입장에 서고 싶어한다.
* 과학에는 결정론의 삼위일체가 있다. 유전학(인간 행동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진화심리학(인간 행동은 진화한 생존 메커니즘에 의해 결정된다), 신경과학(인간의 행동은 확고하게 설정된 두뇌의 모듈에 의해 결정된다)이 그 셋이다.
* 우리 자신은 우연성과 필연성의 산물이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으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
* 인간이라는 존재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으며 세계는 피할 수 없는 파괴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변한 것은 오로지 결함의 성격뿐이다. 과거에는 그것이 신이 내린 처벌로서 우리의 성격으로 굳어졌지만, 이제 그것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동물적 본성이 되었다. 유전자 내에 설정된 프로그램이 새로운 원죄이다.
* "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 라는 낡은 핑계를 정당화할 여지는 없다.
* 현대인들은 뚜렷한 이유 없이 무작위적으로 가해지는 분운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남 탓하기라는 새로운 방법이 등장했다.
예전에는 불운을 신비스러운 신의 처사로 설명했다. 고난에는 목적이 있고, 때가 되면 그 목적이 무엇인지 완전히 밝혀지리라는 식이다. 지금은 불운에 의미가 있는 것은 거기에 뭔가 잘못된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고들 여긴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하는데, 그것은 절대로 희생자 본인의 탓은 아니다. 더러운 일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잘못이다.
* 실패란 케케묵은 개념이다. 그 누구도 높은 성적이나 예술적 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꿈의 배우자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패란 새로운 금기어다.
* 스토아 사상가에서 실존주의자에 이르는 모든 철학자들은 모두 소리 높여 불평을 비난한다. 징징대며 불평한 덕분에 더 행복해진 사람이 지금까지 있었던가?
* 사람들은 권위 있는 위치에 있는 누군가에게서 확인받을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 개인적 책임감은 생사가 걸린 문제일 수도 있다.
* 소수파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원리와 진실을 선전하는 것은 결국은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선전하는 자들은 까탈스러운 사람으로 취급받고 외면당한다.
* 인간이란 자신이 동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임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동물처럼 행동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기도 하다.
* 플로베르가 털어놓았듯이, "모든 대안이 부조리하니, 그나마 가장 고상한 것을 고르도록 하자"는 것이다.
* 비밀의 자아는 세계에 대한, 그리고 그 잔인함에 대한 방어막이다. 내면에 속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더욱더 효과적으로 무장시켜주며 신체보다 영혼을 더 잘 지켜주는 사슬갑옷이다.
*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거리 두기, 집중하기, 자율성, 프라이버시이지만, 세상이 고집하는 것은 몰입식 사고, 주의 산만, 협동, 동료이다.
* 부처로부터 샤르트르에 이르는 모든 사상가는 개인적인 거리 확보를 정신 건강에 필요한 결정적인 요소로 여겨왔다. 기독교 사상가들도 거리 두기를 귀중하게 여겼고, 그것을 가장 열렬하게 지지하는 이야기 중에는 13세기의 도미니크 수도회의 신학작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발언도 있다.
* 자부심이 가진 문제점은 거기에는 어떤 가치도 원리도 없고,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과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자기 존중에는 존경을 받을 만한 일을 성취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지만,
현대에 통용되는 자부심은 자신에게는 아무 요구도 하지 않고 오직 타인들에게만 요구할 뿐이다.
자기 존중은 내면으로부터 오고 자부심은 외면으로부터 온다. 스피노자는 이 차이를 이해했다. "자기 존중은 우리 바깥의 어떤 것으로도 확장되지 않으며, 자신이 완전해진다는 것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자,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요구하지 않는 냉철한 자만의 것이다."
* 자부심은 세계에 비춰진 어떤 이미지이든 도로 반사되기를 요구하는 자아도취적인 것이며 그 어떤 지속적인 이득도 없지만, 이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 청년 문화에서 보이는 '존경' 강박증이다. 가령 햄버거를 사려고 줄을 서다가 누군가에게 부딪혔는데 상대방에게 충분한 존경을 표하지 않았다면 그는 총격을 받고 죽을 수도 있다.
* 성공하고 싶다면 실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 요즘 사람들은 엄숙하고 수수께끼 같은, 아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여행하고 싶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로, 무엇 때문에?" 라고 물어보면 그 수수께끼는 금방 와해되어 짜증스러운 몰이해로 변한다. 뭔가를 특별히 보고 싶다는 열망이 없고, 그저 움직이고 싶다는, 가고 싶다는 욕구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어처럼 살아 있기 위해 계속 움직여야 하며, 역시 상어처럼 웃음은 가짜이지만 이빨은 진짜이기 때문이다.
* 활동은 불안으로부터 놓여나게 해주기 때문에, 그리고 중요하고 의미 있다는 착각을 주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또 하나의 수단이다. 하지만 사상가들은 항상 활동하지 않음의 충만함을 격찬해왔다. 가령 키케로는 카토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만큼 사람이 더 활동적인 때는 없다. 혼자 있을 때만큼 덜 혼자인 때는 없다."
* 스페인의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통일성은 고요함의 고상한 딸이며, 분산은 소음의 미친 의붓자식이다."
* 힘든 일은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것은 권리 요구를 부정하고, 가능성의 환상을 깨뜨리고, 이동성과 유연성을 제약하고, 만족감을 유보하고, 주의 산만함에 등을 돌리고, 책임감과 참여와 관심과 생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 윌리엄 블레이크가 주장했듯이 바보짓을 계속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더 지혜로워진 바보는 본 적이 없다. 또 바보를 기꺼이 받아들여주는 사상가도 본 적이 없다.
*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인식론적 상대론이 우세해졌는데, 이런 추세는 이성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진리, 객관성, 의미, 심지어는 실재와 사실까지도 거부한다. 권리 요구의 시대는 지겹고 힘든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인정받기만 원한다. 설명보다는 예시를 선호하고 내용보다는 이미지를 선호한다.
* 감정이 없으면 행복, 자비, 사랑은 있을 수 없다. 이성적 판단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감정은 사유에 의해 균형이 잡혀야 한다. 부정적 감정은 긍정적인 것들보다 훨씬 강력하므로, 그것들을 통제하려면 이해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한다.
* 강제수용소 생조자인 프리모 레비는 생존자들의 공통적 특징 하나가 지적 호기심이라고 썼다. 강제수용소의 극심한 고통조차도 적극적인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연구의 대상이었으며,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결정적인 존재 가치를 부여해주었다. 지위와 소유에만 의존하여 완전히 부르주아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그런 자질을 갖지 못했으며, 가장 먼저 죽은 쪽에 속했다.
* 이해가 곤경을 견디기 쉽게 해줄 뿐만 아니라 …… 자기연민, 분노, 남 탓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이로운 쪽으로 돌려놓으려 노력할 수 있다. 배울 의사가 있는 사람이라면 고통은 훌륭한 스승이다.
* 방향 있는 생각이란 필요할 때는 많지만 항상 힘든 것이었고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 우리 모두는 선택을 좋아하고 최대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실제로는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혐오한다. 우리는 선택의 범위가 최대한 넓어져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실제로는 점위가 놃을수록 선택 과정은 더 길고 힘들어지며, 최종적인 만족을 얻을 확률은 더 낮아진다. 우리는 상충하는 가치들을 평가하느라 지치고, 거부당하여 놓친 기회 때문에 괴로워진다. 너무나 혼란스러워져 더 이상 어떤 선택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 우리는 번복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리는 쪽이 더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 번복 가능한 선택을 했을 때는 충분히 만족하는 법이 거의 없다. 이는 인간이란 오직 유한성 내에섬나 행복할 수 있다는 사르트르의 견해를 입증해준다.
* 과학은 인간의 다른 노력과 전혀 다르지 않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노력이지 성과가 아니다. 의미를 향한 탐구는 그것 자체가 의미이다.
* 한나 아렌트는 주장한다(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렌트 본이이 이탤릭체로 지정함). "이성의 필요성은 진리의 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미의 추구에 의해 촉발되었다. 진리와 의미는 같은것이 아니다." 마음에게 진리를 확립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그것에다 족쇄아 눈가리개를 채우고서 마을로 향해 가도록 채찍질을 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마음을 자유롭게 노닐도록 풀어줄 수도 있다. 입증하기보다는 성찰하고, 절대로 대답될 수 없는 문제 주변에서 뛰어노느라, 대개는 실용적인 사람들로부터 시간을 낭비한다는 눈길을 받곤 하는 상태 말이다. "인간이 대답을 찾아내는 모든 인지 문제 뒤에는 대답될 수 없는 질문들이 웅크리고 있다. 그런 질문은 완전히 게으르게 보이고 항상 게으른 족속으로 폄훼되어왔다. 만약 우리가 생각이라 부르는 의미를 향한 욕구를 잃고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기를 멈춘다면 인간은 우리가 예술작품이라 부르는 생각의 산물을 만들어낼 능력뿐만 아니라 질문을 던지 능력도 잃게 된다. 문명이란 그런 질문들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것인데."
이런 종류의 생각은 방향이 없고, 순수한 존재에서 느끼는 즐거움의 형태, 신체적 즐거움에 상응하는 정신적 즐거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사유를 신성하다고 여겼다. "신의 활동은 지극히 행복한 것이며 반드시 명상의 형태를 띈다. 따라서 신의 활동과 가장 비슷한 인간의 활동은 가장 행복한 활동일 것이다. …… 따라서 행복은 명상의 동반자이다." 그리고 신은 전지전능할 뿐만 아니라 지치지 않는 존재이니, 쉬기 위해서가 아니라. 명상하기 위해 안식일이 필요했다. 그는 돌이켜 생각하기 위해 일곱 번째 날이 필요했다.
* 키르케고르가 볼 때, 누군가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가장 극단적인 절망의 징후였다. 이 극단적 절망감은 현대적 현상이다. …… 실재와 자아는 워낙 실망스러우니 도피를 부추긴다.
* 반복과 친밀성은 지각을 죽이고 경험을 감소시킨다. 하지만 문제는 습관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 습관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완전히 습관으로만 사는 것마큼 끔찍할 것이다.
* 1970년대가 지향했던 행방의 목적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예상 밖으로 힘든 일임이 증명되자 새로운 해방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되자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 현대 세계에서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히지 않은 사건은 정말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 미국인과 일본인들이 20초 동안 물속을 살펴본 다음 자기들이 본 내용을 설명해보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미국인들은 '크고 푸른 물고기' 등의 사물을 말했고, 일본인들은 '흘러가는 물, 바위, 식물, 물고기' 라고 답했다. 동양식 실재는 더 넓고 충만하며 풍요롭다.
* 껍질 깨는 자와 눈을 뜨게 해주는 자를 찾아 나서라. 진정한 작가의 글을 읽고, 현재 직위에서 새로운 일거리를 시작하라. 실제로 살고 있는 곳에서 휴가를 즐기라. 현재의 배우자와 격동적인 연애를 시작하라. 그렇게 한다면 아마 가장 큰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어려움은 만족감을 증가시키기도 한다.
* 사람들은 항상 독서가 쉽다고 여긴다. 올바른 독서 기법이 워낙 오래전에 잊혔고, 지금은 생각 없이 그냥 읽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어떤 책이 너무 어렵게 보인다면, 그것은 독자의 탓이 아니라 책의 탓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악기를 배우는것과 비슷하게, 독서는 난이도가 다양한 기술이다.
* 삶의 느낌과 결을 재생산하는 소설은 읽기는 어려워도 더 풍분한 만족감을 제공하고 더 오래 기억된다.
* 작가의 가장 큰 재능 가운데 하나는 잔혹하면서도 완전히 공감할 수 있게 행동하는 캐릭터를 창조하는 능력이다.
* 아이들처럼 재미를 위해 읽지 마라. 야심가들처럼 지시를 받기 위해 읽지 말라. 그런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읽으라.
* 황홀경은 학습되어야 하고 힘들여 획득해야 한다.
* 사소한 단기적 소득을 쫓다 보면 장기적으로 중요한 것을 잃게 딘다. 낙원으로 가는 쉽고도 대가 없는 길은 없다는 진리의 생리학적인 증거가 이것이다. 그에 비해, 힘들게 획득된 자연적 도취감은 오래 지속되는 은혜로운 새로운 연결을 창조한다.
* 신도가 아닌 내게는 도취감 중에서도 최고의 도취가 고양이다. 막상막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성적인 활홀경보다 더 낫다. 다행히도 이 두 가지는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그 두 가지는 동시에 경험될 수도 있으며, 그런 은총의 축복을 받은 자들은 존재의 위대한 사슬에 신비스럽게 융합될 뿐만 아니라 영원과 낙원에서 신과 일체가 될 수 있다.
* 초월의 다른 방법이 그렇듯, 이 만족은 힘든 노고를 통해 얻어야 한다. 먼저 느리게, 또 좌절을 거치면서 솜씨를 얻어야 한다. 만족감을 즉시 느낄 수 없다. 그러는 것은 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배우는 자가 적성도 안맞고 규율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동적으로 될 정도로 솜씨가 좋아지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 몰입이 완벽해지고 자아와 장소와 시간이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 여기에는 모순이 여러 가지 있다. 수고하지 않는 느낌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강렬한 수고가 필요하다는 모순.
* 자아의 감각이 강할수록 그 독재에서 벗어나는 데서 느끼는 열광은 더 커진다.
* 마음이 멈추면 흐름은 방해받고 이 방해는 마음의 복지에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검색이란건 그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 젊은이들이 자기들이 가진 것의 가치를 알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 칙센트미하이의 다른 연구에 따르면 취미용 장비가 더 비싸고 부피가 크고 복잡할수록 그 취미는 재미가 덜해진다.
* 니체는 하루에 예사로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씩 걸었고, 그렇게 걷는 동안 최고의 통찰을 얻었다.
* 행복의 첫 번째 효과는 힘의 느낌이다.
* 친절함이라는 고귀한 정신은 악의처럼 보일 수도 있다.
* 강한 흥미는 시와 재즈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둘 다 리듬을 토대로 한다는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하지만 좋은 시와 재즈 독주는 저절로 솟아나오는 솔직성과 간결함 덕분에 쉬운 것처럼 보인다. 아무나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고 들린다. 그러므로 아무나, 또 모두들 시도해보는데, 그 때문에 시와 재즈의 99%는 기분이 우울해지는 쓰레기이다. 진짜를 찾아내는 데는 시간과 에너지가 든다.
* 마지막 노래가 끝날가 무렵, 색소폰 주자 한 사람이 갑자기 앞으로 나서더니, 다리를 벌리고 서서 숨을 들이마시고는 발가락 끝으로 서듯 온 힘을 다하여 사납게 불어댔다. 불타는 듯이, 조롱하는 듯이, 넘칠 정도로가지 불었다. 다들 몽롱한 기분에 젖어 앉아 있다가 이 연주에 전기 충격을 받은 듯 벌떡 정신을 차렸다. 습관과 일상적인 졸음은 삶이 아니었다. 이것이 삶이었다. 복잡하고, 놀랍고,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이것이.
* 이번에는 청중들이 진심으로 열렬한 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독주자는 그것을 듣지 않았다. 그는 술 한 잔을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내면에서 들리는 가장 달콤한 갈채를 들었다. 하지만 그 늙은 드러머, 그때까지는 러시모어 산의 암벽 조각처럼 무표정하던 드러머가 스틱을 들어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을 때는, 아마 달콤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 과거에는 사람들이 살기 위해 일했다. 지금은 일이 곧 삶이다. 쇼핑과 여행과 소통이 그렇듯,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렸다. 당신 직업은 당신의 정체성이자 지위이고 삶이다. 진짜 삶을 지원해주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지루한 일이라는 개념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 역사상 그 어느 때도 자유민이 이토록 전적으로, 일이라는 한 가지 목적에만 온 에너지를 바친 적은 없었다.
* 자유를 내놓고 항복하는 대가로 종교는 사람으로 보살펴주고 모든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겉모습을 제공한다.
* 우리는 연기하는 줄도 모르는 채 연기하고 있고, 심지어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 집단에 굴복하는 데서 요구되는 정체성의 상실이다. 가면이 얼굴에 녹아들어간 것이다.
* 농담은 항상 속 시원한 웃음으로 보상을 받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만큼 우습지 않은 법이다. 이는 직업적 유머가 유머가 아니라 익살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경거망동을 쾌활함 쪽에 가깝게 규정한다. 우습기보다는 재미 쪽에 더 가까운 것으로
* 아첨이 하나의 기술임을 기억해야 한다. 먼저, 아첨을 하려면 각 상관들이 정말로 듣고 싶어하는 칭찬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아내는 주의력, 이해,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이런 맞춤식의 찬양을 언제 공개할지 가장 알맞은 순간을 골라내는 섬세함과 요령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는 물론 아첨을 농담으로 위장시키는 익살도 필요하다. 상사에게 성공적으로 아첨하려면 이 모든 요령이 필요하다.
* 살아남으려면 위선이 필요하다. 이 악덕을 공격한 사상가는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관되게, 또 격렬하게 공격한 것은 그리스도였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한 번도 생계를 위해 일해본적도, 동료들을 참아내야 했던 적도 없었다(사도들은 결코 동료라고는 할 수 없다.). 업무상의 정직성은 위험한 사치이다. 진정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바보짓이다. 분노의 폭발이나 분쟁, 원한, 터지기 직정의 적대 관계에 개입하는 것은 그보다 더한 바보짓이다.
* 직장에서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는 비밀은 동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들을 이해하는 데 있다.
* 인간이라는 존재는 예상에 따라 살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고 싶어한다.
* 부처, 스피노자, 릴케, 프레더릭 허즈버그가 주장했듯이, 우리는 들판의 백합꽃이 아니라 어려움을 찾아 나서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 프롬에 따르면, "권력에 대한 갈망은 강함이 아니라 허약함에서 생긴다. 그것은 개인적 자아가 자립하여 살아가지 못하는 무능력의 표현이다. 그것은 진정한 힘이 부재하는 곳에서 2차적인 힘을 얻고자 하는 필사적인 시도이다.
* 연인들은 더 많은 것을 기대하면서도 주려는 마음은 더 적어진다.
* 제1의 착각은 남녀가 사귀는 것이 쉽다는 착각이다.
* 줄줄이 인간관계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적어도 문제의 일부는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거의 없는 걸 보면 놀랄 정도다. 더 놀라운 일은 연이어 실패하고서도 또 실패할 것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사람들은 결정적으로 오판하는 것은 다들 사랑을 찾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대개는 매혹을 찾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오판한다.
* 문제는 매혹에는 지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매혹은 길어봤자 2년가량이 한계라는 데는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 1년간 타오른 불과 뒤에 남은 30년간의 재
* 매혹 이야기는 '독자들이여, 난 그 남자아 결혼했다' 로 끝나지만, 사랑의 이야기는 '독자들이여, 나는 갑자기 내 여생을 그와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 시작한다.
* 실제로 매혹에서 사랑으로 넘어가는 길은 힘들다. 그 둘이 많은 측면에서 상반되기 때문이다. 매혹은 초월이고 사랑은 지상으로 내려오는 길이다. 매혹은 환상을 창조하지만 사랑은 현실을 받아들인다. 매혹은 중독이고 사랑은 헌신이다. 매혹은 합일을 갈망하지만 사랑은 분리를 귀중히 여긴다. 매혹은 책임감을 회피하지만 사랑은 진심을 다하여 그것을 받아들인다. 매혹은 노력이 필요 없지만 사랑은 힘든 작업이다.
* 쇄신의 기쁨을 맛보려면 탈진은 꼭 필요하다.
* 결혼이 실패하는 것은 경멸이 너무나 부식성이 강하여 어떤 연대도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파트너는 함께 살기는 더 힘들어도 경멸감을 느낄 여자는 훨씬 적다. 그러니 커플은 상대방이 제각기 성장하도록 격려한다면 더 확실하게 성장할 것이다.
* 성숙한 사랑에서는 거리 두기가 애착을 부추긴다는 모순이 있다. 릴케가 표현했듯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중대한 가업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는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성찰하고 생각하고 자신을 추슬러 자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는 일해야 한다. 뭔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근복적인 조언이다. 연인으로 성공하려면 혼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그 과정은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독립적이다.
* 사랑은 좋아함, 존중, 욕망이라는 세 다리로 이루어진 삼각대로 받쳐져 있다. 어느 다리 하나라도 휘어져버리면 전체가 무너진다.
*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사라지는것이 섹스이다. 이 누락은 흔히 최초의 경고 신호이다.
* 한때는 누구나 다 그런 식으로 요술에 걸리고 열광하고 마법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제 섹스는 그저 나태한 오락의 한 가지 형태에 불과하다.
* 화해의 섹스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경험이다.
* 세상은 점점 더 낯설어지는데, 왜 그걸 이해하려고 상관해야 하는가? 하지만 이런 굴복은 곧바로 노화로 직결되로 확률이 높다. 삶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삶의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삶은 보복을 한다. 흥미를 보이지 않는 사람은 곧 흥미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 원래는 젊음이 우유부단과 의혹의 시기이고 중년은 확신의 시기여야 한다.
* 시대는 현자를 존중하지 않는다.
* 신념의 상실로 인해 자신이 돌팔이이거나 늙은 사기꾼처럼 느껴지는 증상도 있다.
* 장수를 누리는 데 쾌활함은 상관이 없고 만성적으로 쾌활한 사람들은 평균보다 수명이 짧다는 결론이었다.
* 반면, 정념, 집중력, 새 기술의 습득은 수명을 연장해주며 그 품질도 개선시켜주는 것으로 보인다.
* 배우려는 노력이 배움 그 자체보다 더 귀중하며, 별 목적 없는 생각은 가장 즐거움 사유 형태이며, 어려운 기술에 몰입하는 것, 흐름의 경험은 그 어떤 인식보다도 더 큰 보상이 된다.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더 만족스럽다. 모든것에는 그 자체의 보상이 있게 마련이다.
* 시간이 많은 젊은이들은 물직적인 부자처럼 주제넘고 신중하지 못하다.
* 내가 쓴 글귀 중에서 가장 가슴 저린 것은 '매시간이 마지막 시간일 수 있다면 그것은 최초의 시간만큼 아름다울 것이다' 라는 구절이다.
* "철학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죽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라는 문장은 플라톤의 그리스어 문장에서 인용한 키케로의 라틴어 문장을 다시 인용한 몽테뉴의 프랑스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들 모두가 나오기 전에 부처가 있었다. "나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마술을 쓰지 않는다. 자, 내 앞에 나무들이 살아 있다."
죽기를 배우는 것은 살기를 배우는 것이다. 죽음은 삶을 가져다주는 자이다. 엘비스가 경고했듯이, "지금이 아니라면 영원히 아니다."
* 피카소는 "내게 시간은 점점 더 없어져 가는데 말한것은 점점 더 많아진다." 라고 말했다.
* 자신은 떠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이 세상의 굉장함이 그의 눈에는 그런 혼돈으로 보인것이다.
* 왜 나는 불행하고 얼굴을 찡그리고 발을 질질 끌고 다니며 주위의 모든 사람도 똑같은 기분이 들도록 해야 하는가? 당신 자신으로 살아가면 뭔가가 항상 나타난다 . 햇빛은 항상 나오게 마련이다.
* 톨스토이는 말기에 솟아난 절박성으로 인해 문학의 한계를 깨고 나가서 <<종교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무엇을 할 것인가>> 등 대담하게 물음을 던지는 제목을 붙인 작품들을 써냈다.
* 일흔세 살에 나는 자연, 동물, 식물, 조류, 어류, 곤충류의 진정한 특성과 중요한 본질을 약간 이해했다. 따라서 여든 살이 되면 나는 조금 더 진전해 있을 테고, 아흔 살에는 사물의 신비를 깊이 통찰할것이다. 백 살이 되면 나는 참으로 놀라운 경지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백열 살이 되면 내가 찍은 점 하나하나, 내가 긋는 선 하나하나가 저마다 생생하게 살아 있게 될 것이다. 일흔다섯 살에 내가, 한때 호쿠사이였지만 오늘은 화광인인, 그림에 미친 노인이 이 글을 쓴다.
* 시시포스가 지녔던 고전적인 용기와 겸손함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그는 만족감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신들이 명령한 것이 무엇이든 어찌 하면 그것을 이익으로 전환시킬지, 어찌 하면 모든 활동 자체를 보상으로 삼을 수 있는지를 알았다. 시시포스는 끊임없이 바윗덩이를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일을 하면서도 행복했다.
* 20세기의 수많은 불쾌한 발견들 가운데 삶은 본질적으로 부조리하다는 계시가 있다. 이런 생각을 처음 발전시킨 것은 카프카였다. 그의 탐구 여행 이야기에서 탐구의 주인공은 항상 좌절하고 항상 성이나 법원에 입장을 허락받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탐구를 포기하지도 못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절대로 의미를 찾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어야 한다.
* 무는 비어 있지도 않고, 정적은 정지 상태도 아니다.
* 이미지가 내용에 우선하는 현상(달 착륙에서는 사진 외에 건진 것이 없었지만 그 사진은 월석보다도 더 귀중했다.), 절대적 가치보다 차이가 더 중요시되는 현상(미국의 진짜 목적은 소련보다 먼저 달에 착륙하는 것이었다.), 수단이 목적에 앞서는 현상(인간이 달에 간 것은 그저 달에 가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이 출현하게 된 원천인 것이다.
* 저자는 왜 행복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직접적인 추구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얻지 못하고, 그에 대한 집착을 끊고 다른 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가끔 부산물로 얻어지는 것이 행복이다. 이것이 바로 행복의 부조리함이다. 그래서 자신은 행복해야겠다고,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인간은 사실은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할 권리 따위는 없다. 인간 삶의 부조리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 현대인들의 좌절감이 심해지는 또 다른 이유로 저자는 책임 회피를 든다. 즉 욕망의 충족은 원하면서 그에 필요한 의무는 기피하는 것이다.
* 저가가 볼 때 이런 현상은 현대를 휩쓰는 가능성에 대한 숭배 열풍과도 통한다. 현대 사회에서 가능성, 잠재력이라는 말은 대개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에는 큰 함정이 숨어 있다. 실현을 보유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효율적인 수단으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 가능성에 대한 숭배는 항상 뭔가 더 나은 것이 미래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일종의 탐욕이다. 하지만 가능성의 마법은 미래에 마법을 거는 대가로 현재에 대한 환멸을 요구한다. …… 진정으로 흥분할 만한 일은 오로지 다음번에 있을 큰 건수이다. 현재는 실망스러운 것이고, 다음번 연인, 다음번 직업, 프로젝트, 휴가, 행선지, 식사가 무엇보다도 귀중해진다. 그리하여 문제가 생기면 도피하는 것이 가장 매력적인 해결책이 된다."
이처럼 현실 인식을 유보하고 책임을 회피하다 보니 현대인들은 응석받이, 유아적 수준을 영구히 벗어나지 못하고, 그러므로 행복하기를 열망하면서도 행복해지기 위한 행동은 취하지 않는 채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만 품고 있다. 이런 태도로는 문제 해결이 영구히 유보된다.
* 저자가 볼 때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생각하기' 이다. 그것은 단지 오성적이 사고활동이 아니라 더 깊고 전면적인 이해에 도달하는 강렬한 정신 활동이다. 그저 개인의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고려하는 그런 사유이다. 불교와 스피노자의 인식도 바로 그런 사유를 가리킨다. 불교에서 지향하는 깨달음이란 실재의 인식, 자신이 놓인 존재 상황에 대한 전체적 인식이다. 따라서 그것은 곧 부조리한 인간 조건의 인식이기도 하다.
* 생각 없음은 자기 책임성의 포기라고도 할 수 있다.
* 실존주의에서 각각의 개인은 절대적인 고독자이며, 타인은 철저하게 생소한 존재,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자신이 이미 세계 속의 존재임을 깨달음으로써, 또 스스로의 결단에 따라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타인과의 관계 맺음이 가능하다.
* 시시포스가 느끼는 기쁨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이 느끼는 시간의 귀중함과도 통한다.
* 결국은 현재 주어진 것에서 긍정적인 것을 찾아내는 태도, 이것이 삶의 유일한 비밀이라는 말이다. 사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 비밀을 말해 온 사람들은 많다.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다.
* 시시포스는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 아니라 바위를 밀어 올리는 온갖 다양한 방식을 실험하는 중이라고! 그래서 신들을 불쾌하게 만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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