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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담긴 가치관 혹은 신념을 말한다. 그 태도가 가문에 남길만한 업적이 되면 그 가문의 삶의 지표가 된다. 그리고 국가적이라면 국가관이 된다. 이 가치관을 어어 받은 자손들은 최대한 그 뜻(태도)을 이해해서 지켜나가거나 최소한 그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으려고 살아간다.
이런 삶의 태도가 그 가문의 사람들을 사람답게 살아가게 한다. 타인들에게 조상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동을 보이지 않게 하는 태도가 말이다.
그리고 이제 이런 시대는 끝났다. 그 이름(들)은 이제 없다. 있다고 한들 그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짓은 하지 못하겠다고 들고 일어섰다. (실제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데 말이다. 엄살이다.)
하지만 이 이름값을 하는 태도, -가치관이라고 불러도 좋고 철학이라고 불러도 좋다- 이런 것들이 없으니 사람들은 갈 길을 잃고 자기 멋대로 살고 있다. 그 이름이 자신들의 삶을 옭아맨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 가치관이 자신들이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는 길이었고 이정표였다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대낮에 칼을 들고 나와서 사람들을 해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면 이제는 그 이름(가치관, 철학)을 찾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아야 하는데 아직도 사람들은 모른다. 여기까지 온 현상은 아마 사람들이 언어까지 잃어버리는 상황까지 와서 그렇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문학자, 철학자들이 나서지 않으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언어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학교 갔다 온다'는 말에는 어떻게든 의대 들어가는 지식을 구겨 넣고 올게,라는 의미가 있을 수 있고, 친구들이랑 놀다가 올게,라는 의미일 수 있고, 학교를 왜 가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가라니까 갔다 올게,라는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아마 요즘 의미는 첫 번째 문장일 거다. 과거에는 두 번째 문장이었을 거고, 세 번째 문장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다녔다.
하지만 현재 언어를 잃어버린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이런 의미도 다들 모를 거다. 그냥, 어른들이 학교라는 것을 만들어놨고 이제는 그 학교라는 것을 거스르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시대이니 물리적으로 4km 떨어진 그 건물에 갔다 올게,라는 식으로 패턴화 된 고착어가 되었을 거다. (여기에는 의미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엇도 없다. 오직 정보만 있을 뿐이다.)
바로 언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는 어느정도 미래성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학교가 나의 미래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의미를 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거나, 집안이 어떻게든 지원이 가능한 소수만이 의대에 갈 수 있는 지식을 구겨 넣고 올게,라는 의미로 학교에 다녀온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거고 이 이외의 사람들은 그냥 그 건물에 갔다 올게, 로 그 문장을 사용하게 된다.
추상적인 말의 예로는 잘못을 하고 나서 '(다음부터는) 열심히 하겠습니다'가 있다. 이 말을 하고는 진짜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혹은 자신이 그랬던 적이 있는가를 생각보라. 우리는 이 말을 의미 있게 쓰지 않는다. 열심히 할 대상(직업이든 사람이든)이 미래성이 없어서 그런 거다. 그래서 상사나 어른들이 혼을 내면 그냥 내뱉는 말이 되었다. 아무 의미가 없다. 이건 언어가 아니다. 그냥 소리고 일단 나를 알아주지 않는 어른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패턴화 된 고착어일 뿐이다.
그래서 이 반대로 칭찬을 듣고 나서 내뱉은 '열심히 하겠습니다'는 의미를 두게 된다. 잘하고 있다는 의미의 칭찬은 최소한 그 직장에서만큼 미래성이 보인다는 의미로 전달이 되기에 좀 더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좀 더 열심히 하는 티를 내기 위해서 좀 더 일찍 출근하는 모습도 보이기도 한다.
이 말은 결국 현대는 미래가 없다는 현상을 우리는 무의식 중에 인지하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언어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서 80년대는 열심히 일만하면 아파트라도 살 수 있는 미래가 있었기에 그 미래를 파괴하고 싶지 않아서 어떤 의미인지 몰라도 착하게 살아라, 열심히 살아라, 공부 열심히 해라, 돈을 좇지 말고 살아라, 같은 고리타분하지만 그래도 사람답게 살아갈 언어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 언어는 90년대 의미를 잃어가기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서서 이제는 우리를 배신한 언어가 되어 사어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막상 이런 언어들이 사라지니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가며 살아가야 할지 몰라서 허둥지둥 거리며 그 건물에 드나들면서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없는 수준의 월급을 받고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월급으로는 미래가 없다고 눈치챈 일부 사람들은 그 건물의 출입증도 포기하고 집안에서 살아간다. 허둥지둥이라도 해서 미래를 찾는 것도 귀찮은 것이다. 어차피 그래봤자 미래가 없다면 몸이라도 편한 것이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모에게 기댄 (반려) 동물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직장 상사 눈치보다는 부모 눈치가 나을 수 있다. 돈만 쓰지 않는다면 월급이 없어도 용돈으로 한 달을 버틸 수도 있다. 하지만 뭔가 느껴지는 불편함은 이렇게 사는 이유를 찾게 만든다. 뇌는 이유를 찾지 못하면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대고 있는 말이 짐작컨대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말이다. 은연중에 다들 길을 찾고 있는 중이라는 말에 기대서 살거다.
하지만 이 격언(언어)은 한 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오기 힘든 구시대의 언어다.
지금처럼 다양한 경험이 필수고 가능한 시대는 방향보다는 속도를 내서 많은 경험을 한 다음에 방향을 정하는 것이 순서다.
하지만 언어를 잃어버린 시대의 사람들은 그냥 그 말의 표면만을 보고 그걸 다 이해했다고 착각해 이 말에 기댄 채 가치관 화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고 이다음 가치관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늪에 빠진 상태에서 삶을 가만히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어떠한 학자도 이 언어가 구시대적인 말이라는 것을 하지 않고 있다.) 속도를 내어 어떻게든 빠져나올 행동은 하지 않고서 말이다. (아마 움직이면 더 빨리 빠질 거라는 핑계를 댈 거다. 어차피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빠지는데 말이다.)
소리라도 질러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안 한다. 솔직히 도와달라고 해서 누가 오더라도 요즘처럼 획일화된 시스템과 무경험의 시대에서는 도와줄 방법도 서로 몰라서 공감의 언어랍시고 어쩌냐고 힘들겠다,라는 상황 파악 안 하는 패턴화 된 고착어만 말할게 뻔하다. 그리고 설사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오더라도 그 충고는 무조건 듣기 싫은 말만 할 테니 부르지도 않는 걸 거다.
지금 시대는 결과를 확실하게 만들 수 있는 말 이외의 쓴 말은 다 헛소리라고 치부하는 시대가 때문이다. 미래가 확실히 보장된 삶이라는 것이 과연 일류에게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래서 언어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한 가지 단어로 귀결했다. 바로 돈이다. 돈만큼 미래를 확실히 보장하고 현재의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건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다시 말해서 나를 늪에서 꺼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를 위해서 돈을 쓰는 사람 말고는 필요 없다고 결론을 내린 시대다.
결국 언어를 잃어버린 시대가 바로 물질만능주의라는 개념으로 귀결된다. 돈만이 내 인생을 구원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언어의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된 것이다.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언어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제 명함도 필요 없다. 상표가 곧 나다. 그 상표를 살 수 있는 돈을 가진 존재가 바로 나다. 더 이상의 언어는 필요 없어진 것이다.
솔직히 영원히 마르지 않는 통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도 좋지 아니한가? 그래야 돈 있는 사람들은 무식하도고 놀릴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부에 대한 혐오도 조장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철학을 가져서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역사가 그걸 증명한다.)
하지만 99%의 이상의 사람들은 그런 통장이 없다. 그러니 돈을 사용함에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이걸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갖지 못할걸 뻔히 알면서도 마르지 않는 통장을 계속 원하고 자신은 그런 인생일 거라고 착각 속에 살아간다.
이런 논리로 성공한 인생이 프리지아와 역행자가 아닐까 싶다. 다들 이들이 가짜 상표와 가짜 인생으로 돈을 벌었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이들을 부러워만 할 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삶이 가짜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 다들 이들처럼 살아가면 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능력'과 '담력'이 되어야 가능하다. 모두 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기는 불가능하다. 간단한 자본주의 논리로만 따져도 이들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노동자는 필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노동자가 바로 우리들이다. 이들을 부러워하기만 하는 우리들 말이다. 이들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우리도 물질만능주의에 젖어서 언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언어를 다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름을 남기고 간 사람들의 언어를 배울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름이 바로 쇼펜하우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언어를 더 사라지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쇼펜하우어의 언어는 고립을 더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독을 주장하지만 고독은 언어를 철학 수준으로 끌어올린 사람의 영역이다. 다시 말해서 고독은 자신의 머릿속에 대화의 상대를 지정해 두고 시간을 보내는 삶의 방식이다. 쇼펜하우어게는 칸트가 고독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는 누가 있고 어떤 언어가 존재하는가? 바로 돈이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우리는 고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고독이 아닌 고립이 되는 것이다.
언어가 없이 삶을 고립적으로 살아가면 그 상태에서 더 퇴화한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는 그 퇴화를 촉진하는 촉매제다. 유튜브 영상에서 누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것을 들으면 내 생각과 같다고 생각하고 사진은 입을 다물고 나도 그런 생각을 하기에 그런 인생을 산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넥플릭스는 이 고립된 상태를 더 머물게 하여 다음 기회를 놓쳐버리게 만든다. 늑대가 늑대 이상의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은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늑대가 길들여져서 강아지로 퇴화한 것도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강아지가 된 늑대는 결국 언어를 가진 존재에 의해서 퇴화한 것이다. 우리는 유튜브에 길들여진 강아지가 된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우리는 프리지아나 역행자 같은 존재를 더 부자로 만들어주면서 퇴화가 될 것이다. 우리도 모르는 새 말이다. 그래도 주인 잘 만나면 다행일 수 있다. 마르지 않는 통장을 가진 주인이 나를 예뻐하면 그 또한 성공한 삶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 좁은 확률이 나에게 올 수 있다고 가정을 하고 그 주인을 만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우리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결혼'과 '스폰'을 받는 방법이다. 하지만 두 방법 다 마르지 않는 통장을 직접 손에 넣는 방법이 아니다. 주인이 먼저 죽으면 어디서 간식도 못 얻어먹을 강아지처럼 마르지 않는 통장의 주인이 사라지거나 예뻐하지 않으면 그 돈은 나에게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지속적인 예쁨을 받기 위해서는 결혼 형태의 만남은 돈의 주인과 통하는 언어를 배워서 즐거움을 주어야 하며, 스폰의 관계에서는 외모를 예쁘게 가꿔서 예쁨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건 두 차이의 주가 그렇다는 것이지 결혼도 외모가 예뻐야 함은 분명하고 스폰도 언어가 부족하면 어느 순간부터는 지겨운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나마 결혼의 형태는 법의 보호가 있기에 마르지 않는 통장 주인의 인내심이 어느 정도 첨가 되어 있다. 그리고 결혼은 상대방의 행복요소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예를 들면 시부모님에게 잘하거나 자식을 잘 기른다는 덕목이 있다면 외모가 다소 딸려도 인내심은 더 증가하기에 결혼생활이 유지가 된다.
반면 스폰은 뭐가 없다. 굳이 그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면 사랑으로 관계를 발전시켜야 하고 그 발전은 다소 큰 위험을 감수하게 만들기에 다 버릴 각오도 되어 있어야 한다. 행여 성공한다고 해도 결혼의 형태로 이어져야 유지가 되기에 결국 언어를 더 잘 구사해야 하고 시부모님에게 아무리 잘해도 미움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내 자식의 돈(혹은 부모의 돈)만을 보고 가정을 파탄 내면서 그 자리를 꿰찬 사람을 좋게 볼리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언어가 중요하다는 삶이 결혼생활이라는 것을 모르고 결혼을 한 사람들은 이혼을 쉽게 한다. 결혼이라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마 남자는 마치 자신은 철부지처럼 계속 살아도 되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해서고, 여자는 자신이 공주처럼 살게 되는 삶이 결혼이라고 착각해서 그럴 거다. 결혼을 한다,라는 언어를 모르니 발생되는 DNA적 삶의 형태를 지속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관찰한 결과 결혼은 불행이라는 결론을 내린 사람들은 결혼을 포기한다. 그렇다고 스폰도 귀찮게 생각한다. 지금의 세상은 스폰과 매춘의 중간 형태가 가능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성매매를 하지 않고 자신의 육체자본으로 얼마든지 돈을 벌게 해주는 시스템을 갖췄다. 더군다나 언어가 사라진 세상이니 자신들을 비난하는 세력은 많이 사라졌다. 신경도 쓰지 않는 세력도 포함한다면 이들을 비난하는 세력은 상당히 줄어든다. 가짜 상표를 들고 나와서 가짜 인생을 팔며 인터넷으로 돈을 버는 것과 자신의 진짜 몸을 보여주며 돈을 버는 것 중 무엇이 나은 지는 알 길이 없다. 더군다나 언어가 사라졌으니 더 미궁 속에 빠진 질문이 되었다.
심지어 이들의 존재가 퍼짐으로써 직접 성기 접촉성 성매매가 줄어 곧 사라질 세상이 온다고 한다면 사회적 기준으로 봤을 때 더 깨끗한 사회가 된다는 이론도 성립이 된다.
결국 모든 건 언어다. 언어가 풍부한 사회가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문해력이 뛰어난 사회라고 표현해도 좋고 철학이 만연한 사회라고 표현한다면 더할 나위 없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으니 나도 이렇게 살아가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가만히만 있어도 이런 사회에 오염이 되니 가만히만 있어도 안된다. 언어가 오염되고 언어가 패턴화 된 고착어만 사용하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사회가 죽었다는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자연까지는 아닌 사회와 자연 그 중간에 어디에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사회는 학력이 중요하고, 권력이 중요하고, 의미를 떠난 말만 잘하는 사람들이 강세를 누리는 세상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가 이들에게 돈이 몰리며 권력을 잡고 있고 한 번 잡은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권모술수를 쓰며 국민들을 농락하고, 우리도 언어가 부족하니 농락당하는 것도 몰라서 그들을 추앙하며 받들고 있다.
자연의 기본 원리인 약육'강'식의 강이 육체의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닌 1차 학력에서 2차 권력을 잡고 3차 말만 잘하는 사람으로만 바뀐 세상이 지금의 세상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이 한 말을 절대 지키지 않아도 된다. 그냥 말의 의미도 몰라도 된다. 그냥 소리만 내는 말만 잘해도 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 생각 없이 살면 언젠가는 우리도 당한다. 쉽게 말해서 10년 넘게 월급은 오르지 않고, 부모보다 월급을 적게 버는 자식의 시대가 도래했고,그 와중에 공부 못하는 사람들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할 직장인 제조업은 사라지게 만들고, 그렇다고 그에 맞게 교육은 바뀌지 않고 있는 세상이라 집 한 채도 사기 어려운 상황인데 세금을 늘려서 부모님이 사놓은 집도 온전히 받지 못하게 만들어 놓지 않았는가? 이 시스템의 골자의 말이 바로 '공정'과 '평등'이다. 전 대통령은 공정과 평등이 어떤 의미를 담은 언어인지 그 단어가 인구의 몇 %를 담을 수 있는지, 5,000만 인구 전부를 다 담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미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정책인 거다. 결국 우리는 집을 사지도 못하는데 부모의 집도 온전히 받을 수 없게 되었다.(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무서우면서도 가장 분하다.)
결국 가만히 있으면 이렇게 당하는 것이다.
그러니 언어를 배워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름을 남긴 이들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쇼펜하우어 이전에는 니체의 언어가 우리에게 있었다. 신을 우리가 죽였다는 말은 신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는 세상이 사라지고 우리가 직접 자신의 신(주인)이 되어서 나의 삶을 스스로 디자인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이다. 하지만 TV와 유튜브가 만연한 세상에 어떠한 인문학자도 세상에 나와서 이런 말을 우리에게 전해주지 않으니 니체의 언어를 그냥 유행어처럼 알고 있다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그것도 소수만이 알고 지나쳐버렸고 그래서 현대에 당도한 언어가 쇼펜하우어가 되었다.
하지만 쇼펜하우도 말했다. 우정은 함께 해야 한다고 말이다. 우정도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끼리 나우는 감정이다. 단지 쇼펜하우어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였던 헤겔을 너무 미워한 나머지 자신이 최고라고 착각에 빠져서 우정을 나눌 사람이 없다고 착각한 삶을 살았기에 고독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심지어 자신도 고독은 자신이 있었어도 외로움은 무서웠던 건지 헤겔에게 망신당한 이후 야반도주를 했는데 시골이 아닌 프랑크푸르트(대도시)에 머물며 살았다. 대도시는 필수적으로 약한 유대관계를 맺고 살아가게 되니 외로움을 덜어낼 수 있는 환경인 것이다.
관계 안에서의 삶은 대화가 90% 이상이다. 밥 먹을 때도, 커피를 마실 때도, 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말이다. 침묵의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극히 드문 현상이다. 그러니 다시 언어를 배워야 한다. 과거처럼 패턴화 된 고착어만 쓰던 때 보다 더 진화를 해야 한다. 80년대의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에 의미를 만들어 사용해야 하며 그 의미가 틀렸다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서 의미를 재정립해야 한다.
원래는 생각하는 것이 전문직업인 생각하는 계층의 철학자나 인문학자가 해야 하는 일인데 이제는 아무도 그런 일을 하지 않으니 우리가 직접 해야 한다.
책은 읽는 게 좋지만 책을 읽지 않아도 좋다. 책을 처음 쓴 사람은 책을 읽지 않았다. 생각이 책을 읽는 것보다 먼저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봄으로써 언어를 만들어가는 것부터 해도 좋다. 되려 책을 읽으면 책을 읽는 행위로 인해서 나는 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될 수 있다. 비판 없이 읽는 책은 작가의 생각을 흡수하는 행동이 최선이다. 그래서 우리는 쇼펜하우어 언어에 무비판적으로 크게 공감을 하는 거다.
그리고 반드시 그 생각을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서 정리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생각한 그 언어는 사어가 되어버리고 만다. 사어는 행동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고 행동하지 못하는 언어를 가지고 있으면 나는 그런 사람이다,라고 착각하게 되어 자신이 생각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러한 삶은 작정하고 비언어적 삶을 살아가는 존재보다 못한 삶이 된다. 언젠가 인생을 뒤돌아봤을 때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생각을 자꾸 말로 꺼내고 그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찾는 것부터 시작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그 생각이 정리가 되고 오버스러운 것은 잘 조각이 되어서 보기 좋게 생각을 다듬을 수 있게 된다. 거기에 유연함까지 첨가하게 된다면 그 생각이 곧 자신의 삶이 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너무 생각을 딱딱하게 해 왔기 때문에 세상을 움직이지 못해서 서구보다도 일본보다도 현대화를 더 늦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것도 전쟁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시작했다. 딱딱한 생각은 패턴화 된 고착어만 많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생각을 다듬었다고 해도 계속 대화를 이어가야 유연함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사람(친구)을 찾지 못했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이 독서다. 그리고 최고 단계가 고독이다.
(공지사항)
대화가 필요하신 분의 신청을 받습니다.
주변 사람들과는 뻔한 얘기만 해서 자신의 언어가 줄어들고 그래서 행동반경이 좁아지고 속이 답답하고 좁아진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있다면 신청 바랍니다.
- 신청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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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저도 이런 세상에서 사람을 조심하고 싶기에 좀 까다로운 필터 장치로 신청자를 받기로 했습니다. 이 정도 필터로 신청자를 거른다면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자신을 숨기거나 너무 어둡게 사시는 분들과의 접촉은 이제 저도 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진행은 영상통화로 서로 안심할 수 있게 얼굴을 보고 진행할 겁니다. 그리고 연락 주시는 분들은 남기신 연락처로 가격과 진행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사실 신청자가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공식적인 신청 방법과 기준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행여 신청자가 있어서 더 자세한 사항이 필요하다면 추후에 올리겠습니다.
카톡 ID : spike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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