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행복은 각자의 몫인가?ㅣ사랑을 돈으로 환전한 시대
3. 행복은 각자의 몫인가?ㅣ사랑을 돈으로 환전한 시대
지성이 사라진 시대에는 감정으로 살기보다는 이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성을 문제를 해결하지만 감성은 문제를 더 크게 만들 뿐이다.
결혼은 (거의) 거래다. 누군가를 만나는 조건을 따지는 것 자체가 거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글에서 우리나라 결혼 문화가 매춘화 되어가고 있다는 글도 올렸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들 이걸 인지하고 있다. 단지 결혼을 거래라고 부르는 것이 거북하니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거고 프러포즈 비용을 천만 원이나 들여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면서도 매춘이라는 단어를 어떻게든 사랑으로 포장시키려고 애쓰는 거다.
아무튼 여기에서 내가 궁금한 것은 다른 건 다 거래로 생각하면서 왜 상대방이 바람을 피우면 나도 한 번 바람피울 권리를 갖는 거래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혼을 생각하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왜 굳이 애써 문제를 크게 만들어서 해결을 보려고 할까? 상품 같은 물질은 두 말할 거 없거니와 내가 한 번 친구들과 놀고 오면 상대방도 그럴 권리는 주는 식의 거래는 하면서 말이다. 심지어 과거에는 남자는 다들 그렇다며 여자들이 한 번은 용서를 하고 참으며 살아온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다.
이성적으로는 어차피 함께 살기로 한 사이에서 그냥 거래로 마무리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는다. 물론 심리적으로는 이해가 충분히 간다. 그래서 짐작컨대 지금 우리의 심리는 어쩌면 우리 사회의 관습에 의해서 학습된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냉철하게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문제다.
1부 1처제가 실패하여 50%가 이혼하는 세상에서 오피스 부부 문제에 이어 출산을 하지 않는 부부 그리고 상대방의 사생활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결혼을 하는 부부가 탄생하는 과정까지 왔으니 말이다.
▶ 오피스 와이프, 허즈번드
오피스 부부가 생겨나는 원인은 법적 부부사이에서 생겨나는 문제의 감정이 해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결혼 생활 문화는 친구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문화로 진화를 했기에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해소할 방법이 거의 없다. 일단 법적 부부 사이가 대화가 거의 안 되는 건 앞 글에서 누누이 얘기를 했다. 그러는 와중에 문제가 생기면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서 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친구다. 하지만 친구를 이럴 때마다 만나는 건 있을 수 없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틈틈이 만나줘야 한다. 그러면 한 명은 외롭거나 심심한 상태가 된다. 아기까지 있으면 더 문제를 심각하게 본다. 어쩌다 친구를 만날 것을 허락하면 틈틈이 전화로 언제 올건지를 물어본다. 그건 친구를 만나게는 하지만 본질을 흐리게 하는 요소가 되어 차라리 만나지 않았던 것이 나았다는 감정을 가지게 된다.
이런 현실에서 직장 동료는 흐름이 끊기지 않고 대화가 가능하고 그 흐름은 달 단위를 넘기는 연속성도 가진다. 거기에다가 틈틈이 얘기할 기회도 만들 수 있으며 같이 일하는 사이니 충고보다는 이해를 해주려는 태도 또한 마음이 풀리게 되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런데 그 직장 동료와 일을 함에 업무 성과까지 좋아버리면 당연히 꿍짝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사람이 그 공간에 있는 얘기만 할 때와 사생활까지 공유 가능한 사이까지 된다는 것은 그 친밀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장에서 함께 업무를 보는 사람과 자신의 고민까지 이야기하면서 감사의 인사까지 표시할 사이까지 되는데 업무 성과까지 좋으면 사실상 베프가 되는 거고 여기에 성과로 공간을 이동해 회사밖에서 회식까지 하게 되면 그 친밀도는 더 견고해져 오피스 부부처럼 보이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상황상 오피스 부부가 되는 거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보면 둘 사이는 뭔지 모를 감정도 생기고 그러다 보면 잠자리도 갖게 되는 현상까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문제는 일회성으로 끝나느냐 연속적이냐, 연속적인데 감정을 가지고 하느냐 아니면 각자의 복잡한 삶 속에서 이런 잠자리가 위안이 되니 자는 친구로 지속하느냐의 차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는데로 살다가 여기까지 문제를 끌고 와서 불편하게라도 해결을 보려는 미약한 조짐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조짐은 이 오피스 부부의 문제점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한 합리적 도출이라고 봐도 무방한 결과다.
내가 누누히 얘기했지만 그래도 아무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이제 대화 능력이 없다. 그래서 기껏해야 서로의 인생을 존중하자,라는 결론 정도에서 합의를 하고 그것이 최고의 도출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치열한 토론으로 결혼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찰하는 연애가 불가능하니 이런 현상으로 이르게 된 것이다.
아무튼 이런 이성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의 경제적 조건을 다 따져서 결혼을 했을 것이고, 서로의 재산은 각자가 알아서 관리하는 시스템을 인정할 거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니 결혼을 했기에 각종 기념일은 챙기는 결혼 생활을 기본으로 하고 서로의 부모님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기본일 거다. 그 이외의 일상은 각자가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다. 대화가 되지 않으니 융합이 되지 않은 그 틈에서 새어 들어오는 외로움과 심심함을 각자의 감정과 오해로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내는 것보다 그 외로움과 심심함을 서로의 사생활에서 위로를 받는 것을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그 대상이 서로의 이성친구가 된다는 것까지 합의한 것이 지금의 조짐인 거다. 오피스 부부의 관계는 우리나라 특유의 빡빡한 결혼관에 의해서 생겨난 위험한 관계니 그 빡빡하게 만든 도덕과 윤리 그리고 상식의 구조주의를 서로의 이성의 해머로 허물어 뜨린 다음 우리의 결혼 생활이 안전하게 유지가 가능한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이들에게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과정의 진화를 두려워한다. 아무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거다. 지금의 구조는 이렇게 하기로 합의한 부부나 가능한 설계에 불과하지 절대 통용될 사회언어로의 진화는 설득은커녕 용납도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분명 말은 되는데 말이다.
반박을 하지 못하면서 거부한다는 것은 본능대로 사는 존재, 사회에 길들여진 채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회 언어 안에서 어떻게든 욕망을 이루려고 하는 태도로는 기껏해야 아기를 낳지 않는 것 말고는 답을 찾기는 어려울 거다. 하지만 아기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되려 아기를 낳아야 해결이 될 수 있는데 너무 물질화된 세상이다 보니 오답을 정답으로 착각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지금부터 이 이야기를 해보겠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단어의 근본 의미는 무엇일까? 사랑이 이 사회에 혹은 인간에게 부여하는 의미는 무엇인지 우리는 고민을 해봐야 한다. 이제 우리나라는 부정을 하든 인정을 하든 간에 그것을 돈이라고 규정을 지었다. 내 생각에는 이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고 본다. 이쯤 해서 내가 고민 끝에 내린 사랑의 근본 목적을 말하자면 상대방을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것을 돈 자체로 혹은 돈으로 구입한 물질로 유일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기에 하나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에르메스 리미티드 에디션이 전세계 한정 50개, 대한민국에서는 단 하나 들어온 가방을 결혼 선물로 받았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은 그것을 대한민국에서 이부진도 아닌 내가 그 가방을 유일하게 가졌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생길 거다. 웃긴 게 가방을 하나 가진다는 것에 대한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서 자부심이라는 단어가 쓰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3대밖에 없는 람보르기니를 몰고 다닌다는 것도 이런 감정이 드는 게 어색하지 않다.
아무튼 우리나라는 이것을 동의했다. 내 생각의 독창성을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닌 물질로 나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줄 사람을 찾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즉 유일성의 수단이 대화(생각)가 아닌 물질이라는 것 뿐이다. 아마 천만 원 프러포즈를 첫 번째로 받아 유행시킨 사람은 당시일 뿐일지 몰라도 존재의 유일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 무엇이 문제이냐? 바로 다양성의 부재다. 물질은 오직 비쌈이 최우선이다. 하지만 생각은 다양할 수 있다. 삶의 방식은 다 같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질로 그것을 답을 내리는 순간 우리의 삶은 절대적으로 한 방향으로 이끌리게 되어있다. 공장을 운영하는 것보다 강남 아파트를 구입해서 사는 것이 더 이윤이 남고 그 이윤으로 람보르기니를 몰고 다니면 되는 인생이라는 표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표준안에 들어가면 행복하고, 그 근처에 있으면 안심이고, 그걸 노릴 수 있을 거 같다면 목표가 생기는 것이고, 여기밖에 살게 되면 삶에 의미가 없게 된다. 물질 사회로의 규정은 국민 80~90%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만든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불행한 사람들이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현상으로 인해서 사회는 친절이 사라지고, 사람과는 멀리하게 되며, 친구와의 관계주의는 끊겨서 사기는 늘어나고, 가족은 돈이나 달라고 하는 인간관계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국가 붕괴의 시작은 이렇게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이미 시작됐다.
나는 우리나라가 국민 모두가 부자가 되어 사는 중동과 같은 국가가 된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본다. 외국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그들의 노동력으로 국민이 부자가 되는 시스템을 가진 국가에 산다면 나 또한 별생각 없이 그냥 살 수 있을 거 같아서 너무 좋은 거 같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악착같이 살아가야 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으니 지금의 물질 행복론을 빨리 벗어나야 하는 것이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생각을 하지 않는 민족이고 누가 답을 정해준 걸 외우는 것이 최선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걸 착각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이걸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다. 즉 생각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민족인 것이다. 이 말이 거북하면 우리나라 사교육 시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유일성의 다양함이 거세된 민족이니 돈으로 어떻게든 유일성의 갈증을 해소해야 한다. 그래서 명품 열풍이 불었던 것이다. 내가 과거형으로 쓴 이유는 이제 명품도 에르메스를 제외하고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소유하게 되어 리셀의 효과마저 사라진 시점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즉 에르메스 이하의 샤넬, 구찌, 프라다의 한국 매출이 줄어들고 있다.
여유가 없는 월급쟁이들이 나도 유일성을 뽐내거나 뒤쳐지기 싫다는 이유로 구매한 명품들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합리성이 필수다. 자신의 한 달, 두 달 월급보다 비싼 가방을 사며 손이 벌벌 떨리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 월급쟁이들은 그 가방을 당당하게 사는 이유를 찾았다. 다시 팔면 돈이 된다,라는 리셀이 이유였다. 어떤 가방은 프리미엄 비용까지 받아서 이윤을 남긴다는 것은 겁쟁이 월급쟁이들을 용감하게 만들었고 너도나도의 열풍을 만들었다.
그렇게 구입한 가방이 남들보다 조금 더 좋으면 유일성을 느끼게 만들었고, 비슷한 수준이면 뒤처지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그 가방을 이제 중고로 사려고 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불안은 생존본능을 일깨운다. 유일성이고 뭐고 간에 살고 바야 한다는 생각에 집중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제는 알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다. 너도나도 들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가 물질로 행복해지는 것의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이건 최근 혼인 비율이 약간 높아진 것과 이 시기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은 아닐 거다. 다시 유일성의 느낌을 사랑에 기댈 수밖에 없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사랑은 식는다. 대화가 되지 않으니 정신적 가치는 더 빨리 휘발되거나 애초에 없이 시작했다. 그리니 물질로 시작된 나만 바라보는 시선은 곧바로 타인을 향한다. 빠르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승무원에게 명함을 주는 것부터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합의가 되지 않은 이 부부는 여자 쪽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집이 아닌 변호사 사무실로 향해서 바로 이혼으로 해결을 했다. 대화가 불가능하니 연애 기간에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 대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 사례를 보고 남자들이 문제라고 생각하겠지만 대화가 되지 않는 문화에서 섹스 파트너를 두고 생활하는 쪽은 여자가 더 많다는 통계가 있다. 이건 그냥 사례일 뿐이다.
아무튼 서로의 사생활을 인정하는 커플들은 이런 세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유일성의 느낌을 합리적 이성으로 제거한 다음 타인에게 우리의 결혼생활이 행복하게 보여야 한다는 것을 넘어 실제로 서로 행복하기 위해서 각자의 사생활을 인정하자는 합의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 포스팅 초입에 말한 거래의 형태가 인정되고 있다는 뜻이다.
서로 간에 대화가 불가능한 시대(철학이 사리진 시대)의 언어로 만들어진 최대치의 생존 방법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출산의 의미
아기는 그냥 낳아야 하는 것이고 불임을 죄악시 느끼며 불임에 대한 상황을 무조건 슬픔으로 받아들이던 시기에 왜 아기를 가져야 하는지도 모른 체 남들이 다 그러니 나도 그래야 하는데 아니니 슬프다는 식의 태도로 아기를 낳았던 시대가 있었다. 명분의 가장 큰 의미는 대를 잇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아선호사상에 찌든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남자들이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대우 이상으로 책임감을 강요받으며 살아왔기에 남자는 대화 능력을 잃었고 사람과 사회에서 어떠한 위로를 받지 못하며 죽는다는 얘기는 1편에서 했다. 그리고 여자들도 사회로 진출을 하게 됨에 따라 위로로 사라진 사회로 진입하여 남자와 마찬가지로 수다의 영역에서 대화의 영역까지는 진화시키지 못했다고 했다.
고로 현 대한민국의 남녀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대화가 겨우 되는 존재는 함께한 경험이 비슷하고 추억의 공유가 가능한 존재인 친구들인데 우리나라 결혼 문화는 친구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문화이기에 집안은 답답 공기가 흐를 때가 많다고 했다. 그것이 자주 일어나면 어쩌다 한 번 만난 친구로도 감정이 해소가 되지 못한다. 그때는 변호사가 해결해 줄 거다. 오직 재산 분할을 위해서 말이다. 이것이 아기를 낳지 않고 결혼을 하는 자들의 거의 대부분의 최후다. 심지어 이게 좋은 경우에 해당된다. 이혼을 하는 것이 좋은데 이혼을 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최수종 하희라 부부는 상위 0.1%다. 행복하다고 느끼며 사는 부부는 10% 이하라는 통계도 있다. 그러니 상대방 사생활 인정주의 결혼은 이것을 인정한 이성적 태도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추세는 쉽사리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과거 죄악시 여기던 아기를 낳지 않는 결혼 문화는 법적으로도 양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는 더욱더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기를 낳지 않는다는 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유일성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포기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사랑으로 인해서 유일성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상대방이 나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유일한 존재가 된다는 그 존재 방식을 키울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이와 동일한 감정으로 사용가능한 존재가 바로 자식이다. 그 자식이 어릴 때 나만 바라보고 나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시기에 젖을 물리며 나를 바라보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인생에게 내 자식을 낳은 것이 제일 잘한 일이라고 생각이 되게끔 한다. 그리고 엄마라고 처음부를 때가 유일성을 느낄 수 있는 최대치의 감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유일성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버렸다. 경제적인 문제는 부과적인 문제다. 근데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된 문제점이며 아주 큰 문제점으로 인지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언론도 전문가라는 사람들 불러놓고 그렇게 말한다. 여론조사 핑계로 피해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놓고 말이다.
우리가 아기를 낳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에 의미 모두를 돈으로 전부 환전시켜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부 환전시킨 이유는 언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언어를 키우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되지는 않을 거다. 여전히 책도 잃지 않을 거고 책을 읽는다고 해도 대화할 사람이 없으니 언어가 늘거나 생겨나지는 않을 거다. 고로 저출산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해서 사람들은 유일성의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이런 분위기에 적응하는 사람은 나는 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로 진화가 될 것이며 그 태도를 자신들의 불편함을 해소하는 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상대방과 나의 사생활을 인정하는 합의하에 경제 공동체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이 경제 공동체는 혼자 사는 것에 대한 외로움과 불안을 해소할 수 있으며, 둘 사이의 생겨나는 불편한 감정을 상대방 이외의 사람으로 해소가 가능하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로 결혼을 했으니 돈 문제도 크게 없을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부모님에게도 좋은 모습 보여 걱정거리를 안겨주지 않을 수 있고, 친구들에게 보기 좋고, 직장 내지 여타의 피할 수 없는 행사자리에서도 아주 편리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드디어 사랑이라는 단어의 언어(의미)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진입했으며 상대방의 사생활을 인정하는 새로운 결혼 풍조라는 아주 작은 구멍이 뚫린 벽에 얼굴을 대고 바깥세상을 염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그 구멍을 기준으로 벽에 금이 가서 벽이 허물어지고 큰 구멍이 생겨 막을 수 없을지 아니면 누가 손가락으로 막고 기다리다가 구멍이 더 커지면 한 팔로 막고 더 커지면 그 팔의 몸부위로 막고 서 있다가 그나마 그때라도 사회와 정부가 늦게라도 나서서 그 구멍을 막아줄지 모를 세상이다.
단지 확실한 것은 사랑이 사라진 시대에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한 팔을 잃어버릴 각오를 할 사람은 나오지 않을 거다.