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 3ㅣ지금 시대는 응삼이가 결혼을 해도 오열한다
80년 대 무지한 응삼이와 2020년 대 지성의 정우성은 동격이 되었다. (다양성이 사라진) 돈이 전부인 세상, 결혼이라는 제도에서는 말이다.
복길이 엄마는 억척스러운 캐릭터였다. 마을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주부였다. 겨울에도 일거리를 찾아 돈을 벌기에 마을 주부들이 질투를 넘어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 사람에 있어서 여성미는 없었다. 매일 돈돈거렸다. 복길이 아빠는 그런 와이프를 불만스러워했다.
김용건은 공무원이었다. 어느 날 집에 전화를 걸어서 노란 서류 봉투를 가져오라고 부인 고두심에게 연락을 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얼른 시내에 나가 서류를 전달했다. 하지만 그건 어머니 김혜자의 눈치를 피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날 김용건은 고두심에게 점심을 사주면서 고생이 많다며 위로를 하고 짧은 점심시간의 데이트를 즐겼다.
응삼이에게는 자신을 들들 볶을 와이프도 없었고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와이프도 없었다. 그럼 플러스, 마이너스 원리에 의해서 0이라는 숫자에 수렴을 하면 중간은 가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억측이다. 병원에서 심전도 체크를 하면 그래프가 위아래로 그려지지만 사람이 죽어서 체크를 하면 중간에 선으로 그려진다.
다시 말해서 기쁨도 슬픔도 없다는 것은 죽은 삶과 같다는 뜻이다. 실제로 사람이 죽으면 기쁨도 슬픔도 없기에 와이프 없는 응삼이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이건 숫자 논리다. 인간의 삶이 이렇게 숫자로 점철이 된다면 아마 죽는 게 더 편하다. 인간사는 기쁨보다는 슬픔과 괴로움이 더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아마 복길이 아빠도 와이프가 억척스러워도 가끔 보이는 좋은 모습에 기쁨을 느껴 복길이 동생도 만들려고 했을 것이고, 고두심도 시댁살이에 지쳐도 남편 김용건의 가끔 있는 그런 이벤트에 남편을 믿고 삶을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다.
우리의 삶은 슬픔과 괴로움이 더 많은데 이런 가끔 있는 좋은 일로 인해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건 아마도 사람에 대한 믿음 때문일 거다. 이 사람은 내 편이다, 내 사람이다.라는 믿음이 있고 그걸 이어갈 수 있는 단위마다 확인만 시켜주면 살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우리는 사람을 향해서 살아가고 사람과 연결됨에 따라서 안정감을 느끼며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응삼이는 평생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배신만 당해 사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숫자 놀음으로만 보면 0이라고 볼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마이너스만 있는 삶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보편적인 사람이라면 배신만 당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얼마든지 신뢰를 할만한 사람을 찾을 수 있다. 즉 응삼이는 신뢰할 수 있는 여자를 찾을 수 없다는 절망 속에 살고 있기에 괴로운 것이다.
그럼 응삼이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응삼이는 누구나 다 결혼을 하던 시대에도 그런 믿음의 존재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마을의 연줄을 알고 있는 복길이 할머니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 것이다. 이건 지금으로 치자면 동남아 국제결혼의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지금의 지역에서 찾을 수 없기에 원정까지 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한 번이 아니라 될 때까지 패키지로 인해서 여럿을 소개받을 수 있기에 어떻게 보면 큰 변화의 고민을 가지지 않고 횟수만 늘리면 상관없지만 응삼이는 이미 늦어버린 결혼 시점에 소개도 한 번으로 끝나고 여차해서 소개녀 마을에 소문이라도 잘 못나면 다른 만남의 기회도 사라질 수 있으니 원샷원킬로 해결해야 하는 큰 스트레스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인지를 하지 못하는 응삼이는 살던 데로 살다가 여자에게 거절을 당한 것이다.
당시의 시골에서의 삶은 거기서 거긴데 자기 마을에서 못 만난 처자를 다른 마을 사람이라고 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자기반성의 기능이 없는 응삼이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로서의 변화가 없었기에 그렇게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내가 혼자로 쭉 살아간다는 것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고, 이걸 역으로 생각하면 그런 변화 없는 세상 속에서는 응삼도 타인들에게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된 꼴이 간접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그리고 그건 평생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평생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평생 외롭게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응삼이는 육체는 살아서 낮에는 농사를 짓고 살아가지만 밤에는 외로움으로 죽음의 감정으로 살아가야 하기에 서럽게 오열을 한 것이다. 즉 응삼이는 신뢰할 수 있는 여자를 찾을 수 없다는 절망 속에 살고 있기에 괴로운 것이다.
그에 반해 정우성은 응삼이의 대척점에 있다. 시대도, 외모도, 재산도, 생각도 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생각이다. 응삼이의 좁은 생각에 비해 난민까지 갔다는 것은 생각이 국제적으로 쭉쭉 진화를 했다. 동네가 세상의 전부여서 매력 없고 재미없던 응삼이와 달리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생각을 지닌 정우성은 세상 사람들이 매력없고 재미가 없어서 대화가 통하는 관계를 만들지 못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인해서 두 사람은 대척점에 있지만 같은 고민을 지니게 된다. 바로 내가 정신적으로는 죽었다고 느껴지는 감정인 외로움 말이다.
ㅣ2020년 대 전원일기
얼마 전 2차 관계의 동생이 전화를 통해 질문을 했다. "도대체 자아가 뭡니까?" 어머니 지인의 회사에 들어가 힘든 직장 생활을 넘어 이제는 나와야겠다고 판단이 들어서 생겨난 질문이다. 결국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야 겨우 나온다. 근본 질문이 말이다.
그 직장은 자기 빼고는 전부 사장의 친인척이라서 자신이 가장 밉보이는 곳이다. 그래서 늘 진급에서 밀리고 다들 친인척이다 보니 누명도 자신에게 씌우는 일도 빈번했다. 한 번은 인도네시아에 부품 전달을 하라고 전날 저녁에 연락해서 보낸 적도 있었고 한 달 출장도 전날에 연락해서 보내기도 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인데도 와이프는 일을 하지 않는다. 남편보고 원래 누구 밑에서 일할 사람 아니니 장사하자고 한다. 응원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은 끝까지 놀겠다는 의지를 품은 말이다. 하지만 진짜 나와야 할 상황이 되니 급하게 취업을 했다. 급여도 결혼 전 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했다. 하지만 3개월 만에 나왔다. 남편이 오해가 풀리는 일도 생겨서 다시 직장에 다질 수 있는 여지가 생기니 적당한 핑계를 대고 나온 것이다.
동생은 와이프가 일을 시작할 때 15년 계획을 짜고 신나 했다. 이렇게 15년만 함께 일을 하면 자식 대학까지 졸업시켜 은퇴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고서 말이다.
결국 동생의 질문은 와이프와의 믿음에 금이 간 사이로 외로움에서 삐져나온 것이고 정신적 죽음에 임박했을 때 살려고 자아를 찾아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동생은 잠시나마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나로 인해서 삶의 응급처치를 받았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일단 스스로 지속적으로 이런 생각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하고 이런 대화의 상대는 와이프가 되어야 해결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동생은 나와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기초공사는 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외부에서 이런 위로라도 받을 수 있는 거다.
ㅣ남자라는 존재에 대한 세상의 위로
남자는 일평생 위로라는 것을 받으면서 살아본 적이 없다. 심지어 남자들도 그걸 당연시한다. 여기에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남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대우를 받지 위로는 전혀 없다. 대우와 위로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 대우는 책임감을 어깨에 씌우고 위로는 책임감을 덜어주는 전혀 다른 역할이기 때문이다.
반면 여자들은 어릴 때부터 신데렐라 위로를 받고 살아간다. 피투 된 삶에 자기가 잘되는 삶을 살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왕자님 만나서 기대 살아도 된다는 위로는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아주 큰 부분으로 작용한다. 어떨 때는 시크릿 가든의 현빈을 보면서 위로를 받고 어떨때는 태양의 후예의 송중기를 보면서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아주 강력한 위로는 같은 여자들과 공유가 가능하고 거기에서 공감을 서로 페어링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페어링이 국가 단위로 일어나니 여자들 사회에서는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공감을 무언으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남자들을 이렇게 생각하는 여자를 보호해 주는 왕자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드래곤 볼을 보면서 좋아하지만 제대로 된 얘기를 하지 못하고, 슬램덩크를 보지만 그때 잠시 수다로 끝난다. 어쩌다 거기에 빠져 사는 인간들을 유치하다고 말하고 오타쿠라고 놀림을 받는다. 남자들은 여자들처럼 신데렐라 이야기를 공유하듯이 드래곤 볼과 슬램덩크를 공유하지 못하니 서로를 위로하는 일도 없다. 그렇게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공부 잘하는 인간이 그 세계를 지배한다.
남자들은 피투 된 세상에 몰리면서 동시에 같은 종족끼리도 압박을 가하는 삶을 당연하게 살아내고 있다. 이런 압박의 삶에 외로움을 느낀 남자들은 그래도 조금은 철학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때 입시에 몰리면서 생각하는 수준으로는 땅만 고르고 기초공사도 시작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을 직시하는 여자들에게도 무시당하며,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그런 질문이 들어도 생각을 뒤로한 채 자신이 가장 잘하는 공부만 한다. 생각해 보면 공부만큼 확실한 보장을 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자는 평생을 주변 누구에도 공감을 얻지 못하며 외롭게 살아간다. 그래서 남자들은 1차 욕구인 섹스에 집착하며, 권력에 노예가 되고, 이 둘의 상징적인 존재가 바로 돈이기에 돈을 필요 이상으로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는 것이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비루한 몸뚱이를 가지고 있더라도 박민영이나 손담비를 만날 수 있고, 권력이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대우해 주며 어떤 말을 하더라도 공감해 준다. 지금의 꼰대 부장님의 탄생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 남자는 평생 느끼지 못한 외로움을 달래주는 감정을 중년이 되어 느끼게 되어 돈과 권력과 섹스를 추구하는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꼰대의 탄생은 불쌍함에서 태어난 비루한 성격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삶을 절제하기 위해서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교육은 생활 철학을 거세했기 때문에 남자들은 절제하는 법을 모른다. 더 많은 돈과 권력을 모아서 더 예쁜 여자를 만나 섹스를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이 정신을 지배해서 움직이고 있다. 그나마 지금의 절제는 사회 감시망이라도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결국 남자는 외롭다는 것도 모른 체 외로움을 무의식으로 느끼며 잠시 달램을 받을 수 있는 섹스를 그리워하고 그걸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게 하는 권력과 돈을 동경하고 그걸 이룬 사람은 그 맛에 취해버렸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무조건적인 공감을 얻는 권력은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그 이하의 남자는 당연히 또 다른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존재인 여자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대화 능력을 잃은 여자들은 돈 많은 남자들만 찾으며 그 돈으로 가방과 옷을 인스타그램에 보여주며 왕자님을 만난듯한 신데렐라 흉내를 내며 외로움을 달랠 수 있다. 그리고 대화 능력을 잃은 남자들은 그 돈으로 여자들에게 어필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섹스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랜다.
이리하여 결혼이 필수라는 사회관념이 통용되던 시절 서로의 재산과 외모에 맞게 계약을 하여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보통의 남자들 벌이로 여자들을 신데렐라로 만들어줄 수 없다. 그리고 예쁜 여자들의 인구는 강남 피카소들에게 의해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남자 없이 스스로 신데렐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능력 없는 남자를 넘어서 그냥 남자를 거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렇다 보니 결혼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이 된 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애써 자신을 감추기보다는 옷을 벗으며 룩북을 찍고, 춤을 추며 부를 창출할 수 있게 되었다. 친엄마가 살아있어 계속 부자로 살 수 있는 신데렐라로 거듭난 것이다.
응삼이의 세상에는 그래도 도덕을 얘기하며 살았다. 철학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돈돈거리며 살기보다는 인간다움에 대한 처신이 중요하게 여겨지던 때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돈이 모든 것이다. 그걸 인정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니 돈이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은 무모하다.
더군다나 남자는 일평생을 위로받지 못한 상태에서 돈까지 없으면 어디에서 존중도 받지 못한 상태다. 그런 사람이 연애를 하면 여자에게 집착하게 되고 이별 통보를 받으면 겉으로는 돈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신적 죽음인 외로움 속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사자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그 부모까지 죽이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같이 죽자는 심보인 것이다. 제어장치인 도덕과 철학이 없는 사회에서 돈을 인정하는 사회까지 이르게 되니 무능한 남자는 짐승이 되어가게 된다.
이와 더불어 못생긴 여자들도 위기를 맞이했다. 아무리 여자들끼리의 위로와 공감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고 해도 그것도 도덕과 철학이 있을 때 친구친구하면서 그랬지 지금처럼 돈을 인정하는 사회에서는 외모 또한 인정하는 사회가 되어버렸기에 못생긴 여자들이 돈까지 없으면 능력 없는 남자 취급을 받게 된다. 결국 이들도 지금 시대에는 남자 못지않게 위로를 받지 못한 상태로 살았다는 뜻이다. 그나마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이 있어서 본래의 의미를 무시한 채 그 이름을 빌려다가 남자를 적으로 만들어서 정부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도 끊긴 사회에서는 해체가 되어서 결국 외로움 속에 빠지게 되니 다시 정부에게 돈이라도 뜯을 심산으로 계속 남자를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결혼할 사람은 어느 정도 존중과 사랑과 위로를 받고 자란 사람들끼리 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여력이 있기 때문이다. 평생을 남들에게 무시만 당한 사람은 상대방에게 이해와 사랑만 바라게 되어 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억울함을 한꺼번에 다 보상받을 심산으로 덤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헤어져주지 않는다. 그나마 돈을 뜯어내고 헤어져주면 고마운 사람이고 극단적으로는 살인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응삼이가 이런 시대에 결혼을 하면 어떻게 될까? 이런 시국에 정우성이 결혼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가정이 과연 온전할까? 돈이 전부인 세상에 돈이 있는 사람들은 돈 쓰면서 살면 되지만 돈 없는 사람이 결혼하면 불행이 너무 뻔히 보이는 사회이고 돈이 전부인 세상에 가치관에 대한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면 외로움에 서로 다른 사람을 보면서 갈라서게 될 것은 뻔한데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정우성은 결혼을 할 이유는 없다.
돈이 전부인 세상은 응삼이가 될 때까지 패키지로 결혼을 했다고 해서 오열을 피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리고 지성이 없는 사회에 사는 정우성은 응삼이와 같은 상황인 거다. 하지만 정우성이 응삼이와 다른 조건은 이 세상은 인스타그램이 있다.
(사족)
중간만 하라는 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사회다. 돈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중간만 해야 대충의 대화만으로도 일상이 스무스하게 넘어간다. 돈 없으면 다 듣기 싫은 소리다. 그리고 그 돈을 벌려고 억척같이 일을 해서도 안된다. 여유 있게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이것이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 행복론이다.
즉 지금 사회는 복길이네도, 최불암 이장님 댁도 80년대처럼 불편함을 감수하고 오손도손 살기보다는 다 뿔뿔이 흩어져 살고 이혼도 했을 거다.
돈이 전부라고 인정하는 사회에 돈은 행복이다. 없으면 외로운 거다. 돈이 없어서 불행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불행은 상대적이라서 그렇다. 하지만 외로움은 절대적이기에 한 번 빠지면 나오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요즘은 나만 돈이 없는 거 같으니 상대적 불행에서 헤어 나올 길이 없다는 점에서 외로움과 같은 입장이긴 한 거 같다.
아무튼 돈이 인간의 감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외로움과 같은 감정이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닌 돈으로부터 시작되어 온다는 것은 그 사회가 망해간다는 뜻이다.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지 못하는 사회의 증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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